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대에는 한 개인의 역사가 어떤 산업의 역사를 설명하는 가장 빠른 버튼이 되기도 합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풍요의 시대를 누렸던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명필름 대표 심재명’은 빠트릴 수 없는 키워드일 것입니다. 서울극장 기획실 카피라이터에서, 원조 마케팅회사 명기획을 거쳐, 명필름이라는 이름을 걸고 영화를 제작한 지 15년에 접어드는 충무로의 노련한 큰언니. , , , , 에 이르기까지 장르도 성격도 다른 작품을 매해 나이테처럼 품고 커나가는 명필름이란 나무는 이제 웬만한 바람에는 끄떡없이 대지에 그 튼튼한 뿌리를 넓혀가는 중입니다. 기 세고 목소리 큰 여자들이 살아남을 거라는 통상적인 오해를 뒤집고 사려 깊은 목소리와 담담하고 진중한 태도로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감을 만들어낸 심재명 대표. 지난 15년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통의동에서의 2시간은 어쩌면 그녀가 맨발로 읽어낸 한국영화 15년 사의 핵심, 요약정리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100: 먼저 오는 8월 7일 15주년을 맞이하는 명필름의 생일을 미리 축하드립니다!
심재명: 감사해요. 하…. 그나저나 벌써 15년이네요. (웃음)
100: 컴필레이션 음반도 발매되고 8월 2일부터는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15주년 기념 영화제도 열린다고 들었어요.
심재명: 예, 큰 행사는 아니지만 스스로 이 만큼 온 것에 대한 격려와 자축의 의미예요. 15년 된 영화사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매년 꾸준히 영화를 해 온 곳도 드물잖아요.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대에 함께 발을 맞추면서 좋은 인력들과 재능 넘치는 사람들과 함께 작업을 해왔다는 보람에 우리끼리라도 자리를 마련해서 스스로도 축하하고, 이왕이면 다른 관객과도 이 기쁨을 함께 나눌 시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난 15년 동안 명필름 내부도 드라마틱했지만 동시에 한국영화계 자체가 드라마틱한 시절을 거쳐 왔잖아요. 물론 문제도 많았지만 그 시절을 겪어내며 성장도 했구요. 그 역동적인 시간들을 명필름이 꾸준히 함께했다는 의미도 남다르고요.
“은 개인적인 추억을 많이 남겨낸 영화” 100: 지금까지 만들어온 30편 가까운 영화들 중에서 이번 15주년 영화제에서는 , , , 이렇게 네 편만을 상영작으로 선정하셨더라고요. 단순히 흥행작 위주의 선정은 아닌 것 같고, 각각의 작품들이 명필름의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가 남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심재명: 상영작을 정하기에 앞서 이은 감독과 상의도 하고, 명필름 식구들하고도 어떤 작품이 좋을지 얘기를 해봤어요. 말씀하신대로 단순히 흥행작 위주는 아니고 각 영화마다 개성과 의미가 남달라요. 특히 97년 작인 은 오늘의 명필름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한 영화였죠. 흥행면이나 작품성면에서도.
100: 고백하자면, 저 역시 당시 에 너무 빠져서 영화 속 배경이 된 피카디리 극장 앞 카페에서 한석규 씨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있었던 기억이 나요. (웃음) 나름 ‘성지순례’ 였달까요.
심재명: 아, 정말요? 하하하. 그렇게 PC통신, 유니텔, ‘번개’ 같은 개인적인 추억을 많이 남겨낸 영화기도 하고 을 보고 한국영화의 미래를 보았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 영화를 계기로 영화를 시작했다는 업계 후배들도 있었으니까요. ‘웰메이드 상업영화’였다고 자평하는 영화예요. 역시 상업적 성공 뿐 아니라 한국 영화가 사회와 시대를 담는다거나 영화 한 편이 사회적 기능을 한다는 의미에서 자랑스럽고 중요한 영화였죠.
