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휘순은 진지한 개그맨이다. 상황에 따라 재빠르게 애드리브를 제시하며 치고 들어오는 다른 개그맨과 달리 우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주변을 웃기는 스타일이다. KBS <개그콘서트>에서 ‘달리는 마을버스 2-1에서 뛰어내린 육봉달 선생’이나 ‘고시원 생활 8년 만에 창문 있는 방을 얻은 노량진 박’ 같은 표현들은 모두 자신의 생활 속에서 캐치해낸 아이디어다. “사당역 3번 출구, 신림동 순대타운 같은 디테일한 개그가 주는 매력이 있거든요.” 이루마의 ‘Kiss The Rain’ 같은 잔잔한 노래가 깔리며 그가 읊조리는 ‘루저’ 개그가 애잔하지 않고, 즐겁게 들리는 건 진지함을 유쾌하게 풀어내는 박휘순의 능력 덕분이다.

이런 스토리텔링 개그가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다. 25살, 대학을 졸업하고 개그맨이 되기까지 꼬박 3~4년의 시간이 걸렸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취직하고 월급을 받는 동안 자신은 대학로에서 공연을 하며 근근이 아르바이트로 버텼다. 힘들었던 기억들은 개그 소재로 차곡차곡 쌓였다. “한 달에 30만원을 가지고 살았던 적도 있어요. 그걸로 차비도 하고 식사도 모두 해결했죠.” 혜화동 대학로에서 공연 포스터를 붙이던 기억, 가진 게 없어도 소주 한 잔 하고플 때 부담 없이 들를 수 있었던 신림동 근처의 싼 술집들, 서울에 나왔다 수원 집을 가기 위해 환승해야 했던 사당역 버스정류장은 그의 개그에 알찬 자산이 되었다.

박휘순은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시나 에세이도 틈틈이 쓴다. 한 때는 영화 시나리오 작업도 했다. 내러티브 개그에 욕심이 많은 건 이런 바탕이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웃기는 걸로 반 친구들에게 주목을 받았고, 고등학교 시절에도 축제 사회를 보거나 연극을 할 정도로 끼는 다분했지만, 의외로 수업시간에는 조용했다. “제가 명랑하지는 않아요. 말이 없고, 지켜보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죠.” 사석에서 “진지하시네요” 라는 말을 자주 듣는 것도 일상과 무대를 구분 짓는 그의 성향 때문이다. 음악을 이야기하는 순간, 10대 소년처럼 눈망울을 반짝이는 박휘순이 ‘나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음악들’을 추천했다.




1. 윤종신의 <우>
“고등학교 때, 용돈을 모아 짝사랑하던 친구에게 처음으로 선물한 게 윤종신 2집 LP판이었어요. LP판을 쉽게 버리지는 않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선물을 줬는데… 그 친구 집에 전축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윤종신의 5집 앨범 <우>는 박휘순의 10대를 가슴 뛰게 한 앨범이다. 보컬리스트 윤종신의 매력적인 보이스와 콘트라베이스 재즈선율과 어우러지는 ‘아침’이나 복고적인 사운드를 복원한 이 앨범의 타이틀 곡 ‘환생’은 윤종신 특유의 느낌이 잘 살아있다. 특히 ‘아침’, ‘일년’, ‘오늘’, ‘바보의 결혼’을 관통하는 스토리는 윤종신이 발라드로 추앙받을 수 있는 이유를 증명해준다.



2. < La Boum 1 & 2 >
“초등학교 6학년, 5월 5일 어린이날이었어요. 당시 TV에서는 <우뢰매> 같은 어린이 영화 밖에 틀어주질 않았는데, 영화 <라붐>을 방영해주더라고요. 주인공인 소피 마르소를 보고 처음으로 두근거림이라는 걸 느꼈어요.” 세계 남성 청소년들이 ‘소피앓이’를 하게 만들었던 영화 <라붐>. 박휘순은 영화 <라붐 2>에서 프랑스 출신의 남성가수 쿡 다 북스가 부른 ‘Your Eyes’를 명곡으로 꼽았다. 감성적 멜로디로 돋보이는 ‘Your Eyes’는 80년대 특유의 신스음과 간결한 밴드 사운드가 돋보이는 곡이다. 청아한 보컬 음색은 청초한 소녀 시절의 소피 마르소를 소환하게 만드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



3. Radiohead의 < Pablo Honey >
“주변 지인들과 함께 홍대 앞에 잘 가는 술집이 있어요. 술에 취하면 습관처럼 신청하는 노래가 바로 라디오헤드 ‘Creep’이예요. 이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뛰거든요.” 박휘순처럼 라디오헤드를 향한 현재의 칭찬과는 달리 92년 데뷔한 라디오헤드의 첫 번째 싱글 < Creep >은 혹평일생이었다. 영국음악잡지 NME는 “락밴드라기엔 겁쟁이 같다”고 비꼬았고, 라디오에서는 “너무 우울하다”며 ‘Creep’을 거부했다. 하지만 라디오헤드 특유의 감성은 영국을 제외한 이스라엘, 미국 등지의 다른 나라를 뒤흔들었고, 결국 영화 <씨클로> 등에 삽입되면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4. Bebe Winans의 < Dream >
“비비 와이넌스의 곡은 듣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듬뿍 가져다주는 것 같아요. 감수성이 풍부한 노래를 좋아하는데, 힘들고 지칠 때 이 노래를 듣곤 해요.” 블랙 가스펠계의 대표적인 남성 가수인 비비 와이넌스가 부른 ‘Love Thang’은 스티비 원더의 ‘Isn`t She Lovely’처럼 자신의 딸을 향해 바치는 노래다. ‘She`s miracle’이라는 노랫말처럼 딸의 탄생이 스스로를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가사로 옮겼다. 강한 소울풍 곡에서부터 섬세한 발라드까지 소화하는 비비 와이넌스의 매력이 물씬 담겨 있어 한국인들의 감수성에도 잘 들어맞는 곡이다.



5. 라디(Ra. D)의 < Realcollabo >
“요즘 제가 즐겨듣는 음악이에요. 제 미니홈피 배경음악이기도 해요. 이런 노래로 프러포즈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사가 달콤해요. 제가 피아노를 못 치는데,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이 곡을 배워서 쳐주고 싶어요.” 정규 2집 < Realcollabo >에서 R&B 힙합의 느낌이 강했던 ‘I`m In Love’는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이 돋보이는 R&B로 재탄생됐다. 특히 라디의 촉촉한 목소리가 매력적이다. 제7회 한국대중음악상 알앤비&소울 부문 최우수 음반상을 수상한 실력파 싱어송라이터 라디 ‘I`m In Love’는 달콤한 청혼곡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버라이어티는 답이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아요. 자연스럽게 틀 안에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죠.”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뜨거운 형제들’에서 박휘순은 탁재훈, 박명수 등 여러 선배 MC들에게 휘둘리며 놀림을 당한다. ‘아바타 소개팅’을 위해 박휘순이 준비한 휴지마술, 케첩 개그, 박휘순 티셔츠&쿠션 등은 모두를 자지러지게 만들지만 정작 그는 “개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개팅녀를 위해 준비했다”며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휴지를 입에서 뽑는 마술을 하다 피가 나는 상황이 닥쳐도 “잇몸이 약해가지고요”라며 상황을 뒤집는 기지를 발휘하고, “믿을 건 얼굴뿐”이라며 스스로를 웃음의 소재로 만든다. 진정성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개그맨 박휘순. 그가 만들 개그소재는 아직도 태산만큼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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