드라마에서 수많은 아줌마들은 집을 나왔다. 그리고 집 밖에서 잃어버렸던 자신의 이름과 꿈과 사랑을 되찾았다. 그렇게 이혼은 남편의 구질구질함과 시댁의 파렴치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MBC ), 치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MBC ). 그리고 미처 몰랐던 혹은 잊고 있었던 자신의 재능을 일깨우기도 한다 (KBS ). SBS 의 전설희(김정은) 역시 집 밖으로 나와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가 아닌 꿈꾸는 전설희로 살기를 원한다. 강명석 기자와 윤이나 TV평론가가 가 꿈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편집자주
글. 윤이나(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
머리카락 한 오라기도 남기지 않고 정갈하게 뒤로 틀어 올린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던 때의 전설희(김정은)는, 과거에 살고 있었다. ‘왕십리의 전설’이었던 시절을 뒤로 하고 그녀는 남편 차지욱(김승수)이 잠시나마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었던 기억에 의지한 채 껍데기로만 존재했다. 설희가 진짜 ‘전설희’로 존재할 수 있는 건 그녀가 머리를 풀고, 기타를 잡고, 마이크 앞에 서 있는 바로 그 순간뿐이다. SBS 는 그렇게 ‘진짜 나’를 선택한 여성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을 보여준다.
이혼과 밴드, 전설희가 전설로 살 수 있는 방법 vs <나는 전설이다>│꿈만으로 전설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절묘한 제목은, 이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 설희가 시집을 나오는 것은 ‘나는 전설희다’라는 선언이며, 이후 혼자 살아가는 그녀의 삶은 그 이름을 지켜내기 위한 과정이다. 시집의 구박과 남편의 냉대를 벗어나 집을 나오는 여성의 익숙한 클리셰 속에서 대개의 여성 캐릭터들이 그제야 자아 찾기를 시작하는 데 반해, 설희는 애초에 그 안에서 자아를 잃어버린 적이 없다. 설희는 친구들과 동생 앞에서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곤 했지만, 그 행복이 가짜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핫팬츠에 기타를 치다가 단정한 원피스로 갈아입고 밴드의 연습실을 떠나는 초반의 모습처럼, 결혼 생활 동안 그녀의 모습은 일종의 가면이었기에 그것을 벗어던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설희가 이미 갖고 있는 그 ‘자아’를 지키게 하는 데 집중한다.
는 책임져야 할 그 무엇도 설희에게 주지 않음으로서 그녀가 누군가를 위해서, 혹은 누군가로 인해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녀 자신만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아이를 지켜내야만 하거나, 당장 꾸려나가야 할 생계의 어려움이 그녀에게는 없다. 그래서 전설희가 지켜야 할 것은 단 하나, 자신뿐이다. 는 계급의 차이로 환원될 수 있었던 설희와 지욱 간의 갈등을 계급문제가 아닌 진실을 증명하려는 사람과 그것을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사람 사이의 싸움으로 그린다. 그래서 결국 세상에서 ‘솔직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그녀의 외침이 법정에서 대리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단순하게는 옳고 그름을 증명하고 판결하는 곳이 법정이며, 설희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그러니까 존재의 증명과 사실의 확인이 이루어지는 곳 또한 법정이기 때문이다. 는 설희의 꿈인 마돈나 밴드를 만들어나가는 과정과 비슷한 비중을 할애해 법정에서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마돈나 밴드가 설희가 홀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라면, 법정에서의 시간은 그녀의 그러한 삶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증명을 위한 것이다. 그녀가 전설희로서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 다 놓칠 수가 없다. 그래서 “두 가지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설희의 대사는 이 작품에도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나로 살 수 있기에 강하다
설희는 아름(쥬니)의 아기를 품에 안고 화자(홍지민)에게 자신이 유산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아이를 낳았다면 결혼생활이 더 나은 것이 되었을 지를 물어보고서는 스스로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한다. 설희는 실은 아이도, 돈도, 심지어 누군가의 사랑마저도 필요하지 않은 여자다. 그녀가 스스로를 지켜내기로 결심한 이상, 세상의 어떤 것도 그녀를 흔들지 못한다. 어쩌면 전설희는 지금까지 집을 나섰던 수많은 ‘인형’들 중 가장 강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머니여서, 누군가의 연인이거나 아내여서 강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전설희이기 때문이다.