100: 박찬욱 감독을 B급 취향 강한 외골수 영화광에서 대중감독으로 확고히 만든 작품이기도 하구요. (웃음)
심재명: 하하하하. 그리고 임순례 감독의 는 손해도 보고 흥행적 아쉬움도 있었지만, 명필름의 인장이 찍혀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인간과 삶, 그 주변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주제 등이 그간 명필름이 계속 가져왔던 생각들과 가장 비슷한 부분이 많죠. < YMCA 야구단 >은 김현석 감독이 우리와 작품을 제일 많이 한 감독이고. (웃음) 명필름의 대표적인 로맨틱 코미디를 보여주겠다는 의미가 있었죠. 딱 네 편만 상영해서 섭섭해 할 감독들도 있겠지만 20주년을 기다려야죠, 하하하.
100: 상영 외에 특별한 이벤트도 있나요?
심재명: 네, 한석규, 송강호 씨 등 각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극장을 찾아서 당시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그럴 예정이에요.
100: 와! 오랜만에 동창회 분위기겠군요. (웃음)
100: 영화 일을 시작하신지도 벌써 23년이 흘렀습니다.
심재명: 졸업하고 출판사 4개월 다니다가 우연히 서울극장 기획실에서 영화광고 카피라이터를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근무시간에 몰래 면접을 봤어요. 그렇게 입사한 게 88년이었죠.
100: 현재 분업화되고 시스템화된 영화 마케팅을 생각한다면, 극장에서 영화를 직접 홍보하던 시절이라는 건 아마도 지금 젊은 관객들에게는 이해가 잘 안 되는 개념일거에요. 그런 시대에 처음 영화 쪽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심재명: 한 편의 영화 때문이었어요. 어렸을 때는 미술을 좋아하고 화가가 되고 싶어 했는데 한창 사춘기인 중 2때 프랑스 당대 최고 미남배우인 제라르 필립이 주연했던 모딜리아니의 전기 영화 을 봤어요. 한 편의 영화가 저렇게 예술가의 삶을 담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고 그 날 밤 충격과 감동에 휩싸였었죠. 그 이후로는 학교에서 뭐하고 싶냐고 물으면 부끄러운 목소리로 “영화감독…” 이라고 했었죠.
100: 그런데 대학 때 전공은 미술도 영화도 아니었잖아요?
심재명: 미술 하기엔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워낙 소심한 성격에 보수적인 집안이라 감히 진짜 영화를 하겠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당시 영화라는 건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가령 집안에서 내놓은 사람들? 하하하. 결국 영화에 대한 애정이나 짝사랑은 프랑스 문화원의 막차를 타면서 꽃을 피웠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시 영화 월간지 에 학생 기자를 하면서 영화를 볼 기회들이 많이 생겼죠. 종로구 내수동에 있는 허름한 사무실에 시사회 티켓 받으러 가고. (웃음) 당시 파고다 극장 같은 데서 한국영화 특별전을 많이 했는데 그 곳에서 임권택, 이만희, 김호선, 하길종 감독 등의 영화를 처음 접하고 우와, 한국영화들이 이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을 보러갔을 때 안성기, 배창호 감독 관객과의 대화를 보면서 ‘오오오’ 감탄하고 그랬죠. 서울극장 면접 볼 때도 한국영화 감독을 줄줄줄 읊으니까 도대체 넌 어디서 그런 영화를 접했으냐 물어보셔서 에서 다 배웠다고 했죠. 하하하하. 참 재밌는 시절이었는데.
“카피라이터 시절 가장 히트했던 건 ‘잘까, 말까, 끌까, 할까?’” 100: 그렇게 들어간 서울극장 시절에 만난 인연들이 지금 보면 굉장하죠?
심재명: 당시 제가 서울극장 곽 회장님으로부터 ‘미스 심’으로 불릴 때 (웃음) 강제규, 정성일 씨가 시나리오 들고 왔다 갔다하고, 건너편 피카디리 극장에는 (신씨네 대표, 현재 를 제작 중인) ‘신철 부장’이, 단성사에는 ( 제작자인) ‘석명홍 부장’이 계셨고, (의 감독인) ‘이준익 부장’이 제 전임자로 기획실에 계셨다가 독립해서 인쇄소에 옆 쪽방을 얻어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던 시절이었죠.
