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는 윤성호입니다. KBS 의 ‘꿀두피’ 개그맨 윤성호가 아닙니다. 외모만 보고 박성광으로 오해하셔도 안됩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독립영화계의 1등 꾸러기로 발랄한 행보를 이어가는 영화감독 윤성호입니다. 장편 데뷔작이었던 영화 의 풀리지 않은 숙제를 안고, 지난 겨울 찾아온 실연의 아픔 가슴을 달래며 시작한 유쾌한 인디 시트콤 가 지난 5월 24일 온라인을 통해 첫 번째 에피소드를 선보였습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궁여지책이 만들어낸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이 역시 장르와 매체를 뛰어넘는 윤성호 감독 특유의 유연한 사고가 만들어낸 흥미로운 실험입니다. ‘독립 영화계의 스타’라는 이상한 타이틀에 기대어 산업의 실험 양이 되기보다는 영리하게 자신만의 시장을 만들어가고 있는 감독. ‘인터뷰 100’ 이 만난 이 대한민국 표준 청년의 이름은 윤성호입니다.100: 작년 말에 한 잡지 창간행사 장에서 우연히 뵈었거든요. 예술과 창조에 대한 다소 거창한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 자리였는데, 윤성호 감독이 나와서 이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을 보는 게 훨씬 우리의 창조적 삶에 도움이 될 것, 이라고 말하시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나요. 조금 졸리다, 하고 있었는데 잠이 확 달아날 만큼 공감되는 순간이었거든요.
윤성호: 뭔가 대단한 생각을 가지고 한 도발은 전혀 아니었고요. (웃음) 사실 그날이 제 생일이었어요. 12월 7일. 다행히도 늘 봄이나 여름에 연애가 끝나서 아슬아슬하게 생일은 항상 누군가가 옆에 있어줬는데 그날은 8년 만에 여자친구 없이 혼자였던 날이라 정말 상태가 안 좋았어요. 그래서 약간 빈정거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당시 유일한 애인이 이 었어요. 저는 솔직히 그 전까지 드라마에 심취해서 사는 사람들이 좀 찌질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당시 제가 매달릴 수 있는 게 정말 거짓말 안하고 밖에 없었어요. 그 전에도 드라마를 많이 보는 편이었는데 이렇게 드라마에 천착하기는 처음이었던 거죠. 왜 사람들이 애인하고 이야기하듯이 드라마랑 이야기 하는지, 왜 그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는지 그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겠더라고요.
“쪽대본 때문에 주변에서 막장이라고 하더라” 100: 다소 충격적인 엔딩을 두고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긴 했지만 만큼 올해의 어떤 시기를 지배했던 작품도 없었던 것 같긴 해요.
윤성호: 예, 정말로요. 이 끝나고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았어요. 휴-.
100: 혹시 그 공허함과 아쉬움이 스스로 시트콤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에 이르게 한 건 아닐까요?
윤성호: 맞아요. 정확하게 그 순서였던 것 같아요. 솔직히 만 해도 서사를 그럴듯하게 완성시켜놓은 것 같지만 해결되지 않은 성숙하지 않은 문제를 그냥 에둘러 봉인 한 것 같아서 찝찝한 부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면 가끔 제 영화의 대사들로 위로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졌어요. 마치 처방전이랍시고 써놨지만 정작 의사는 아직 병을 못 고치고 있는 상태랄까. 체득한 처방이 아닌 거였으니까요. 그나저나 그 영화 이후엔 여자친구도 영화의 대사를 인용하면서 이별을 고하더라고요. 넌 이제 성호 8호가 되겠지 … 그러면서. 아, 그 순간 정말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이 상황이 웃기면서도 너무너무 슬펐어요. 그제야 깨달은 거죠. 영화라는 게 스스로 그 단계를 극복하고 남들을 다독일 정도의 수준이 안 된다면 자기반영 한답시고 채화 되지 않은 메시지를 넣으면 안 되겠다는 걸. 그래서인지 당시 2달쯤 쓰던 시나리오가 위기, 절정, 결말 부분에서 막혔어요. 결국 도저히 영화로는 못 만들겠고 콩트로 풀어보자고 생각하면서 시작하게 된 거죠.
