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촬영 전날 밤엔 잠 못 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제 자신에게 물어봐요. 너 20년이나 했는데, 영화를 10편도 넘게 찍었는데 내일 촬영이라고 설레니? 그럴 땐 아직도 연기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은 게 스스로 기특하기도 해요. (웃음)” 20년. 갓 태어난 아이가 튼실한 청년으로 자라났을 시간이고, 직업인에게는 완성형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세월이다. 그 사이 김승우는 의 쌍칼이라는 첫 등장을 까맣게 잊을 만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에겐 재벌 2세로 현실에 내려온 ‘백마 탄 왕자님’(MBC )이거나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주는 든든한 남자(MBC )로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이미지”였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사랑 얘기는 그만 하고 싶던” 차에 우연히 만난 는 김승우에게 반전의 발판이 되었다. 부모님에게 얹혀사는 어리바리 허동구는 김승우에게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동네 찌질이”의 전형이었고, 사람들이 그를 그냥 “동네 아저씨나 형으로 볼” 정도로 그의 이미지를 한 순간에 바꿔놓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절 너무 만만하게만 보니까 배우로서 기능을 높여야겠단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러던 차에 을 만났죠.” 홍상수 감독의 새로운 페르소나로 김승우는 역시나 찌질하기 그지없는 방구석 지식인이 되어 “어, 김승우 연기 좀 하네”란 평가를 이끌어냈다. 매번 도약이나 전환의 욕구가 들 때마다 자신을 찾아온 작품들을 그는 ‘천운’이라 부른다.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공백을 깨주었을 뿐 아니라 그에게 새로운 존재감을 입혀준 KBS 또한 그렇게 찾아왔다. “내 나이만이 가진 남자의 향기, 매력을 보여주고 싶었던” 그의 바람처럼 북한 최고의 첩보요원 박철영은 애초에 설정된 악역의 한계를 넘어 김승우에게 ‘미친 존재감’을 선사했다.
그러나 나 의 강인한 남자의 모습은 잠시 잊고, 멜로의 주인공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던 그의 진가를 다시 떠올려보자.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멜로영화의 남자 주인공으로 잘 어울리는 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김승우가 아름다운 연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1. (The Last Concert)
1976년 | 루이지 코지
“사랑 영화의 바이블이죠. 전 영화 볼 때 남들은 안 울어도 우는 경우가 많아요. 오죽하면 같이 영화 보는 사람들이 창피하다고 할 정도로. (웃음) 특히나 는 죽어가는 연인이 원하는 걸 이루어 주는 남자의 이야기라 역시 많이 울었죠. 저도 사랑할 때 그렇게 로맨틱하냐구요? 마음만은 멜론데 태생이 한국 남자라 하는 짓은 안 그래요. 어쩔 수 없나 봐요. (웃음)”
백혈병에 걸린 소녀, 멋진 피아니스트, 그녀를 위한 아름다운 연주까지 영화는 슬픈 멜로의 전형적인 공식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70년대를 떠올릴 때 빠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았다. 특이하게도 일본에서 제작을 하고 이탈리아 감독이 프랑스에서 촬영했는데,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만 개봉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2. (Waterloo Bridge)
1940년 | 머빈 르로이
“보다 더 어렸을 때 본 영환데, 너무 오래된 영화라 제 나이가 보이는 건 아닐까 걱정되네요. (웃음) 처음 봤을 때는 슬프고 좋은 영화인 거 같은데 막 와 닿지는 안았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다시 봤는데, 속된 말로 전쟁통에 저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큰 사랑으로 와 닿았어요. 아마 찍던 중이라서 더 그랬나봐요.”