100: 그 세계에서 ‘미스 심’은 막내였겠네요.
심재명: 네. 그래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서울극장에 입사한 미스 심입니다” 인사를 많이 하고 다녔죠. 그러면서 당시 극장에서 일하던 젊은 영화인들이 굉장히 친하게 지내서 거의 매일 만났어요. 소모임도 만들어서 매주 발제를 하기도 하고, 제작, 배급 등에 대해서 공부하기도 하구요.
100: 굉장히 아카데믹한 시절이었군요.
심재명: 네. 술도 안마시고! 아, 가끔 나이트를 가진 했지만. (웃음) 많은 걸 정말 빨리 배웠던 시절이었어요.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게 지금 돌이켜보면 굉장한 힘이었죠.
100: 카피라이터 시절 썼던 카피 중 가장 자신 있게 내세울 작품은 뭘까요?
심재명: 역시 의 ‘잘까, 말까, 끌까, 할까?’ 겠죠. 영화 대사 중에 최민수 씨랑 심혜진 씨가 TV를 보다가 “잘까?”하는 묘한 대사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만들었어요. 당시 정말 히트를 쳤죠.
100: 그리고 명필름의 전신인 명기획이 만들어진 거죠?
심재명: 네, 제작사는 아니었고 지금의 올댓시네마 같은 최초의 마케팅 회사였죠. 당시 (이제 고인이 된) 정승혜 대표가 그 특유의 손글씨로 ‘명’이란 글자를 써주었던 ‘명기획’ 아크릴 현판을 지금도 갖고 있는데… 그러다가 95년 8월에 지금의 명필름이 시작된 거죠.
100: 카피라이터도 그렇고 마케팅도 그렇고 누군가 만들어 놓은 상품을 잘 포장해서 파는 사람과 그걸 만드는 사람은 입장 차가 다를 텐데, 제작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심재명: 결국 영화를 만드는 것이 궁극의 꿈이라 생각했어요. 결정적 동기는 94년에 이은 감독과 결혼하면서였죠. , , 등을 제작한 영화제작소 장산곶매를 거치면서 쌓인 이은 감독의 합리적인 제작 노하우와 제가 충무로에서 배운 실전경험들이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은 감독이 이러지 말고 우리 같이 회사 차려서 영화하자고 해서 결혼한 이듬해 명필름이 창립된 거죠.
100: 창립작이었던 은 주로 남자감독의 시선으로 풀어 낸 기존 한국영화와는 달리 보기 드물게 여자의 눈으로 보고 여자의 마음으로 이야기 하는 영화였다는 기억이 납니다.
심재명: 그렇죠. 의식적으로 여성주의 영화가 필요해서 만들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관심이 그렇게 갔던 것 같아요. 유쾌한 여성주의적 시각이 담긴 영화를 꿈꾸었던 찰나에 이 시나리오를 만나서 결국 창립작이 되었어요. 그 외에도 영화화 되지는 못했지만 이라는 영화를 준비했었는데 이 역시 천방지축 풋내기 주부가 자기 남편이 납치되면서 아기를 등에 업고 고군분투하는 내용이었어요.
100: 80년대 한국영화가 대부분 감독의 이름을 먼저 기억하게 만드는 작품들이었다면 명필름이 시작되는 앞 뒤 시점에 프로듀서의 역할이 중요한 ‘기획 영화’의 비중이 커졌다고 볼 수 있잖아요?
심재명: 그 역할모델은 신철 대표였던 것 같아요. 의 경우만 봐도 아이템을 개발하고 자료조사하고 시나리오 완성해서 강우석 감독에게 프러포즈해서 영화를 만들었거든요. 한국형 ‘기획 영화’의 개념을 만든 분이시죠. 옆에서 같이 일을 하면서 벤치마킹을 많이 했어요. 열악한 상황에서도 제작비를 지켜내는 시스템은 이은 감독에게서 배웠구요. 신철 선배에게선 기획적 감각, 직관, 크리에이티브를 배우면서 결국 명필름이라는 제작사의 성격이 만들어진 거죠.
