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안 들어서…” 실질적 데뷔작인 영화 때와 외모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는 말에 박해일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캐스팅 때부터 원작 팬들의 지지를 받은 영화 의 유해국 역을 연기하는 것에 대해, 강우석 감독과의 첫 작업에 대해 최대한 단정적이지 않은 표현으로 설명하는 그의 조심스러움은 술에 취해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자신이 작곡한 악보를 전하던 소년()의 객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연한 일이다. 벌써 9년이 흘렀고 그동안 그는 과 로 흥행의 기쁨도 누려보았고, 와 같은 독특한 작품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짧지만 강렬하게 남기기도 했다. 요컨대 그는 성장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던” 의 기억을 디테일하게 말하는 그에게서 또 한 번의 성장을 예감한 건 그래서다. 다음은 그 예감의 징후를 느끼게 해주는 박해일과의 대화 기록이다.의 원작 팬들이 가상 캐스팅 놀이를 할 때 유해국 역에 가장 많이 뽑히는 배우였다.
박해일 : 그건 이미지적인 차원, 말하자면 1차원적인 이야기였던 것 같고, 막상 캐스팅 되고 연기를 해보니 그것이 그다지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지가 맞는 것과 연기가 잘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니까. 혹 좀 더 유리한 지점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렇게 가다 보면 거기에 기댈 것 같기도 하고 잡생각이 들 것 같기도 해서 그냥 좋은 건 아니라고, 따로 보여줘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갔다.
“원작의 유해국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정말 그 이미지에 기대고 싶은 유혹이 있었겠다.
박해일 : 그렇다고 만화를 보며 표정을 만들고 그러면 오히려 정서가 깎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던 난 유해국인 건가? 그런데 그건 아니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더 놓아야 하는 게 많았다.
강우석 감독은 원작의 윤태호 작가를 넘는 심정으로 영화를 찍었다고 했는데 혹 본인도 원작의 유해국과 대결하는 심정이었나.
박해일 : 원작의 유해국과? 아니 좀 다른 것 같다. 유해국 역을 맡게 된 순간부터 이미 내면부터 시작해 전체적으로 원작과 조금씩 다르게 갈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쨌든 미세한 다름이 있었다. 그리고 어쨌든 원작은 윤태호 작가의 작품이고 영화는 강우석 감독의 작품이지 않나. 영화 에서의 유해국은 강우석 감독의 시선으로 만들어간 것이 아닐까. 영화 때문에 미리 원작을 보라고 권유하고 싶진 않지만 만약 같이 보게 된다면 그 차이를 통한 재미도 느낄 수 있을 거다.
가령 해국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 박민욱(유준상) 검사에게 전화하는 장면에서의 톤이 원작과는 많이 달랐다. 원작에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위로 받고 싶어 하는 느낌이었다면 영화에선 시시비비를 가리는 느낌이었다.
박해일 : 내가 말하고자 한 게 그런 거다. 시작부터 원작과 미세하게 다른 지점에서 출발하고 그것이 조금씩 벌어지며 느낌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스스로는 해국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해석하려 했나.
박해일 : 그건 감독님과 이야기하며 만들어가려 했다. 뭘 더해서 만드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캐릭터의 톤을 잡아가는 과정이었다. 기본적인 베이스는 원작에 입각했지만 그걸 어떤 방식으로 가져가는지에 있어 감독님은 그대로 가길 원하진 않았던 것 같다. 원작에서보단 좀 더 선이 굵고 감정의 세기가 직선적인 인물을 만들려고 했다. 감독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마을 사람들과 붙었을 때 팽팽한 긴장감이나 대결구도가 좀 더 드러났으면 좋겠으니 해국이 좀 더 능동적으로 움직였으면 좋겠다고 설명하시더라.
그런데 기본적으로 해국이 가진 그런 악착같은 면을 설명하기에 영화는 원작보다 불리할 수밖에 없겠더라. 원작에선 그 모든 걸 해국의 과거사로 설명할 수 있었으니까.