사랑은 늘 작은 우연에서 시작해 작은 오해로 위기를 맞는다. 매력적인 발레리나(비비안 리)와 젊은 장교(로버트 테일러)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미래를 약속하지만 결국 전쟁의 포화는 그들의 사랑을 집어 삼킨다. 만남과 헤어짐, 비극적인 결말까지 효과적으로 배치된 멜로 영화의 교본. 3. (In The Mood For Love)
2000년 | 왕가위
“어디선가 와인을 마시다가 우연히 의 OST를 들었어요. 근데 그 음악에 완전히 간 거예요. 너무 좋아서 아예 그 CD를 술집에서 사가지고 왔죠. 그 후에 영화도 찾아서 보고. 음악이 준 감동만큼이나 영화도 훌륭했구요. 웃음이 주는 감동도 있지만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작품의 감동은 더 오래가는 거 같아요. 멜로가 그래서 더 여운이 남는 거 같아요.”
사랑은 두 사람이 오랫동안 함께 하며 만들어갈 수도 있지만, 인생의 어느 한 순간 짧은 만남으로 인해 생겨나기도 한다. 차우(양조위)와 리춘(장만옥)의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그날 밤 빗속에, 함께 밥을 먹은 레스토랑에, 저녁을 사러가던 시장 골목에 아직도 남아있다. 4.
1987년 | 배창호
“이 당시 한국영화는 안성기가 나오는 영화와 안 나오는 영화로 구분됐어요. 저도 안성기 선배에 대한 신뢰감으로 을 보러 갔구요.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종로 3가 단성사에서 하는데 종로 6가를 지나 동대문까지 줄을 설 정도였어요. 암표를 사서 겨우 봤는데 눈시울은 뜨겁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는 영화였죠. 특히나 영민(안성기)과 딸이 이야기를 주고받던 엔딩이 참 따뜻했어요.”
소심한 영민(안성기)의 안경에 비친 혜린(황신혜)의 모습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그녀를 위해 꽃다발을 사고, 빗속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모든 일들이 영민에게는 행복 그 자체였다. 한 여자를 향한 영민의 사랑은 지금은 멸종된 것만 같은 순애보로 가득하다. 최근 동명의 창작뮤지컬로 그 시절 관객들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5. (Noce Blanche)
1989년 | 장-클로드 브리소
“요즘은 조니 뎁의 부인으로 더 유명한 바네사 파라디가 십대 때 찍었던 영화예요. 선생님과 학생이 사랑하게 되는 사회적인 통념이나 시선과 상관없는 사랑 이야기예요. 아주 강렬하고 가슴이 먹먹해져요. 멜로의 진수를 볼 수 있을 거예요. DVD를 못 구해서 5-6년 전에 청계천을 마구 뒤져서 비디오를 구했을 정도로 좋아하는 멜로 영화예요.”
교사인 프랑소와(브루노 크레머)는 그저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학생 마틸드(바네사 파라디)를 돕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곁에 아무도 없는 마틸드의 재능을 발견하고, 독려하고, 함께 하면서 둘은 사랑을 느끼고 만다. 당신이 늙건, 뚱뚱하건 상관없다는 소녀 앞에서 프랑소와는 선생이라는 지위도 아내가 있다는 사실도 모두 놓고 싶어진다. “힘 있는 남자의 각이 느껴지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선의 연기보단 각의 연기. 근데 말만 멋있지 풀어서 얘기하면 별거 아니에요. (웃음) 이 라운드 테이블이냐 각진 테이블이냐의 차이지 용도는 연기로 같은 거죠. 물론 또 어느 순간 각의 연기가 지겨워질 때가 있겠죠. 하지만 연기자로서 기능적인 부분에 대해선 계속 인정받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새로운 도전도 많이 해야 하구요.”
“대학교 1,2,3,4학년들이 배낭여행 간 기분”으로 찍은 는 연기 뿐 아니라 현장에서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케 했다. “이제는 내 연기 내 것만 챙기는 게 아니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내 숙제 다 해놓고 동생들은 잘하고 있나, 이불은 잘 덮고 자나 둘러볼 수 있는.” 71명 학도병들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강석대처럼 넓어진 품은 그가 흠모하는 선배들인 안성기, 박중훈 같은 “삶과 연기 모두 균형 잡힌 배우”가 되는 데 가장 큰 조력이 될 것이다.