100: 의 성공 이후 지금도 어떤 영화를 말 할 때 자주 쓰는 말이 바로 ‘웰메이드 영화’예요. 돌이켜보면 이건 거의 명필름에서 만든 신조어가 아니었나 싶은데요.
심재명: 예, 아마 그 개념 자체를 저희가 만들어 냈던 것 같아요. 짜임새 있는 프로덕션과 함께 촬영, 조명, 미술, 연기, 시나리오 등이 일정 수준 이상 높은 작품, 이라는 뜻이었죠. 그런 말로 작품을 포장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런 웰메이드한 영화를 만들자는 목표였달까요?
“일단 한번 한다고 했으면 될 때까지” 100: 올해 개봉한 의 시작이었던 ‘노근리 다리 프로젝트’가 시작된 건 7년 전인 2003년이었고, 연말에 개봉하는 도 거의 5년 정도 걸린 프로젝트였잖아요. 유독 장기 프로젝트가 많은 편인데 결국에는 그걸 만들어내는 힘은 뭘까요?
심재명: 저희 성향이 뭔가를 쉽게 포기하거나 중단하지 않는 편이예요. 일단 한번 한다고 했으면 대부분 될 때까지 해요. 오기 같은 게 있기도 하고, 다른 건 몰라도 꾸준하고 성실하다는 면에서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웃음)
100: 아까 잠시 이야기를 했지만, 박찬욱 감독도 그렇고 을 함께한 김기덕 감독도 그렇고 감독들의 원석 같은 재능들이 더욱 정제된 상태에서 관객과 만나는 지점을 명필름이 잘 잡아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재명: 당시 박찬욱 감독이 까만 가방에 시나리오 5개씩 갖고 다니던 시절이었죠. (웃음) 거기에는 의 모태가 된 이야기도 있었고 도 있었어요. 명기획 시절에도 박찬욱 감독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분이 쓴 시나리오들이 다 놀라웠죠. 개인적으로 도 되게 재밌게 봤었고요. 하지만 예산이 25억에서 출발해서 27억에서 끝났는데, 당시만 해도 20억이 넘는 건 초대작이었어요. 지금으로 치면 80, 100억짜리 영화 쯤 되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상업적 성공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고, 박 감독님의 B급 정서가 너무 드러나면 다소 위험하다는 생각에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중재해나갔던 것 같아요. 결국 프로듀서와 감독은 긴장과 견제의 관계니까요. 대신 프로덕션에 필요한 건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줬고, 좋은 터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죠.
100: 특히 확고한 그림을 그려놓고 있는 감독일수록 어떤 합의점을 찾는 일이나 설득하기란 어려운 일일 텐데 대표님만의 특별한 노하우가 있을까요? (웃음)
심재명: 사람하고 만나서 설득하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대신 그 사람의 재능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모두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사랑이나 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어차피 언변이 화려한 사람도 아니고 진심을 담아 어눌하지만 그냥 말하는 편이죠.
100: 김기덕 감독 역시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이었는데 명필름과 작업을 한다는 소식에 조금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심재명: 은 사실 저는 끝까지 반대했던 영화였어요.
100: 왜죠?
심재명: 당시엔 지금보다 훨씬 더 손해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게 절박했고, 좋은 얘기라도 상업적 성공 가능성을 많이 봤는데 이은 감독은 꼭 이 작품을 하고 싶다고 했어요. 결국 마지막에 제작을 결심했던 건 제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서도 기어코 영화를 만들어내는 김기덕 감독의 헝그리 정신을 직접 배워 보자였던 것 같아요. 다행히 전작인 의 성공 덕에 CJ가 같이 작업에 동참 할 수도 있었고. 결국 김기덕 감독처럼 1인 다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명필름의 시스템이 필요 없는 분이라는 걸 배웠죠. (웃음) 이후 이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 출품되었을 때 이은 감독은 너무 기쁜 나머지 사무실 근처에 매일 나오시는 야채장수 할머니에게 “할머니, 저희 이 베니스 영화제에 나갔어요!”라고 너무 자랑스럽게 외치기도 했었죠. (웃음)
100: 현재 을 함께 만들고 있는 김현석 감독의 영화 주인공은 소심하고 어떻게 보면 찌질한 남자들이잖아요. 의 성공과 함께 이제는 명필름 속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지만 처음엔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어요.
