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2010년 상반기는 21세기 한국 엔터테인먼트 사상 최대의 암흑기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아, 새로운 멤버로 출범한 SBS ‘패밀리가 떴다’ 시즌 2나 KBS가 야심차게 준비한 토크쇼 의 지지부진함 때문은 아니다. 유재석과 강호동이 없는 예능 프로그램의 악전고투는 최근 2년여의 어떤 경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010년 상반기가 흥미로운 건, 그토록 튼튼해 보이던 유재석과 강호동의 세계 역시 어떤 균열의 조짐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균열은 여의도가 아닌, 서해와 청와대에서 시작됐다.

가상세계의 웃음, 현실로 소환되다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46명의 젊은이를 불귀의 객으로 만든 천안함 침몰 사태에 따른 추도 분위기 속에서 시청자가 가끔 TV를 보며 웃는 것이 그토록 불경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KBS와 SBS는 ‘1박 2일’이나 같은 자사의 대표 예능 프로그램을 알아서 결방했다. MBC는 조금 상황이 달랐다. 그들은 “김재철 MBC 사장이 청와대에서 조인트를 까였더라”고 언론에 말한 김우룡 방송문화진흥회 전 이사장을 고소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라며 파업에 들어갔다. 하하의 복귀와 함께 스스로를 ‘예능의 신’으로 선언한 도, 김연아라는 역대 최강의 게스트를 섭외한 ‘무릎 팍 도사’도, 아이돌 커플의 달달한 가상 연애가 이어지던 도 이 상황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결방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그토록 견고해 보이던 TV라는 가상세계의 웃음이 아슬아슬한 2010년 한국 사회의 발판 위에서 만들어지는지 증명했다. 최근 김C의 ‘1박 2일’ 하차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토록 고민 없고 완벽해 보이던 커뮤니티도 구성원이 고뇌를 숨긴 아슬아슬한 바탕 위에서 존재하는 가상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안정적으로 보이던 시스템에 균열이 생길 때, 오히려 그 너머에 대한 새로운 고민과 대안이 등장할 수 있다. 유세윤이 프로젝트 그룹 UV의 이름으로 ‘쿨하지 못해 미안해’를 천안함 때문에 예능이 냉각된 시기에 발표했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는 TV가 잠든 사이, 인터넷을 통한 음원과 뮤직비디오 공개로 화제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유세윤의 성공 사례가 아예 새로운 미디어 활용을 통한 측면 공격이었다면, 예능 고수들의 스튜디오 상황극 MBC ‘뜨거운 형제들’은 팀워크와 캐릭터 만들기라는 예능의 규칙 너머에서 등장한 신세계다. 하여, 올 상반기 예능의 암흑시대는 최근 정체되어 있던 유재석, 강호동 패러다임 너머로 가기 위한 1보 후퇴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밑에 제시하는 2010년 상반기 예능의 주목할 만한 10가지 사건과 경향들은 과연 훗날 어떤 징후로 기억될 수 있을까.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몇 주일 동안 방송 3사 예능 프로그램을 침묵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천안함 침몰 사태를 2010년 상반기 엔터테인먼트 업계 최고의 사건으로 꼽을 수 있으리라. 과연 그것은 망자에 대한 당연한 예의였을까, 아니면 과도한 엄숙주의였을까.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이에 대한 사회적 소통과 합의가 제대로 이뤄진 적은 없단 것이다. 즉 그 의의가 무엇이었던 간에 몇 주 동안 시청자들이 경험한 것은 강요된 침묵이었고, 얻은 것은 이 국가에서 개개인의 소소한 즐거움보다 중요한 가치는 안보라는 깨달음이었다. 과연 TV의 주권은 시청자와 창작자의 것인가. 주권이 있다면 그것을 행사할 정치적 토대는 있는가. 우리가 TV를 보며 마음 놓고 웃기 위해 선결해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들일 것이다.