박해일 : 원작이 80화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라 그 안에 해국의 과거가 상당히 납득 가게 설명되어 있긴 하다. 우리 영화가 물리적으로 러닝 타임이 짧지 않음에도 연출자 입장에선 내러티브를 축소하기 쉽지 않았을 거다. 결국 인물의 과거사나 설명적인 부분을 영화의 템포에 해가 되면 과감히 정리하지 않았을까. 내러티브가 말이 되는 수준에서. 사실 분명히 원작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해국의 과거사가 궁금할 수 있다. 그렇게 따지면 박민욱 검사의 과거사 역시 상당 부분 생략되었고. 그럼 이것을 만화라는 매체와 영화라는 매체의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1, 2부로 나눠서라도 설명했어야 했는지 고민하게 되는데 그건 감독의 몫인 것 같다. 내가 내 과거 더 주세요, 이럴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고.
하지만 배우로선 그런 인물의 프로필을 관객에게 설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박해일 : 그렇다. 기본적으로 마을 사람들은 등장과 퇴장이 명확하지 않나. 과거사 역시 회상 장면을 통해 다 보여주고, 그래서 이러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명확하게 보여주는데, 그런 면에선 나도 솔직히 아쉬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국에 대해 좀 더 디테일한 설명을 했더라면 더 몰입감이 컸을까? 어느 게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건 개봉하고 나서 관객들과 소통을 해봐야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라 본다.
“선배들과의 대결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감독이 제시하는 방향을 따른 것 같은데 인물을 해석하는데 있어 배우가 고민하는 것과 감독이 고민하는 것이 다를 수 있지 않나.
박해일 :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기보다는 촬영 초반부터 미리미리 감독님께 확인하며 인물을 잡아갔던 것 같다. 해국의 캐릭터가 가진 방향성에 대해 어느 쪽이 더 나을지에 대해 미리 이야기하고, 감독님은 이러이러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그런 부분에서 상당히 명확하게 만들어주셨다. 달리 말하면 그거지. 나 따라와.
원래 디렉션을 잘 따르는 타입인가?
박해일 : 납득이 가야 따르지. 그리고 이번엔 감독님이 납득이 가게끔 해주셨던 것 같고. 기본적으로 남성적이고 직선적인 캐릭터에 강한 감독님이라 그렇게 만들어주려 했다는 게 감지가 됐다. 디테일한 그림이라기보다는 배우가 역할을 소화하는데 있어서의 기운이랄까. 그런 부분을 명확하게 얘기해줬고 납득했다. 아무래도 해국이는 극 안에서 관객의 시선을 대변하기도 하지 않나. 그래서 내가 마을 사람들에게 밀리면 관객 역시 밀릴 수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 있어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데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
말 그대로 마을 사람들과의 팽팽함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런 이방인으로서의 역할을 소화하는 것이 카메라 바깥에서의 기운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박해일 : 엄-청 났지. 무주에서 숙박을 하며 장기간동안 찍었는데, 촬영하러 아침에 나오면 분장실에 정재영 선배가 먼저 와서 삭발로 하루를 시작했다. 뭔가 의식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분장을 시작하며 이장으로 변하고, 마지막으로 눈빛까지 변하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경계심을 느끼게 됐다. 다른 선배들이 촬영에 들어가기 전 그늘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콘티를 보거나, 잠깐 사라졌다가 아예 사람이 달라져서 돌아오는 모습에서도 굉장한 기운이 느껴졌다. 게다가 막상 촬영 들어가면 그 두세 배에 달하는 기운을 뿜어내는 사람들이니까.
그런 걸 보면 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편인가.
박해일 : 솔직히 그렇지. 그게 이 영화의 특징인 것 같기도 하고. 지지 않겠다는 게 단순히 연기대결이니 하는 그런 게 아니라 흔들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다.
그건 그만큼 흔들릴 뻔한 감정을 느꼈다는 것일 텐데.
박해일 : 과거에 알고 있던 선배들이었지만 작품으로는 처음 뵙게 되었고, 그것도 한 작품 안에서 다 보게 된 거다. 이들과 한 번씩은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이 긴장감으로 다가왔다. 실제로 김상호 선배가 연기한 전석만의 집에 몰래 갔다가 송곳에 찔리고 절벽까지 도망가는 장면을 일주일동안 찍었다. 말이 일주일이지 뒤에서 김상호 선배가 도끼 들고 축지법으로 쫓아오는데… 김상호 선배가 그냥 보면 순해 보이지만 독기를 품으면 굉장히 무서운 스타일이다. 그 장면을 찍으며 해국이가 정말 지랄 맞은 공간에 들어왔다는 걸 깨닫게 됐고, 여기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고군분투가 시작됐다.
글. 위근우 eight@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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