글. 이지혜 seven@
사진. 이진혁 eleven@
그에겐 재벌 2세로 현실에 내려온 ‘백마 탄 왕자님’(MBC )이거나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주는 든든한 남자(MBC )로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이미지”였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사랑 얘기는 그만 하고 싶던” 차에 우연히 만난 는 김승우에게 반전의 발판이 되었다. 부모님에게 얹혀사는 어리바리 허동구는 김승우에게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동네 찌질이”의 전형이었고, 사람들이 그를 그냥 “동네 아저씨나 형으로 볼” 정도로 그의 이미지를 한 순간에 바꿔놓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절 너무 만만하게만 보니까 배우로서 기능을 높여야겠단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러던 차에 을 만났죠.” 홍상수 감독의 새로운 페르소나로 김승우는 역시나 찌질하기 그지없는 방구석 지식인이 되어 “어, 김승우 연기 좀 하네”란 평가를 이끌어냈다. 매번 도약이나 전환의 욕구가 들 때마다 자신을 찾아온 작품들을 그는 ‘천운’이라 부른다.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공백을 깨주었을 뿐 아니라 그에게 새로운 존재감을 입혀준 KBS 또한 그렇게 찾아왔다. “내 나이만이 가진 남자의 향기, 매력을 보여주고 싶었던” 그의 바람처럼 북한 최고의 첩보요원 박철영은 애초에 설정된 악역의 한계를 넘어 김승우에게 ‘미친 존재감’을 선사했다.
그러나 나 의 강인한 남자의 모습은 잠시 잊고, 멜로의 주인공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던 그의 진가를 다시 떠올려보자.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멜로영화의 남자 주인공으로 잘 어울리는 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김승우가 아름다운 연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1. (The Last Concert)
1976년 | 루이지 코지
“사랑 영화의 바이블이죠. 전 영화 볼 때 남들은 안 울어도 우는 경우가 많아요. 오죽하면 같이 영화 보는 사람들이 창피하다고 할 정도로. (웃음) 특히나 는 죽어가는 연인이 원하는 걸 이루어 주는 남자의 이야기라 역시 많이 울었죠. 저도 사랑할 때 그렇게 로맨틱하냐구요? 마음만은 멜론데 태생이 한국 남자라 하는 짓은 안 그래요. 어쩔 수 없나 봐요. (웃음)”
백혈병에 걸린 소녀, 멋진 피아니스트, 그녀를 위한 아름다운 연주까지 영화는 슬픈 멜로의 전형적인 공식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70년대를 떠올릴 때 빠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았다. 특이하게도 일본에서 제작을 하고 이탈리아 감독이 프랑스에서 촬영했는데,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만 개봉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2. (Waterloo Bridge)
1940년 | 머빈 르로이
“보다 더 어렸을 때 본 영환데, 너무 오래된 영화라 제 나이가 보이는 건 아닐까 걱정되네요. (웃음) 처음 봤을 때는 슬프고 좋은 영화인 거 같은데 막 와 닿지는 안았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다시 봤는데, 속된 말로 전쟁통에 저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큰 사랑으로 와 닿았어요. 아마 찍던 중이라서 더 그랬나봐요.”
사랑은 늘 작은 우연에서 시작해 작은 오해로 위기를 맞는다. 매력적인 발레리나(비비안 리)와 젊은 장교(로버트 테일러)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미래를 약속하지만 결국 전쟁의 포화는 그들의 사랑을 집어 삼킨다. 만남과 헤어짐, 비극적인 결말까지 효과적으로 배치된 멜로 영화의 교본. 3. (In The Mood For Love)
2000년 | 왕가위
“어디선가 와인을 마시다가 우연히 의 OST를 들었어요. 근데 그 음악에 완전히 간 거예요. 너무 좋아서 아예 그 CD를 술집에서 사가지고 왔죠. 그 후에 영화도 찾아서 보고. 음악이 준 감동만큼이나 영화도 훌륭했구요. 웃음이 주는 감동도 있지만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작품의 감동은 더 오래가는 거 같아요. 멜로가 그래서 더 여운이 남는 거 같아요.”