심재명: 아니죠. 명필름에 딱 맞죠! 마초 같고 힘쓰는 남자, 라면 너무 안 맞겠지만. (웃음) 명기획 시절에 정승혜 대표랑 시나리오 읽었고, 어느 날 밤 심야에 그걸 비디오로 보다가 울었어요. 주류도 비주류도 아닌 묘한 정서에, 특히 시나리오가 너무 좋더라고요. 김현석 감독은 대학교 4학년 카투사 시절에 영화하고 싶다고 우리 회사에 찾아온 이후로 , 의 각색 및 조감독 등 그야말로 ‘명 키드’로 커왔던 감독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명필름 직원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도 했으니까요. (웃음)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 안에서도 늘 성장의 이야기를 담는 것도 그렇고, 그 나이 되도록(!) 계속 연애 얘기를 하면서도 허투루 연애 얘기만을 하지 않는 게 좋아요.
100: , 의 임상수 감독도 그렇고 한 번 한 감독과 다시 작업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심재명: 사실 제 성격이 우리 작품 하나 같이 했으니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야! 같이 하는 거야! 이런 스타일도 아니고 좀 까칠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어요. 특히 회사 차리고 초중반에 깍쟁이 같다는 말도 많이 들었죠. 지금은 그런 얘기 없어요. 하하하. 경험을 쌓은 만큼 여유가 생긴 것 거겠죠?
100: 제작사도 사람처럼?
심재명: 네, 성장하고 변하는 것 같아요. 마치 사람처럼.
“먹고 사는 업을 통해 삶에 대해 배운다는 건 행운” 100: 그런 성장 안에서 찾아온 가장 위기의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심재명: 아무래도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제일 힘들었던 건 MK픽처스 시절이었죠. 1년에 4편 이상을 제작 하고, 40명이 넘는 직원들과 일을 했으니 척하면 착하는 식의 커뮤니케이션이란 게 불가능 한 구조였고,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랄 수도 없는 시간들이었죠.
100: 사실 당시 강제규 필름과 명필름이라는 거대한 제작사 둘이 합병을 하고, 거기에 상장까지 하면서 몸집이 커나가는 그림들을 보면서 항간에는 이제 저들이 돈을 벌겠다는 마음이구나 하는 말도 많았고, 우려 섞인 예측도 많았었죠. 이런 리스크 감당하고서라도 합병과 상장이라는 큰 선택을 한 이유 뭐였나요?
심재명: 하나의 영화 제작사로만 있는 것의 한계가 분명하기도 했고, 자기 포션을 넓혀야 시장에서 살아남고 경쟁력 있다는 생각도 있었죠. 결국 유통-배급-투자 기 싸움이나 영향력 안에서 우리가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영화 잘 만드는 사람끼리 힘을 합쳐서 영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안고 뛰어들었죠. 물론 결과적으로는 시너지가 안 났지만. (웃음) 그때 막 상장을 했던 영화 동료들 보면 우리 모두 비즈니스 마인드가 좀 부족했던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제작사 본연의 효율성도 떨어지고, 퀄리티도 떨어지고,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었어요.
100: , 를 만든 제작사와 를 만든 제작사와의 합병이라니 이제 와서 말이지만 과연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까 우려가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심재명: 워낙 다르기 때문에 그 역시 시너지가 날 거라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거죠. 어쩔 수 없니 확장해 나가야 하는 많은 비즈니스를 소화하기에 역량상으로도 불가항력적 부족함이 있었고요. 역량은 여기까지인데 너무 많은 걸 하니까 서버 다운 된 거죠. 이은 감독은 몇 번 쓰러지기도 했고. 스스로한테도 후회되는 판단들도 많이 내렸고, 올해 몇 편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살았어요. 반성의 시간을 많이 줬던 시절이었죠. 당시엔 너무 정신없지만 결국엔 그게 또 값진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100: 개봉한 영화가 28편이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두 편(, )까지 더하면 서른 편을 제작해오면서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과 아닌 작품, 평단의 사랑을 받은 작품과 아닌 작품 등 다양한 흥망성쇄를 겪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과정을 통해 어떤 점을 배웠을까요?
