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매일 한 편씩 영화를 봐요. 특히나 본 영화를 또 보는 걸 좋아해서 누군가와 함께 극장에 가서 보는 것보다 집에서 혼자 보죠. 그것도 밤새도록 보는 걸 좋아해요.” 김주혁은 영화를 좋아한다. 영화를 볼 때면 배우란 걸 잊고 매번 그 순간에 빠져든다. 마음이 가라앉을 땐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액션영화를, 뭐하고 사냐는 의문이 드는 새벽엔 생각 할 수 있는 영화를 보는 나름의 처방전도 있다. 장르와 감독, 배우를 초월해 영화라면 보고 또 보는 잡식가지만 공포영화만은 사양이다. “공포나 호러영화는 배우가 소품이 되는 거 같아서 싫어요. 과장된 비명만 지르고. 전 연기는 언제나 자연스럽고 과장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돌이켜보면 김주혁은 한 번도 과장되거나 도드라진 적이 없었다. SBS <카이스트>의 명석한 선배로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그랬다. 직장인 남자친구를 상상할 때 단박에 떠오르는 얼굴이거나(<싱글즈>) 전국 모든 대학교의 과방에 한 명씩은 있을 것 같은 좋은 오빠(<광식이 동생 광태>)였다. 그리고 <아내가 결혼했다>에서는 두 번 결혼하려는 아내 때문에 괴로운 대한민국 평범남으로 보통 남자들을 대신해 가슴을 쳤다. 김주혁은 직장에, 학교에, 내 주변에서 늘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방자전>의 방자로 돌아온 그의 선택은 의외로 느껴진다. 온 국민이 다 아는 <춘향전>의 방자의 사랑과 욕망을 재편한 <방자전>의 방자는 “사랑을 위해 상상할 수 없는 일”까지 저지를 정도로 영화적이다.

“새로운 방자라기보다는 그냥 방자예요. <춘향전>의 방자를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운 거죠. 저도 처음엔 원래 방자란 인물이 있으니까 새롭게 어떻게 하지 고민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내가 왜 그 방자에 얽매여야 하지? 그냥 이름이 방자로 같을 뿐인데? 라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쉽더라구요.” 어떤 캐릭터를 하든,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 늘 자신만의 페이스를 잃지 않는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김주혁의 목소리가 들뜨고 설렘을 감출 수 없는 순간이 있었으니, 다음의 영화들을 당신에게 추천할 때였다. 좀처럼 싸울 일도 없고, 자기계발서를 즐겨 읽으며 쉬는 날에도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게 전부인 바른 생활 사나이가 유일하게 열광하는 순간을 함께 느껴 보시길.




1. <시네마 천국> (Cinema Paradiso)
1988년 | 쥬세페 토르나토레

“좋아하는 영화를 말할 때 늘 빠지지 않는 부동의 1위죠. 어렸을 때부터 정말 좋아했어요. 왜냐고 물으신다면… 그냥 좋아요. (웃음) 영화를 보는 순간엔 아무리 배우라도 연기를 분석하거나 그러진 않으니까요. 좋다, 싫다, 재밌다, 재미없다처럼 즉각적으로 느끼죠. 최근 들어선 못 봤는데 오랫동안 생각날 때마다 봤어요. 마지막 장면은 언제 봐도 뭉클하죠. 오십 번은 본 거 같아요.”

토토와 알프레도가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누비던 순간. 극장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광장의 깜깜한 밤을 수놓던 영화들. 남녀가 조금만 가까워지는 장면이 나오면 세차게 흔들어대던 신부의 종. 그리고 자신을 위해 마련해놓은 알프레도의 선물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중년의 토토. <시네마 천국>은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거의 모든 신들이 추억 속의 명장면이다.



2. <나인> (Nine)
2009년 | 롭 마샬

“뮤지컬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참 멋지더라구요. 귀도라는 캐릭터가 참 매력적이었어요. 제가 갖고 있지 않은 부분이 있는 남자였거든요. 전 엄한 집안에서 자라서 놀아도 어떤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인데, 귀도는 굉장히 자유분방하고 예술가적이에요. 제가 갖고 있지 않은 그런 면을 저도 모르게 추구하고 싶었나봐요. 그래서 볼 때마다 귀도라는 캐릭터에 더 빠져드는 것 같아요.”

천재로 불리는 영화감독 귀도(다니엘 데이-루이스)는 새로운 작품을 구상 중이지만 그를 둘러싼 주변의 여자들로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져간다. 니콜 키드먼, 페넬로페 크루즈, 케이트 허드슨, 퍼기 등 귀도를 둘러싼 7명의 여성들은 그 어떤 무대 장치보다도 극적이다. <시카고>에 이어 롭 마샬 감독이 물량과 스케일, 화려함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뮤지컬 영화를 탄생시켰다.