사랑은 두 사람이 오랫동안 함께 하며 만들어갈 수도 있지만, 인생의 어느 한 순간 짧은 만남으로 인해 생겨나기도 한다. 차우(양조위)와 리춘(장만옥)의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그날 밤 빗속에, 함께 밥을 먹은 레스토랑에, 저녁을 사러가던 시장 골목에 아직도 남아있다. 4.
1987년 | 배창호
“이 당시 한국영화는 안성기가 나오는 영화와 안 나오는 영화로 구분됐어요. 저도 안성기 선배에 대한 신뢰감으로 을 보러 갔구요.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종로 3가 단성사에서 하는데 종로 6가를 지나 동대문까지 줄을 설 정도였어요. 암표를 사서 겨우 봤는데 눈시울은 뜨겁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는 영화였죠. 특히나 영민(안성기)과 딸이 이야기를 주고받던 엔딩이 참 따뜻했어요.”
소심한 영민(안성기)의 안경에 비친 혜린(황신혜)의 모습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그녀를 위해 꽃다발을 사고, 빗속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모든 일들이 영민에게는 행복 그 자체였다. 한 여자를 향한 영민의 사랑은 지금은 멸종된 것만 같은 순애보로 가득하다. 최근 동명의 창작뮤지컬로 그 시절 관객들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5. (Noce Blanche)
1989년 | 장-클로드 브리소
“요즘은 조니 뎁의 부인으로 더 유명한 바네사 파라디가 십대 때 찍었던 영화예요. 선생님과 학생이 사랑하게 되는 사회적인 통념이나 시선과 상관없는 사랑 이야기예요. 아주 강렬하고 가슴이 먹먹해져요. 멜로의 진수를 볼 수 있을 거예요. DVD를 못 구해서 5-6년 전에 청계천을 마구 뒤져서 비디오를 구했을 정도로 좋아하는 멜로 영화예요.”
교사인 프랑소와(브루노 크레머)는 그저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학생 마틸드(바네사 파라디)를 돕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곁에 아무도 없는 마틸드의 재능을 발견하고, 독려하고, 함께 하면서 둘은 사랑을 느끼고 만다. 당신이 늙건, 뚱뚱하건 상관없다는 소녀 앞에서 프랑소와는 선생이라는 지위도 아내가 있다는 사실도 모두 놓고 싶어진다. “힘 있는 남자의 각이 느껴지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선의 연기보단 각의 연기. 근데 말만 멋있지 풀어서 얘기하면 별거 아니에요. (웃음) 이 라운드 테이블이냐 각진 테이블이냐의 차이지 용도는 연기로 같은 거죠. 물론 또 어느 순간 각의 연기가 지겨워질 때가 있겠죠. 하지만 연기자로서 기능적인 부분에 대해선 계속 인정받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새로운 도전도 많이 해야 하구요.”
“대학교 1,2,3,4학년들이 배낭여행 간 기분”으로 찍은 는 연기 뿐 아니라 현장에서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케 했다. “이제는 내 연기 내 것만 챙기는 게 아니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내 숙제 다 해놓고 동생들은 잘하고 있나, 이불은 잘 덮고 자나 둘러볼 수 있는.” 71명 학도병들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강석대처럼 넓어진 품은 그가 흠모하는 선배들인 안성기, 박중훈 같은 “삶과 연기 모두 균형 잡힌 배우”가 되는 데 가장 큰 조력이 될 것이다.
글. 이지혜 seven@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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