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안은 꽃, 혁신은 잡초’, 탑을 인터뷰하러 가는 길에 자꾸 이 문장이 입에 맴돌았다. 2년 전 탑이 MBC 에서 보여준 무대가 유독 기억에 남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탑은 김현중과 함께 크레이그 데이빗의 ‘Rise &fall’을 불렀고, ‘창안은 꽃, 혁신은 잡초’는 그 때 했던 랩의 일부였다. “주어진 숙제는 시간이라는 과제, 아주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안 돼 자만해, 새빨간 젊음은 그 무엇보다 용감해, 창안은 꽃, 혁신은 잡초.”

Rise &fall, 창안과 혁신, 그리고 꽃과 잡초. 빅뱅이 아닌 자신의 절친한 친구와 무대에 서서 자작 랩을 선보이는 이 래퍼는 그렇게 거대한 아이돌 그룹의 틈 사이로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YG엔터테인먼트(이하 YG)의 연습생이되 소속사보다 언더그라운드 래퍼로 활동하던 시절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고,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 데뷔했지만 빅뱅의 데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에서는 자신감 있는 신인의 얼굴 대신 “춤을 추기 두려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탑의 팬들이 엄정화의 옆에 선 그에게 열광한 건 단지 그가 매끈하게 수트를 차려입고 “이곳의 여성들은 내 제스처를 보며 끈적함을 느껴”라며 여성들을 유혹했기 때문은 아니다. 하이라이트는 곧이어 “진리가 어디 가겠나”라며 “때론 이끌려 가다보면 자신을 잃는 법, 순탄한 삶이 어딨는가”라고 외치는 순간에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있는 스물 넷 최승현
탑│꽃 같은 소년, 잡초같은 남자
탑│꽃 같은 소년, 잡초같은 남자
물론, 모든 게 아이돌 스타를 위한 이미지메이킹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니면 단지 짧은 랩 가사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가 의 오장범에게 몰입할 순간을 얻기 위해 촬영 기간 동안 클래식 음악을 들었던 것도 괜한 허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리가 어딜 가겠나. 꾸며진 이미지가 며칠 동안 이어진 반복적인 인터뷰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관습적인 대답을 하지 않기 위해 고민하는 태도까지 만들지는 못한다. 때론 인터뷰를 잠시 끊고 생각에 잠길 만큼 그는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린 시절 정서적으로 쓸쓸했고, 방황했기 때문에 안정된 형태의 피규어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아이돌, 대중이 자신에게 싫증을 낼 것 같아 스스로를 포장하던 시기도 있었다고 말하는 20대 스타와 대화하는 건 신선함 보다 오히려 신기함에 가까운 경험이다. 마치 잡초더미에 핀 꽃처럼, 그는 지난 2년여 동안 한국과 일본, 랩과 연기를 오가는 일정 속에서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탑이 연기 역시 랩처럼 “자신을 찾는 과정”이라고 한 것은 포장하기 위한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KBS 에서 그가 연기한 채무신은 싸움과 공부 양쪽을 다 잘 하는 멋진 학교 일진이었다. 하지만 탑은 채무신을 호감을 느낀 여자 앞에서 쉽게 말도 붙이지 못하고, 수업 시간에 쉽게 발표도 못하는 수줍은 남자로 표현했다. 말 대신 랩을 적은 가사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채무신의 모습은 불안 속에서 책상에 앉아 랩을 쓰던 탑의 10대 시절에 겹친다. 빅뱅의 탑이 최승현이라는 래퍼의 이상이 담긴 가상의 인물이듯, 그는 KBS 의 킬러 빅을 영화 에 나올법한 가상의 캐릭터 같은 느낌으로 연기했다. 물론 그의 연기가 전문 연기자들보다 뛰어나다거나, 엄청난 재능이 있다고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의 연기를 단지 아이돌의 또 다른 일로만 바라 볼 필요 역시 없을 것이다.

연기든 랩이든 탑이 어딜 가겠나
탑│꽃 같은 소년, 잡초같은 남자
탑│꽃 같은 소년, 잡초같은 남자
그래서 영화에 대한 비판이나 논란과 별개로 에서 학도병 오장범을 연기하는 탑은 그 자신의 경력 중 손에 꼽힐 만큼 흥미로운 순간을 보여준다. 빅뱅이 아닌 솔로로, 그리고 짧은 랩이 아니라 두 시간 내내 자신이 중심에 선 영화 속에서, 그는 아이돌 스타 탑이 아니라 꽃처럼 연약하고 섬세한 자신의 내면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 연약했던 소년이 전쟁을 통해 쉴 새 없이 총을 쏘는 군인으로 변모하는 이야기는 전형적이다. 하지만 에서 오장범이 가장 눈에 띄는 순간은 북한군을 쏘며 전쟁영웅처럼 행동하는 후반이 아니라, 옆에서 폭탄이 터지는 전쟁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멀뚱한 표정을 지을 때다. 자신을 치료하는 간호사에게 말 한마디 못 붙이던 내성적인 10대 소년이 학도병을 이끄는 중대장으로 변하는 과정은 불안한 10대 시절을 견디다 20대에 톱스타가 된 탑의 인생과 겹쳐 보인다. 탑의 팬이라면 는 자신이 어렴풋이 느끼던 탑을 보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일 것이고, 그 외의 사람들은 잡초의 이미지에 어울릴 것 같았던 탑의 꽃 같은 표정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 탑에게 어떤 완성이나 정점의 순간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빅뱅의 래퍼로, 몇 번의 솔로 무대로, 다시 3편의 작품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탑은 얼마 전 수트를 입고 여성들 사이에서 랩을 하는 자신의 솔로앨범 티저 영상을 공개했다. 이제 그는 연기자 최승현에서 래퍼 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연기든 랩이든 탑이 어딜 가겠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조금씩 래퍼도, 연기자도, 최승현도, 탑도 아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꽃처럼 섬세하게 창안한 가사를 잡초 같은 모습으로 전달하면서.

글. 강명석 two@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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