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하와 얼굴들`의 장기하가 말했다. “여러분,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을 즐기면서 힘들고 우울한 거 다 떨쳐버리…라는 말은 못합니다. 그렇다고 슬픔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 이 시간이 지나면 학생들은 학교로, 직장인들은 회사로, 우리는 또 마감지옥으로 돌아가겠지. 하… 귀신같은 장기하!
급히 먹는 밥은 결국 체하게 마련이다. 격한 슬램대신 가벼운 스캥킹과 함께한 킹스턴 루디스카는 서울을 벗어나 ‘록’을 즐기겠다고 무작정 뛰어든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예열시간을 주는 무대였다. ‘지금 막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이라는 멘트가 딱 어울리는, 말끔하지만 조금은 촌스러운 양복을 차려입은 그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양팔을 흔들며 무대에 올랐고, 그 스카 파티가 객석으로 전염되기까지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비록 “팬이지만 너무 더워서 무대 앞으로 못 가겠다”며 그늘진 언덕에 돗자리를 펴는 이들도 있었지만, 감히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무대 앞쪽으로 나와 있건 멀찌감치 떨어져 돗자리에 벌러덩 누워 있건 저마다 ‘쿵-짝 쿵-짝’ 리듬에 발을 구르고, 옆 사람과 어깨동무를 하며 9명이 만들어내는 풍부한 연주를 만끽할 수 있으니 말이다. 보컬 최철욱은 노래를 하는 중간 중간 ‘잘한다-’는 추임새를 넣으며 관객들의 몸짓에 화답했다. 킹스턴 루디스카와 관객들의 율동으로 가득했던 잔디밭이 그 어느 때보다 환해보였던 건 한창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3시라서가 아니라 킹스턴 루디스카 특유의 밝은 멜로디와 그에 어울리는 흥겨운 몸짓 덕분이었다. 서서히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잠시 현실을 도피해 있던 관객들을 향해 딱 부러지는 말투로 씁쓸한 현실을 일깨워 준 장기하는 리허설 때부터 쿨하고도 시크했다. 공연 시작 30분 전부터 무대 앞으로 몰려든 관객들은 기타를 만지고 사운드의 미묘한 볼륨까지 조절하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손동작 하나, 말 한마디에도 환호성을 질렀지만, 돌아오는 건 그가 읊어대는 무미건조한 가사처럼 “진짜 공연이 아니니 못 본 척 해달라”는 대답이었다. 그 절정은 ‘싸구려 커피’를 부를 때였다.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눅눅한 비닐장판’ 대신 무대 위에 벌렁 누워 하늘을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노래를 이어나가는 그의 모습은 가히 여심을 뒤흔드는 아이돌의 눈웃음을 능가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신곡 ‘TV를 보았네’와 ‘모질게 말하지 말라며’를 들려주면서 “나중에 앨범으로 더 좋게 들려드릴테니 지금은 동영상 촬영을 참아달라”는 그의 말에 핸드폰과 캠코더를 내려놓는 관객들의 그 고분고분함이란. 금주 다이어트 덕분에 더욱 슬림해진 장기하는 진정 마성의 남자인걸까.
선선한 저녁 바람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객석은 점점 뜨거워졌고, 관객들 사이의 공백을 촘촘히 채워나간 건 흥건한 땀 냄새였다. 비처럼 흘러내리는 땀에 대처하는 자세를 보면 록 페스티벌 초보와 고수의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손수건을 목에 두르거나 양 손으로 부채질을 한다면 초보, 500㎖ 작은 생수병대신 1.5ℓ 페트병을 준비했다면 중수 그리고 물총을 물싸움용이 아닌 간이샤워용으로 사용한다면 고수다. 손에 들려진 1.5L 생수병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물총을 가진 관객이 종종 하늘을 향해 물총을 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생명수를 기다리는 환자처럼 그 물줄기를 향해 하염없이 목을 빼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이게 땀인지, 물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지만 마치 내일은 없는 것처럼 체력이 방전될 때까지 뛰노는 관객들에게 그게 중요할 리 없다.
밤이 깊어갈수록 무대에 켜지는 조명은 늘어났고, 뮤지션들의 샤우팅과 관객들의 슬램도 강렬해졌다. 특히, 뮤트매스가 키보드 위에서 앞구르기를 하고 경호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객석으로 뛰어든 건 음향체크와 무대설치 관계로 30분 넘게 공연이 지연됐음에도 연신 ‘뮤트매스’를 외치며 기다려 준 관객들을 위한 일종의 팬서비스였다. 심지어 드러머는 드럼을 연주하다가 스틱이 부러졌지만 전혀 당황하거나 놀라는 기색 없이 새 스틱을 꺼내들어 연주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 드러머보다 쿨한, 아니 쿨하다 못해 무신경한 뮤지션은 이 날의 헤드라이너 펫 샵 보이즈였다. 하루 종일 잔디밭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는 사람들, 맨발로 무대 앞으로 달려 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며 점프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듯 펫 샵 보이즈는 그저 무표정으로 마이크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그 무심함은 관객들을 자극시켜 그들을 더욱 날뛰게 만들었다. 대망의 ‘Go West’가 흘러나오자 관객들은 결국 정신줄을 살포시 잔디밭에 내려놓은 채 검지를 치켜들고 ‘오오 오오오오오-’를 외쳐댔다. 한 마디로, 다들 미쳤다.
무대 위의 뮤지션에서 손에 들린 취재수첩으로 시선을 옮긴 순간, 이제 다시 현실이다. 무대를 빠져나가는 관객들의 목소리는 쉴 대로 쉬었고 그 중 일부는 과도한 점프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뚝거렸다. 하지만 늘 학교 혹은 사무실 책상 밑에 가지런히 모아 둔 다리, 칠판과 컴퓨터만을 바라보던 눈은 오늘 하루 잔디밭을 뒹굴고 맑게 갠 하늘을 원 없이 바라볼 수 있었다. 장기하의 말처럼 “그런다고 슬픔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 슬픔을 마음 한 구석에 잠시 내려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지산 그리고 록의 힘은 실로 대단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