3. <그때 그사람들> (The President`s Last Bang)
2004년 | 임상수

“<그때 그사람들>은 좋아하는 만큼 안타까운 영화예요. 너무 좋은 영화인데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도 그렇고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 때문에 묻혔다는 게 참 아쉽죠. 실제 있었던 현대사를 그렇게 풍자적으로 만들기도 쉽지 않은데,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히 훌륭했구요. 지금 봐도 참 대단한 작품이에요.”

매일 이어지는 연회와 만찬 등 대통령의 뒤치다꺼리에 지친 중앙정보부 김 부장(백윤식). 그는 자신의 고충을 몰라주는 대통령과 틈만 나면 무시를 일삼는 경호실장에 신물이 난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결심한 그 날, 안가에서는 총성이 울린다. 10.26 사태라는 심각하고 위험한 현대사의 단면이 임상수 감독에 의해 기괴한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다.



4. <쉰들러 리스트> (Schindler`s List)
1993년 | 스티븐 스필버그

“실제로 다큐멘터리를 좋아하고, 영화도 다큐적인 성향의 것을 좋아해요. 유태인들에 관련된 영화는 이념이나 정치적인 걸 떠나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의 힘이 있어서 더 좋아해요. 특히 <쉰들러 리스트>는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이 많아요. 마지막에 사람들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것도 그렇고, 빨간 옷 입은 아이 지나갈 때도 그렇고. 뭉클하고 눈물도 많이 났죠.”

홀로코스트의 아픔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쉰들러 리스트>는 상처를 다독이는 위로인 동시에 인류의 비극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다. 탐욕스러운 자본가에서 한 명의 유태인이라도 더 구하려고 애쓰는 사람으로 변하는 쉰들러(리암 니슨)는 그 의지의 표상이 되기에 모자라지 않다.



5. <러브 액츄얼리> (Love Actually)
2003년 | 리처드 커티스

“마냥 어렵기만한 영화는 별로예요. 결국 영화는 많은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공감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러브 액츄얼리>는 그런 면에서 참 좋아하는 영화예요. 무엇보다 따뜻하구요. 감독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거 같아요. 포르투갈 처녀와 작가 커플이 가장 좋았어요. 그렇게 뛰어난 미인도 아닌데 둘이 너무 잘 어울리던걸요. 꼬마도 귀여웠고, 노래도 너무 좋아서 대여섯 번은 봤어요.”

<러브 액츄얼리>에는 안타까운 사연도, 가슴 아픈 사랑도 있지만 다양한 커플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누구든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짧은 시간 함께 한 만남이지만 사랑하기에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좋아하는 부하직원의 집을 찾아 헤매는 총리의 모습은 판타지라 할지라도 사랑스럽다. 콜린 퍼스, 휴 그랜트, 앨런 릭맨, 리암 니슨 등 서로 다른 매력을 가진 멋진 영국 남자들을 감상하는 즐거움은 덤이다.




“내년에 40세가 되는데 철저하게 절 실험해보려고 해요. 지금까진 괜한 자존심으로 어리숙하게 산 거 같아요. 솔직히 죽도록 노력도 안 한 것 같고. 40대부터는 도전적인 삶을 살아보고 싶어요. 책도 많이 읽고,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만나고. 겸손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나 자신을 낮추는 경향이 있었어요. 이제는 스스로 자랑도 좀 하고, 어느 정도의 포장도 필요한 거 같아요. 결국 그만큼 남들한테 보이니까. 성공한 사람들의 본보기를 보면서 따라 가려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갈 수 있다던데요? 그것마저 안 하면 아무것도 안 되고.”

불과 2년 전, 김주혁은 “타의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공백”에 조급해하거나 “쉽게 웃기려고만 드는” 영화계의 현실에 불만을 토로하는 등 날이 서 있었다. 더 이상 깎을 수 없을 정도로 뾰족한 연필처럼. 그러나 즐겨 읽는 자기계발서 덕분일까? 불혹을 앞두고 있는 나이 때문일까? 날카롭던 김주혁은 적당히 부드러워졌다. 몇 줄의 글을 쓴 뒤 종이 위를 더 매끄럽게 달릴 수 있는 연필처럼 그의 남은 빈칸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리듬으로 쓰일 것이다. 앞으로 김주혁의 빈 노트는 무엇으로 채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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