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재의 자신감은 선인과 악인, 멜로와 코미디를 가리지 않고 연기를 하며 만들어졌다. 그것은 보톡스를 맞고, 식스팩을 새기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성형법이다. “스무 살 때보다 서른 살의 제 얼굴이 더 좋았고, 서른보다는 지금의 얼굴이 더 좋아요. 앞으로 50대는 더 좋아질 거라 확신해요. 배우로서나 생활인으로서나. 자만심은 아니고 자존감이랄까요? (웃음)” 다음은 “배우는 꿈도 꾸지 않던” 때부터 “감수성 풍부했던” 대학 시절에 이르기까지 이성재와 함께 한 영화들이다. 그가 만들어간 필모그래피처럼 그의 스무 살의 얼굴, 서른 살의 얼굴을 빚는 데 일조한 원재료들이다.

1984년 | 배창호
“집 앞 동시개봉관에서 우연히 봤어요. 물론 그 때는 배우가 될 마음은 추호도 없었는데 영화 보는 것만은 워낙 좋아했어요. 당시로는 드물게 해외에서 촬영돼서 그런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세련됐던 기억이 나네요. 이후에 에서 조명을 하셨던 스태프 분이랑 함께 작업도 해서 그 때 얘기도 재밌게 들었죠. 미국에 7명 정도의 최소 인원만 가서 찍었다고 했는데 굉장히 웰메이드한 영화가 나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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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 오우삼
“비디오로 서른 번도 넘게 보다가 극장에서 재개봉을 해서 또 봤죠. 제 세대에는 안 본 사람이 없을 거예요. 비디오를 사려고 방이동에 있는 제작사까지 찾아갈 정도로 좋아했어요. (웃음) 가장 친한 친구는 아직까지도 그 때 휴대폰 벨소리가 ‘당연정’이예요. 대학교 올라가서는 검은 바바리를 많이 입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주)윤발이 형 흉내 낸다고 올백도 하고 다녔어요. (웃음)”
은 단순한 영화 한 편이 아니다. 한 시절을 설명하고, 그 때의 향수를 대변하는 상징물이다. 형제의 우애와 친구의 의리, 암흑가의 냉정함까지 남자들을 매료시키는 모든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은 주윤발이라는 신화적인 존재를 이 땅에 내려주었다. 당신도 ‘바바리’ 재킷을 세우고, 성냥개비를 입에 물었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1988년 | 퍼시 애들론
“멜랑콜리한 음악이 참 유명하죠? (웃음) 그리고 가슴 안에 뭔가가 푹 꺼지는 느낌이랄까? 보고나서 여운이 오래 가는 영화예요. 원래 최루성 영화보다는 전혀 그렇지 않은 영화, 잔잔한 느낌에 오히려 크게 자극받는데 가 그랬어요. 특히 주인공이 큰 가방을 들고 나타나는 첫 장면, 그 더위나 끈적임, 황색 톤의 사막의 느낌이 기억에 남아요.”
에서는 모든 것이 몽롱하다. 사막 한 가운데에 툭 던져진 등장인물들처럼 관객들 또한 그들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어떠한 친절한 설명도 없이 극 전체를 휘감는 주제가, ‘Calling You’가 귀를 먹먹하게 한다. 그러나 서로에 대해 잘 몰라서 오해를 할 지언정 편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친구가 되고, 오아시스보다 소중한 연대를 사막에 꽃 피운다.

1985년 | 이두용
“이 영화를 말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웃음) 하지만 은 그 당시에 유행했던 에로 영화들과는 달랐던 것 같아요. 물론 동시상영관에서 보긴 했지만 그냥 보고 즐기는 에로 영화가 아니더라구요. 영화에 대해 잘 모를 때였지만 보면 볼수록 영화에 뭔가가 있었어요. 스토리적으로도 그렇고, 해학도 있고, 무엇보다 굉장히 유머러스하구요. 참 탄탄한 영화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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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 올리버 스톤
“베트남 전쟁 영화중에 가장 좋아하는 영화예요. 고1 때, 지금은 없어졌지만 현재 웬만한 영화관의 스크린에 버금갈 정도로 큰 화면이 있던 금호극장에서 봤어요. 이때부터 윌렘 대포라는 배우를 좋아하기 시작했죠. 주인공인 찰리 쉰보다 더 인상적이었어요. 최근 행보는 팬으로서 좀 아쉬운 구석도 있지만 여전히 카리스마 있는 배우인 것 같아요.”
전쟁에 대한 신념도, 군인에 대한 자부심도 아무 것도 없는 신병 크리스(찰리 쉰). 그저 무료한 생활에 반전을 주기 위해 참전한 베트남전에서 그는 죽어가는 동료들, 인간성이 사라져가는 상사를 보며 갈등한다. 그리고 그 갈등은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제 5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과 작품상 등 수상.

이성재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영화에서 만큼이나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줬다. “너무 영화에 간섭하는 게 아닌가”를 경계할 정도로 넘치는 에너지를 고백하다가도, 연기에 대한 생각을 밝힐 때는 15년 경력에 정비례하는 능력치를 갖춘 배우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리고 사춘기 큰 딸을 걱정하고 미술에 재능을 보이는 작은 딸 자랑에 여념이 없을 때는 영락없이 자상한 아빠였다.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동안 이성재가 보여준 다양한 얼굴은 그가 ‘물 같은 배우’가 되리란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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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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