심재명: 영화라는 것이 결국 수십억의 비용이 들어가는 첨예한 비즈니스에 속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한 편이 일궈낸 결과나 방향들을 통해서 많은 걸 배우는 것 같아요. 을 만들면서 더불어 함께 사는 삶에 대해 각성하게 되기도 했던 것처럼요. 이렇게 먹고사는 업을 통해 삶에 대해 많이 배운다는 건 참 행운인 것 같아요. 영화 한 편, 한 편 할수록 경험도 늘어나고, 제 자신도 조금씩 성장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요.
100: 얼마 전 에서 신경숙 작가와 나눈 대담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는 다른 아니라 “요즘 젊은 작가들이나 감독들은 참 밝더라”는 말이었어요. 아무래도 시대적인 부채감이 있을 수밖에 없는 세대이고, 의 제작과정을 보더라도 단순히 영화 한편을 만들겠다는 것 이상의 역사적 소명의식도 느껴지는데요.
심재명: 소명의식까지는 아니고. 그 때 그 때 나이와 고민에 부응하는 것 같아요. 영화라는 게 몇 년 동안 온 힘을 다해서 만드는데 단순히 돈 벌 수 있으니 싫어도 하자, 이렇게는 못 만드니까요. 그나저나 요즘 트위터를 하면서 난 참 심각하고 진지한 사람이란 걸 새삼 느껴요. (웃음) 속으로는 잘난 척도 하고 재밌게도 살지만 근본적으로 유쾌하고 쿨하고 시크, 발랄한 사람은 전혀 아닌 것 같아요.
100: 제작하면서 일부러 감정 자제를 하는 부분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심재명: 그럼요. 사실 영화 제작이라는 게 별 일이 다 있고 극단의 경험을 하게 되니까 겉으로는 기뻐도 기쁘지 않은 척, 담담해보이려 하는 습관이 들었죠. 내가 흥분하면 같이 참여하는 식구들, 감독들이 힘들고 흔들리니까.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좌절하고 흥분하는 걸 드러내는 건 일을 그르친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인 기질 자체가 장녀의 대표주자” 100: 기본적으로 ‘장녀 기질’이 있으신 건 아니구요?
심재명: 아우 정말, 저야말로 장녀의 대표주자죠! (웃음)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해서 중학교 입학할 옷 사서 입고.
100: 첫 아르바이트는 뭐였는데요?
심재명: 전세 살고 있는 주인집 여섯 살짜리 아들 국어 가르치기! (웃음)
100: 이제 개인적인 장녀기질을 넘어 한국 영화계 안에서도 중장년층으로서의 책임감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심재명: 물론 정승혜 대표처럼 살갑게는 잘 못하지만 내 역량 안에서 열심히 하려고 해요. 늘 예의를 갖추고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 정도랄까? 과분하게도 저를 역할모델로 생각하는 후배 영화인들도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늘 제 역할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요.
100: 그런데 대학 다닐 때는 의 이미연 감독과 ‘고고장 죽순이’ 시절을 거쳤다는 증언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웃음)
심재명: 그래봤자 연애도 못하고 춤만 추다가 일찍 나왔죠. 일련의 방황이었던 거죠. 20살 청춘이 겪을 수 있는 하찮은 방황. 사실 면도칼 씹는 그런 사춘기도 아니고 무조건 말을 안 듣고, 공부도 안하고, 자야 될 시간에 안자고 영화보고, 엄마는 늘 쟤는 왜 저렇게 말을 안 듣지? 할 정도로 집안의 ‘웬수’ 였어요. 동생(‘보경사’ 심보경 대표)은 자기까지 이러면 큰일 난다고 생각했는지 착한 모범생이었구요. 내가 빨간 바지 입고 디스코텍 갔다 오면 심보경대표가 아유, 우리 언니는 왜 저럴까 창피하다고 막 이랬는데. (웃음) 결혼하기 전에는 워낙 다혈질이기도 했어요. 극장에서 일할 때는 욕쟁이라고, 욕 좀 그만하라고 그런 말도 들었어요. 남편 만나서 사람 됐죠. (웃음)
100: 이은 감독과는 성격이 많이 다른 편이죠?