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천안함 사태가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로 즐거움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었다면, MBC 파업은 우리의 즐거움을 포기해서라도 지켜야할 가치가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을 불러왔다. 은 하하의 완전한 복귀를, ‘무릎 팍 도사’는 김연아라는 초대형 게스트를, 는 비와 효리 사이에 벌어진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었지만 방영될 수 없었다. 답답한 상황이었지만 시청자들은 파업을 탓하는 대신, 노조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파업에 이르게 한 김재철 MBC 사장을 비판했다. 즉 예능을 볼 수 없다는 결과만으로 보면 천안함 사태와 MBC 파업은 비슷한 사건이지만, 시청자와 방송 제작자의 연대가 가능하다는 걸 짧게나마 증명했다는 점에 MBC 파업의 의의가 있다.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천안함 사태와 MBC 파업으로 예능을 비롯한 엔터테인먼트 시장 전체가 냉각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빛난 별은 역시 유세윤과 그의 프로젝트 그룹 UV다. 그것은 일종의 틈새시장 공략이었지만 그의 활동을 단순히 인터넷이라는 미디어를 적극 활용한 마케팅 정도로 평가할 수는 없다. 스스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만든 ‘쿨하지 못해 미안해’는 진지한 창작물인 동시에 그 진지함으로 스스로를 희화화시키는 예능 아이템이기도 하다. 즉 광대이자 예술가인 그는 TV 속 예능을 유지하는 가장 근본적 이분법인 가상과 현실의 벽을 허물며, KBS 보다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이 세상에 과연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쇼인지 질문한다. 앞으로 우리는 그에 대한 다양한 답을 내놓으며 예능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김C가 ‘1박 2일’을 떠난다는 말에 이수근도 울고, 이승기도 울고, 시청자도 울었다. 그만큼 ‘1박 2일’ 안에서 김C의 존재감은 대체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김종민과 하하가 각각 군 복무 문제로 ‘1박 2일’과 MBC 에서 약 2년간 하차한 적은 있었다. 그들과 김C 하차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한국 예능 프로그램의 양대 축인 ‘1박 2일’의 완벽해 보이던 팀워크가 사실 온전히 리얼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종종 괴로운 마음으로 녹화를 하고 모니터도 안 한지 오래라는 김C의 고백은 그래서, 현 대한민국 예능의 대세인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세계가 실은 수많은 가상의 순간들로 채워졌다는 걸 시청자에게 들킨 위기의 징후일지도 모르겠다.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초등학생 역할을 하는 연기자들 앞에서 사이먼 D가 “키스는 당연히 했고, 다이어트도 할 뻔 했다”고 했을 때, 방송 내공이 10갑자는 될 예능 고수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심지어 막말 드립의 달인 김구라조차. MBC ‘뜨거운 형제들’ 최고의 수확이 힙합 그룹 슈프림팀의 사이먼 D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이하늘, 길로 대표되는 힙합 뮤지션 출신 예능인 계보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진화한 ‘굴러들어온 돌’이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 정말 새로운 건, 내부의 점진적인 변화보다는 그런 굴러들어온 돌의 등장으로 만들어진다. 아슬아슬한 19금의 영역을 능글맞은 눈웃음과 부산 사투리로 주말 저녁 예능으로 끌어들인 사이먼 D의 등장처럼.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사이먼 D가 예능의 기존 패러다임을 흔드는 최종 병기 힙합 아이돌이라면, 조권은 이미 존재하는 예능의 모든 패러다임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완전체 아이돌이다. 이것은 아이돌이 더는 MC에게 받들어지는 스타가 아닌, 웃음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현재 예능의 경향을 뚜렷이 보여준다는 면에서 의미를 갖는다. 