100: 홈페이지에 쓰여 있는 작품 소개에서 “출생 배경: 엄마는 은하해방, 아빠는 오피스, 존경하는 삼촌은 김병욱, 친애하는 이모는 영애씨” 라고 밝혔듯이 (이하 )를 보면 김병욱 감독이 구축해 온 시트콤 장르에 대한 오마주와 함께 미국드라마 의 형식, 의 향기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윤성호: 예, 제가 꼭 챙겨보는 3대 시트콤이 있어요. 김병욱 감독 작품은 뭐든지 그리고 , 컴퓨터로는 미드 . 아 그나저나 는 이번 시즌 7도 대박이에요. 어쨌든 그래서 시트콤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모르는 거죠. 내가 MBC, KBS PD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주 프로덕션에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만들지 말까? 하다가 인터넷으로 방영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크게 손해만 안 본다면, 만약 스태프들 일당, 배우들도 거마비, 나도 사비만 안 쓸 수 있다면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죠.
100: 사실 국가적인 ‘인디시트콤’ 지원프로그램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웃음) 제작비 구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윤성호: 뭐가 되려고 했는지 모든 게 순식간에 이루어졌어요. 올 초에 주변 사람들에게 시트콤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이야기를 했더니 예상과는 다르게 다 한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인디스토리 찾아가서 50분짜리 파일럿 하나만 만들어 볼 테니 제작비 1500만 원만 구해 주십사 했죠. 파일럿 1개를 1시즌으로 만들어 보자고, 그런데 대표님도 그렇고 의외로 솔깃하게 듣더니 일주일 만에 돈을 구해오셨어요. 인디 쪽에서도 이런 시도를 해보는 게 필요할 것 같다고 여기저기 설득을 하셨던 모양이에요. 결국 그리고 나서 한 2-3주 후에 찍은 거죠. 좀 급하게 찍다 보니 대본이 거의 쪽 대본 수준으로 나와서 주변에서는 막장이다, 논란이 많았죠. (웃음) 사실 급하게 들어갈 수밖에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특히 카메라 감독님이 그때 안 찍으면 이후에 일정이 있고, 주요 배경이 되는 카페가 그 감독님 부인이 운영하는 거라…. (웃음) 아무튼… 경제적으로 찍었습니다! 100: 하지만 25분 분량의 시트콤을 매일 보는데 익숙해져서 인지 에피소드 당 4, 5분 분량의 시트콤을 일주일에 한 번 밖에 못 본다니까 좀 느리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윤성호: 감질… 나죠? 사실 지금 다 업데이트 시킬 수 있긴 한데. 아무래도 인터넷에서 보는 작품이니까 여기저기 입 소문도 나고 돌아다니는 시간을 충분히 두려고요. 아직 몇 천 명도 안 봤을 테니까요. 에피소드가 다 공개된 다음에는 1편 전체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에요. 에 나왔던 임지규 씨도 촬영 끝나고 잠깐 출연을 해줬고, 중간 중간에 새롭게 찍는 부분이 있어서 전체는 한 12화 정도로 나올 것 같아요.
100: 이번 주 월요일에 방영된 첫 번째 에피소드만 보고는 아직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딱 감이 잡히진 않던데요?
윤성호: 주인공인 재민(황제성)은 매니저인데 얼마 전 이혼을 했어요. 그런데 여전히 헤어진 전 부인을 잊지 못하고, 그녀의 이름이 ‘구하라’죠. 결국 이 남자를 위로 해줄 수 있는 사람은 구하라 밖에 없다는 뜻에서 제목이 인거죠. 나름 논리 있는 건데. (웃음). 전 부인은 계속 전화 목소리로 등장하긴 할 거예요.
100: 카라의 구하라 씨가 직접 나오지 않고요? (웃음)
윤성호: 아…! 그건 정말 개인적인 열망이고, 안타깝게도 그런 행운은 없고요. (웃음) 짧게 찍으려니까 캐스팅에도 변수가 많았어요. 원래는 에 출연한 박혁권 씨가 주인공이었거든요. 올해 초 보자마자 아, 얼른 혁권이 형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웃음) 그런데 찍기로 한 2주 동안 필리핀여행이 잡혀있다고 해서…. 결국 원래 배우 역이었던 황재성씨가 매니저로 바뀌고 혁권이 형이 배우 역할로 틈틈이 찍어서 한 3, 4회 정도까지 나오게 되요.
100: 간단하게 말하자면 ‘한 2류 매니저의 일과 사랑’ 정도가 되는 건가요?
윤성호: 네, 그렇죠. 끈 떨어진 배우들을 건사하는 매니저로서의 고충을 담은 직장 시트콤과, 누나와 여동생까지 삼 남매의 지지고 볶는 가족 시트콤이 섞여 있다고 보시면 되요. 가족들은 하라 같은 아이랑 잘 살았어야지 다 네가 잘못했다 안 그래도 괴로운데 더 속을 긁고, 그 사랑의 에너지를 배우들에게 쏟으려고 해도 하나같이 헛소리들만 찍찍 해대고. 사실 어떻게 보면… 다 제 이야기기도 하죠.