심재명: 네, 저는 즉흥적이고 직관적이고 감성적이고, 이은 감독은 이성적이고 철저해요. 수첩을 보면 1년 스케줄이 다 정해져 있는 사람 있잖아요. 심지어 머리 자르러 가는 날도 스케줄대로 가는 사람이니까.
100: 심재명 대표가 영화지 파워리스트에 10위 안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반면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은 감독은 조력자 느낌이 강한데, 사회적으로 성공한 유명한 아내가 있는 남편들은 상대적인 비교를 당하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에 따른 갈등은 없나요?
심재명: 사실 제 능력이라기보다는 흔치 않던 여성 제작자니까 매체 주목을 받은 거죠. 명필름의 성과는 두 사람이 서로 보완재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이은 감독은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조정하는 능력이 뛰어난 참모형 인간이라서, 그런 걸 전혀 개의치 않는 캐릭터예요. 예전에 한 유명 여배우와 결혼한 어떤 남자배우에게 우리 이제 누구누구 남편이 아니라 ‘이은 부인 심재명’ 할 수 있는 날이 오도록 노력하자! 라는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할 정도로요.
“창의적이면서 성실한 사람을 꿈꾸면서 산다” 100: 송강호, 전도연, 문소리 등 명필름 하면 떠오르는 많은 배우들과의 작업을 해왔는데 개봉을 앞두고 있는 을 보면 확실히 배우들의 세대교체가 된 것 같아요. 엄태웅 씨를 제외하면 최다니엘, 이민정, 박신혜 등 80년대생 이후 젊은 배우들로 채워졌는데 이들과의 작업은 어떠셨어요?
심재명: 물론 젊은 배우들이야 어느 정도 절 어려워했겠지만 꽤 재밌게 작업했던 것 같아요. 어리다고 얘기가 안 통하는 것도 아니었고. 쫑파티 끝나고 노래방에 갔는데 송강호 씨 레퍼토리와는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웃음) 여기는 온갖 팝, 발라드, 댄스까지 다양하게 이어지는데 ‘므흣’하죠. (웃음) 에너지를 많이 얻게 되었어요. 매번 좋은 품성을 가진 배우들과 작업 할 수 있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100: 대중을 상대로 하는 대중영화 제작자로서의 ‘촉’을 유지하기 위해 특별히 노력하는 부분이 있나요?
심재명: 눈도 노안이 왔고, (웃음) 이제는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감각은 못 따라가는 것 같아요. 대신 깊이를 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죠. 트렌드를 쫓거나 감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 대신 사람의 깊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오히려 많이 해요.
100: 지난 15년을 버텼다는 표현보다는 지켜왔다는 표현을 쓰고 싶은데 결국 그 시간을 지켜올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심재명: 빚을 지면 꼭 갚고. 술 약속 하면 술 약속 꼭 지키고. 한번 밥이나 먹지, 이런 공수표 안 날리고. (웃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건 성실함 밖에 없는데… 그리고 영화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 영화가 좋아서 시작했기 때문에 결국 지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00: 후대에 한국 영화사에 심재명이란 이름이 쓰인다면 어떤 사람으로 기록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세요? 술 약속을 하면 꼭 지키는 사람이었다? (웃음)
심재명: 창의적인 천재형은 게으르거나 무책임하고, 성실한 사람을 보면 재능이 덜하고. 둘 다 가진 사람이 진짜 멋진데, 창의적이면서 성실한 사람을 꿈꾸면서 사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아마도 그런 평가를 당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가 진짜 답이 아닐까요?
글, 사진. 백은하 one@
편집. 장경진 three@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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