즉, 어떤 토크쇼의 게스트로 나가도 항상 새로운 걸 보여주는 무한한 개인기와 를 통해 시청자들을 아담 커플의 지지자로 만드는 아이돌로서의 매력, ‘패밀리가 떴다’ 시즌 2에서 유일하게 리얼 버라이어티를 보여주는 이해력은 예능 천재 조권의 것이지만 동시에 현재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아이돌에게 끊임없이 강조하는 덕목이기도 하다.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얼마 전 2PM의 닉쿤은 자신과 함께 에 출연하게 된 f(x)의 빅토리아를 아내로 호칭하며 팬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하지만 의연함을 가장한 일부 팬의 표현 그대로 이것은 ‘내 남자의 비즈니스’다. 닉쿤-빅토리아의 투입을 통해 가 완전히 아이돌 차지가 된 것처럼, 이제 아이돌에게 러브 라인 형성은 예능을 위한 필수 항목이 되었다. ‘패밀리가 떴다’ 시즌 2는 여전히 택연-윤아 라인을 밀고 있고, 은 출연하는 남녀 아이돌을 엮기 위해 무던 애를 쓴다. 심지어 에서도 원더걸스와 슈퍼주니어의 소개팅을 주선했다. 이것은 이슈 생산을 통해서 굴러가는 이 시장을 위한 새 동력이지만 동시에 팬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혹 이것은 아이돌에게 팬덤보단 예능 고정이 중요해진 시대의 한 단면은 아닐까.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아마 그의 전성기를 보고 ‘국지니빵’을 먹고 자랐던 세대조차 잊고 있었을 것이다. 김국진이 공중파 3사 사장과 함께 한국 방송을 움직이는 4인으로 꼽혔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하지만 그 때의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극심한 인생의 부침을 겪었던 그가 ‘남자의 자격’에서 “인생은 롤러코스터처럼 끝까지 내려가면 언젠간 다시 올라올 것이며, 그곳에는 떨어지지 않을 안전 바가 있다”고 말할 때, 그 말은 피상적이지 않은 울림을 줄 수 있었다. 하여, 이날 ‘남자의 자격’ 강연 특집은 이경규를 비롯한 이들 노장 예능인들이 쌓아온 인생의 무게 자체가 하나의 캐릭터가 되어 예능에 웃음 이상의 깊이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과연 이 가능성은 앞으로의 예능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될 수 있을까.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과거 ‘무릎 팍 도사’에 출연해 ‘라디오 스타’에 5분 방송의 굴욕을 안겼던 비는, 김연아의 ‘무릎 팍 도사’ 출연과 함께 본인 역시 5분 방송의 굴욕을 당해야 했다. 이것은 게스트를 토크의 주체가 아닌, 전체 스토리 라인의 객체로 활용했다는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제 토크쇼는 MC가 묻고 게스트가 답하는 방식을 벗어나고 있다. 아니, 그 빤한 포맷을 어떻게 벗어나는지가 토크쇼의 성패를 가르는 요소다. 게스트를 특정 주제로 묶어 그에 대한 대화를 끌어내는 , MC들의 상황극을 보고 웃고 떠들다 게스트가 속내를 드러내는 KBS 처럼. 어쩌면 KBS 의 가장 큰 문제점은 깜짝 손님이 아닌, 구태의연한 과거의 토크쇼 방식인 게 아닐까.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2010 상반기 결산│암흑기에도 꽃은 핀다 - 예능 10
하하의 복귀를 축하하며 이 준비한 특집의 제목은 의미심장하게도 ‘예능의 신’이었다. 단순히 KBS 의 제목과 콘셉트를 차용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특집의 주체가 이기에 이 제목은 온전한 무게감을 가질 수 있었다. 진행, 상황극, 몸개그, 비주얼, 공백, 리액션으로 나뉜 예능 과목들과 하하가 떡을 들고 MBC 예능국장에게 찾아가고 나머지 멤버가 그 떡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게 하는 김태호 PD의 유니크한 기획이 더해지며 은 제목 그대로 무한히 확장하는 대한민국 ‘예능의 신’이 되었다. 수많은 신규 프로그램의 모티브가 되지만 청출어람을 용납하지 않는 이 프로그램은 과연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까. 그리고 예능의 새로운 미래는 그 과정에 있을까, 아니면 그 바깥에 있을까.

글. 위근우 eight@
편집. 이지혜 seven@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