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비밀의 화원’의 현장을 담던 포토그래퍼의 촌평에 따르면 여진 역으로 출연 중인 백진희는 “촌에 살던 소년이 처음 서울에 올라갔다가 보고 상사병에 빠지게 되는 소녀” 같은 얼굴이라고 한다. 정말 그랬다. 흰 얼굴에 긴 생머리를 하고 단정한 교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태어나서 햇빛 한 번 제대로 쬔 적 없을 것 같은 소공녀 같다. 하지만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불편한 포커스를 들이대는 저예산 영화 와 에서 어리지만 강단 있는 청춘을 연기하고, 현장의 모기떼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는 이 소녀를 그저 이미지만으로 판단하는 건 성급한 일이다. 그녀가 이번에 연기하는 여진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그저 여리게만 보이지만 가슴에는 동성 친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설레고, 그 마음을 눈치 챈 문학 강사의 협박에 괴로워하는 이 소녀는 분명 스테레오타입의 청순가련 여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주제의식이 뚜렷한 작품을 좋아하는 스물하나의 배우 백진희가 과연 여진이란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할지, 그리고 그것이 백진희 본인에겐 어떤 의미일지 궁금한 건 그래서다. 다음은 ‘비밀의 화원’ 현장에서 만난 백진희와 나눈 여진, 그리고 그녀 본인에 대한 이야기다.사실 처음 대본을 봤을 땐, 강단 있는 성격의 기림(민지) 역할일 거라 생각했다.
백진희 : 기림이 역도 되게 매력적인데, 뭔가 알듯 말듯 한 여진의 매력이 내게 다가왔던 거 같다. 또 여태 당찬 캐릭터를 했던 만큼 여진이를 더 연기하고 싶었던 거 같기도 하고. 좀 다른 느낌의 캐릭터를 연기해보면 내 안의 어떤 다른 모습이 나올지 궁금하다. 다행히 민지와 호흡이 잘 맞아서 여진의 모습이 잘 그려지는 거 같아 다행이다.
“소수자에 대해 편견을 갖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⑧│백진희 “전혀 다른 삶을 경험하고 있다”" />
대본에서부터의 이미지가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인데 여배우로서 이런 역할을 맡은 기분은 어떤가. (웃음)
백진희 : 좋지. (웃음) 바람 불면 날아가는 역할, 좋지. 에서나 최근 찍은 에선 불어오는 바람에 대항할 것 같은 역할을 연기했으니까. 이번 작품을 통해 색다른 감정을 느끼는 거 같다.
하지만 연기하긴 정말 어려웠을 것 같다. 우선 동성을 사랑하는 역할이고, 기림에게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하는 동시에 또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서운해 하는 이율배반적 캐릭터다.
백진희 : 대본 보고서 깜짝 놀랐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혼자 영화 을 보는 장면에서 그런 암시가 나오는 걸 보면서도 설마, 설마, 아니겠지 했는데, 맞는 거다. 그런데 딱 감정을 단정 짓지 않고, 미성숙한 고등학생이라 아직 상대방에 대한 마음에 헷갈려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감정을 확실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거라 생각하며 대본을 봤더니 여진의 마음이 이해가 가더라.
이걸 그저 동성애라 단정하기 어려운 게, 그냥 기림이라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건지, 동성애를 가지고 있는데 마침 기림을 사랑하게 된 건지 의문이다.
백진희 : 나도 대본을 읽으면서 그게 궁금했다. 여진이는 과거에 남자를 사귀거나 좋아해본 적이 있을까. 친구가 기림이 밖에 없는 것 같은데 다른 친구를 봤을 때도 그런 감정을 느꼈을까. 단적으로 말해 동성애자는 아닌 거 같다. 우선 기림이는 여진에게 없는 시원시원한 매력을 가지고 있고, 학교에서 존재감이 없는 여진이 기림을 통해 존재감을 찾고 세상과 소통한다. 그런 걸 느껴가며 여진이 기림이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는 혼란의 시기인 거 같다. 지금 촬영하는 과거 고등학교 시절에선. 그러다 현재에 이르러 그 부분에 대해 잊고 살다가 기림이를 보고 스스로의 감정에 확신이 들어 기림에게 “나, 기다릴까?”라는 대사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 감정의 본질이 무엇이든 결국 여진은 성적 소수자이기에 피해를 입는다. 정말 천인공노할 (웃음) 남자 주인공에게.
백진희 : 너무 싫지. (웃음) 장난 아니다. 드라마 보면 더 장난 아니다. 아주 그냥 대본의 그 느낌이 팍팍 산다.
그런 소수자의 힘겨움을 표현한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도 있나.
백진희 : 최근 SBS 에서도 동성애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요즘 추세가 그런 걸 좀 개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거 같다. 이런 것들에 대해 편견을 갖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이번 작품에서도 그런 걸 잘 표현하면 사회적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재미라기보다는 한 편의 단편 영화를 보는 그런 느낌” ⑧│백진희 “전혀 다른 삶을 경험하고 있다”" /> 사실 는 김수현 작가의 파워가 있기에 그런 소재를 주말 저녁에 드러낼 수 있는 거고, 그 외의 경우에는 이런 단막극에서나 가능한 일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부활한 단막극에 들어가는 각별함이 있을 것 같은데.