“사회의식도 있으면서 멜로도 한다는 식으로 포장되는 건 싫다” 100: 영화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윤성호: 일단 저는 시네필이 아니었어요. 대학교 4학년 때까지 1년에 극장을 한 번도 안 갔으니까요. 법대 갔으면 변호사를 되게 잘 했을 것 같아요. 친구나 선후배들은 거의 방송국에 입사했고, 의 김태호 PD나 나 같은 걸 만든 Mnet의 김태은 PD도 좋아하는데 예능 PD도 했다면 신나서 했을 것도 같고. 영화 아니면 죽음, 이런 건 아니었는데 표현하거나 발언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결국 영화를 보다가 그럼 나도 만들어 볼까가 아니라 뭐라도 만들어 볼까 하다가 영화에 늦게 눈을 뜬 경우죠. 그런데 나이가 조금 더 많아서 졸업시기가 2002년이 아니라 98년, 99년만 되어도 영화를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어요. 캠코더, DV, 프리미어 프로그램도 없는 세상에서 힘들게 영화 만든다고 안 그랬을 것 같거든요. 또 한참 뒤에 태어났다면 그냥 유튜브 같은데 올리고 만족 했을 것 같고. 그 시기가 좀 애매했던 거죠. 만들 수 있는 기술적인 환경은 손쉬워지고 좋아졌는데, 그걸 보여 줄 수 있는 통로는 결국 사람을 만나고 독립영화라는 이 마당에 들어와야 했으니까요. 아마 영화제도 당황스러웠을 거예요. 저 같은 얘들이 2000년, 2002년에 쏟아져 나왔으니까. 지금 같으면 이런 건 네이버 블로그에 지네들끼리 올리라고 하라고 무시 할 수 있는 습작들이 영화제에 소개 되었고, 어쨌든 독립영화 판에서 ‘감독’ 소리를 듣게 되었던 거죠. 참 무서운 게, ‘감독’ 소리를 들은 이후로 점점 그 판을 기웃거리게 되고 시네마테크도 드나들게 되고, 남의 작품도 찾아서 보게 되면서 영화에 처음 접근을 하게 된 것 같아요.
100: 그러면서 내가 갈 길은 이 길이다, 생각하셨던 거군요.
윤성호: 아뇨, 진짜 대중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만들고 난 이후예요. 그전에는 결국 다른 먹고 살 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을 만들고 나니까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예전에 100명의 사람들이 좋아해줬다면 지금은 1000명의 사람들이 봐주고 자기서사로 받아들이는데 기쁨을 느꼈고, 그 때부터 대중영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확고해졌죠. 그러려면 이걸 업으로 생각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죠. 물론 아직 서툴지만요. 옛날엔 변명도 많이 했어요. 누가 재미없다, 그러면 아 나 뭐 재미있으라고 한 거 아닌데, 지금은 재미없어? 어떡하지? 좀 더 잘 해야겠구나 반성도 많이 하고.
100: 그래도 스스로 이 일을 업으로 삼고 갈만큼의 차별화된 지점을 발견했기 때문이겠죠?
윤성호: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 서른다섯인데 지금은 능력이 없어도 할 수 밖에 없어요. (웃음) 소더버그가 좋은 롤 모델 인 것 같아요. 대중적 오락영화의 정점인 시리즈 같은 걸 만들면서도 중간 중간에 아주 인디한 작품을 만들잖아요. 결론적으로 더 많은 대중을 만나는 작품을 하고 싶지만 혹 다른 식의 표현의 욕구가 있을 때는 또 그 관객의 사이즈에 맞는 작품을 꾸준히 만들고 싶어요.
100: 단편 를 비롯해 그 동안 윤성호 감독은 서사에 기대기보다는 비디오액티비즘적인 요소를 가진 단편들을 제작해왔고, 유머와 풍자를 가미해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감독으로 인식되어왔던 게 사실이었잖아요.
윤성호: 안 그래도 내부에서는 대본을 보고 사회적인 시사, 풍자 이런 게 전혀 없다고 걱정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 작품은 순전히 개인적인 모티브로 쓰고 있었고 솔직히 최근에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내는데 관심 없다고 말했거든요. 블로그에도 그런 글들 다 지웠다고. 그러니까 “감독님은 그나마 그런 게 장점이시잖아요” 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허- 그런데 억지로 하는 건 아닌 것 같았어요. 슬쩍 사회의식도 있으면서 멜로도 한다는 식으로 포장하는 것도 싫고.
100: 그래서 에는 그런 흔적을 찾기 힘들까요?