설희가 노래를 부를 때 눈에 고이는 눈물은 흔한 자기연민도, 외로움도 아니다. 라이브 카페에 찾아온 손님의 사연을 읽어주었던 것과 같은 이치로, 설희는 노래에 자신이 살아온 삶의 시간들을 싣는다. 산울림의 ‘회상’이나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의 서정적인 가사 위로, “미운 건 오히려 나”였던 과거가,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하며 살고 싶은 오늘이 흘러간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신에게 솔직하게 살아가는 것. 능력이 마음을 따라오지 않아도, 삶이 뜻대로 되어가지 않아도 언제나 그녀로 하여금 “그냥 나로, 전설희로 살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 그렇게만 되어간다면 의 내일도 언젠가는 전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글 윤이나
SBS 의 전설희(김정은)는 커트 코베인을 좋아한다. 그가 밥도 왼손으로 먹으며 왼손 기타리스트가 된 건 그를 닮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가 속한 마돈나 밴드는 ‘Smells like teen spirit’ 조차 연주하지 않는다. 그들의 레퍼토리는 모두 흘러간 가요의 리메이크다. “밴드는 내 꿈”이라면서 정작 어떤 음악을 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그리 고민하지 않는 설희의 모습은 가 음악을 다루는 태도이기도 하다. 음악은 하는 것 자체로도 좋은 낭만의 대상일 뿐, 구체적인 고민의 대상이 되는 지금의 현실이 아니다. 설희가 차지욱(김승수)과의 이혼 소송을 시작하며 마돈나 밴드에 전념하는 건 새로운 인생 찾기가 아니다. 마돈나 밴드는 설희가 ‘짱’이던 시절을 재현해주는 회고적 공동체다. 고교 시절 친구 이화자(홍지민)는 여전히 그를 ‘짱’이라 부르고, 학창시절 라이벌이었던 친구나 파이어버드의 장태현(이준혁)처럼 좋아하던 남자도 그대로다.글. 강명석 two@
현실의 치열함보다는 꿈이 주는 위안 vs <나는 전설이다>│꿈만으로 전설이 될 수 있을까" />설희가 대형 로펌 대표인 지욱과 이혼 소송을 하면서도 “위자료 때문에 이혼을 하는 게 아니”고, 그럼에도 현재나 이혼 후의 생계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은 의 방향을 명확히 보여준다. 중요한 건 신데렐라처럼 결혼했지만 남편과 시어머니의 무시를 받으며 산 여성의 현실이 아니라, 그 여성이 현실의 갑갑함을 벗어 던질 수 있는 꿈의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는 이 꿈을 현실에서 한참 떨어진 판타지로만 채색하지도 않는다. 마돈나 밴드는 작은 공연 기회 한 번 얻기도 힘든 아마추어들일 뿐이고, 지욱과 그의 어머니는 설희를 무시하되 그들의 평판에 해를 끼치지 않을 선에서 행동한다. 일단 설희와 합의부터 하려는 그들의 모습은 일반적인 ‘아줌마 드라마‘나 ‘막장 드라마’에 흔히 나오던 남편과 시어머니와 다르다. 설희가 아무리 노력해도 지욱과 맞서기는 쉽지 않고, 승소한다 해도 그와 마돈나 밴드의 상황이 달라지기도 어렵다.
그 점에서 는 ‘아줌마 드라마’의 특징에 영화 을 더한 것처럼 보인다. 처럼 현실 앞에 선 기혼 여성이 주인공이지만, 절박한 현실 앞에서 발버둥치는 여성의 모습 대신 그들이 이룰 꿈과 희망에 무게를 싣는다. 화자가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것으로만 묘사되고, 후배 강수인(장신영)이 밴드를 매니지먼트 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할 뿐 생계에 대한 고민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건 현실의 무게나 꿈을 이루기 위한 치열함이 아니라 꿈이 주는 위안이다. 그래서 에 마돈나 밴드를 취재하는 다큐멘터리 가 등장하는 건 흥미롭다. 는 마돈나 밴드와 그들의 친구 강란희(고은미)의 일상을 촬영한다. 하지만 PD는 설희가 지욱의 아내라는 걸 알자 억지로 그를 부각시키려 하고, 란희는 자신이 돋보이려고 마돈나 밴드의 공연을 방해한다. 는 현실적인 톤은 가졌지만, 진짜 현실은 담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가공된 모습이 오히려 시청자를 끌어들일 드라마가 된다.
설희도, 도 더 독해져야 한다
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주인공에게 현실의 무게를 부여하되 현실의 고민은 덜어낸 만큼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점점 줄어든다. 드라마는 밴드의 연습과 공연, 설희와 지욱의 공방을 반복할 뿐 캐릭터를 발전시킬 에피소드를 만들지 못한다. 지욱과 오승혜(장영남)의 불륜을 의심한 화자가 벌이는 해프닝은 시간 때우기에 가까운 전형적인 에피소드였다. 설희든 든,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현실에 한 발짝 다가서야할 필요가 있다. 6회에 설희의 변호사(장항선)가 설희에게 “더 독해져야 승소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건 마치 드라마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설희와 합의에 실패한 뒤 지욱은 보다 비열해졌고, 쿨한 친구 사이로 포장됐던 지욱과 승혜는 사실 불륜관계였다.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드러날 때, 설희는 독하게 그 현실들과 부딪칠 수 있을까. 앞으로 의 성패는 거기 달려 있을 것이다.
글 강명석
글. 윤이나(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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