백진희 : 단막극 부활한다는 얘기 듣고 되게 좋아했다. 예전에도 단막극 좋아했었고, 이번 1회 ‘빨간 사탕’ 보고 너무너무 좋았다. 재미라기보다는 한 편의 단편 영화를 보는 그런 느낌이 좋았다. 그래서 꼭 하고 싶었다. 촬영 끝나면서 스케줄도 없어서 시간도 많으니 하고 싶다고 생각하다 이번 대본을 받았다. 그런데 대본이 너무너무 좋은 거다. 이게 좀 어려운 소재 아닌가. 여고생이 그런 사랑을 한다는 게. 그러면서도 왜 저래, 이러면서 경멸할 수 없는 소녀이기 때문에 더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연기하는 것은 어떤가. 단막극 특유의 호흡이란 게 있는데.
백진희 : 연기자에게도 좋은 것 같다. 긴 드라마는 긴 호흡을 가지고 가지만 단막극은 2주 만에 찍고 한 회만 보여주게 되니까 더 집중해서 해야 하지 않을까.
빠른 호흡에 적응하기 힘들진 않나.
백진희 : 영화를 주로 했기 때문에 좀 빠르게 느껴지긴 하는데 드라마치고는 빠른 현장이 아니라고 하더라. 나는 드라마를 많이 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엄청 빠르거나 힘들진 않다. 다만 전주에서 3일째인데 밤에 모기가 너무 많다. 나는 그나마 모기가 잘 안 무는 체질인데 민지랑 스태프들은 정말 고생이다. 모기가 바지를 뚫는다.
환경도 다르지만 결과물의 전파 속도도 다르다. 시청률 단 몇 퍼센트만 하더라도 독립영화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대중과 만날 수 있는데, 그런 단막극 안에서 투톱으로 출연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백진희 : 두 가지 면이 있다. 우선은 좋다, 너무 좋다. 내 나이대의 여자가 투톱으로 드라마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지 않나. 그런데 한 편으론 조금 무섭기도 하다. 브라운관에 비쳐져본 적이 없으니까. 같은 작품은 독립영화에 관심이 있거나 입소문 듣고 본 건데, 이건 정말 내 친구들부터 시작해 다들 TV를 틀면 나오는 거 아닌가.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사실 별로다 싶어서 채널 돌리면 끝인 거니까 무섭기도 하다.
게다가 장르적으로도 본인이 하는 작품의 취향이 좀 뚜렷한 거 같다.
백진희 : 나는 잘 모르겠는데 주제의식이 뚜렷한 영화를 좋아하는 거 같다. 코미디 영화 같은 걸 극장에서 본 적이 없다. 그런 게 확고히 서 있었고, 그게 작품을 고르는데 조금씩 반영되는 것 같다.
하지만 연기를 앞으로도 꾸준히 하고 대중과 소통하려면 매체적으로도 장르적으로도 넓어질 필요가 있다.
백진희 : 연기자로서의 폭은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지금은 어리니까 많은 역할을 하고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생각을 하면 사고가 트이고 더 많이 받아들이면서 전에는 확고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풀리지 않을까. 그러면 기회가 될 때 코미디도 하고 가리지 않고 하게 될 것 같다.
영역을 넓히는 건데, 그 과정에서 초심을 지키는 것도 중요할 텐데.
백진희 : 나는 독립영화를 지키고 싶다. 데뷔부터 그랬고. 앞으로 내가 잘 되어서 많은 신인들이 실력 없고 부족해서 저예산 영화를 하는 게 아니라고 인식하게 만들고 싶다. 독립영화도 스타의 등용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해서, 그들이 꺼려하지 않고 작품을 찍을 수 있는 환경에 자그마한 도움이 되면 좋겠다. 그래서 이 바닥이 더 잘됐으면 좋겠고. 사실 이쪽 환경이 좀 열악하다. 좋은 작품들은 많은데 대중과 만나는 창이 단절되어 있어 속상하다.
연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일종의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백진희 : 맞다. 연기자를 상품이 아닌 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들 중 한 일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생활을 위해 연기하기보단 세상으로부터 충분히 받고 그걸 보는 이에게 충분히 주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그럼 연기를 한다는 건 개인으로서의 백진희에게도 발전이 되나.
백진희 : 그런 거 같다. 사실 연기 활동을 하느라 대학에 못 나가고 있다. 고등학교라는 우물까지가 내 사이즈인 것 같은데 한 작품 한 작품을 하면서 많이 배우게 된다. 주위 선배님들이 해주는 좋은 말, 속 깊은 말도 많고, 캐릭터의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표현하면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느끼며 성장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작품을 안 하면 멈춰있는 것 같아 쉬는 간격이 생기면 불안하다.
그렇다면 이번 ‘비밀의 화원’도 백진희에게 좋은 성장의 기회가 될까.
백진희 : 굉장히 많은 성장의 기회가 될 거 같다. 이 작품이 아니었다면 나란 사람이 언제 이런 감정을 갖고 언제 이런 생각을 해보겠나. 전혀 다른 삶을 경험하는 것 같다. 사실 그래서 여진이를 연기하기가 어렵다. 조금만 세게 감정을 넣으면 감독님께서 너무 무겁다고 그러셔서 그 중간을 잡기 좀 버겁다. 하지만 그 버거움을 견디고 나면 연기자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
글. 위근우 eight@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장경진 three@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