윤성호: 그런데 결국 계속 쓰다 보니 한국 사람들의 숨은 증상들이나 어른들이 이상한 논리로 딴소리하는 어법 같은 게 이 작품에서도 자연스럽게 나오더라고요. 예를 들어 재민이 부모님이 전화로, 네가 이혼해서 내가 너무 아프다. 이게 다- 과천 집값 오를 줄 모르고 인덕원으로 이사 간 내 죄야, 지난 좌파정권 10년 동안에 안기부가 축소되어서 안기부 지하매점 하시던 네 아버지 정보력도 같이 떨어져서 우리가 인덕원으로 이사 간 거고… 그래서 어쨌든 네가 이혼을 하게 된 거다, 뭐 이런 식의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식으로요. (웃음) 사회비판이라니 보다는 모순된 어법 같은 게 드러나는 건 여전히 있는 거죠.
“난 독립적인 방식으로 만들 준비가 언제라도 되어 있는 사람” 100: 독립영화라는 것이 영화 제작의 방식이지 독립영화가 하나의 장르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독립영화를 마치 주류영화로 편입하기 위한 전 단계쯤으로 치부하거나 그 자체로 완성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풍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윤성호: 예전에는 그 문제에 대해서 좀 예민하게 받아들였는데 지금은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산업에 비굴하게 꼬리 치는 게 아니라면, 누군가에는 주류로 들어가기 전의 포트폴리오일수도 있을 수도 있는 거죠. 단지 서로가 편견이 없으면 좋을 것 같아요. 저 사람은 액티비즘에 가까운 다큐멘터리를 했는데 이런 극영화를 하겠어? 하지만 그 누구보다 잘 할 가능성도 있거든요. 결국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가 독립적이고 실험적이고 대안적인 작업형태를 고집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만듦새가 서툴러서 시장경제의 필터를 통과하지 못하고 독립영화계에 머물러 있는지에 대한 구분은 분명히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100: ‘인디’의 개념 또한 점점 애매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가? 하는 거죠.
윤성호: 결국 이렇게 만들 수밖에 없어서 이렇게 만드는 독립영화가 있을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종의 벤처의 개념으로 만들어 지는 거죠. 그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합리적 욕망이라고 봐요. 결국 독립영화 안에도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지향과 욕망이 있다는 건데 저는 그 사이 교집합 위로 작두를 타고 싶다는 욕망인 거죠. (웃음) 전 그냥 영화감독인데 독립적인 방식으로 만들 준비가 언제라도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100: 의 히어로, 혁권 더 그레이트! 배우 박혁권 씨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윤성호: 대학 졸업반 때 만든 첫 단편 은 어린 마음에 제대로 하겠다고 감히 배우 오디션까지 봤어요. 예술대학이 없는 대학을 나와서 예대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나 약간의 거리감이 있는데 오디션 장에서 갑자기 의 설경구 연기를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며 포효하는 분이 있질 않나, 여하튼 쇼크였어요. 일단 그런 배우들은 저희가 감당을 못하겠더라고요. 결국 주인공은 만만한 우리 학교 애들을 시켰지만 인연은 맺어두고 싶어서 다음에라도 작은 역할이라도 같이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화를 했는데 대부분 연기 전공 한다는 게 보통 일인 줄 아느냐, 영화를 쥐뿔도 모르는 애들이 그러면 안 된다, 화를 내셨어요 그런데 유일하게 혁권이 형만 어 그래? 불러줘, 하는 거예요. 결국 나중에 엑스트라로 두 장면 등장 했어요. 그리고 영화 틀 때 마다 다 오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점점 친해졌죠. 지금은 우리가 알던 혁권이 형에서 에서 까지 갈수록 대중적으로 유명해져 가니까 너무 기분 좋아요.
100: 하루가 멀다 하고 매체환경이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작년 이 맘 때만해도 스마트폰이 이 정도로 우리 생활을 바꾸어 놓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고요. 어쩌면 그런 면에 있어서 같은 형식의 작품을 내놓는 다는 것은 이 시대의 변화에 참 유연하게 대처하는 세대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윤성호: 궁여지책이죠. (웃음) 사실 궁여지책으로 할 때가 잘되는 것 같아요. 한 때 인터넷 영화, 드라마 만든다고 다들 흥분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결국 다 망했잖아요. 인터넷 문법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기존 문법으로 만들어서 새 매체에 그냥 구겨 넣는 식이였으니까요. 종지에는 간장을, 뚝배기에는 된장을 담아야 하는 거죠. 물론 그렇게 낙관적이지는 않아요. 이런 새 매체를 말할 때 늘 따라붙는 창의력, 개성, 상상력 이런 말이 싫어요. 오용되거나 남용되는 것 같아서.
100: 그간 언론이나 주변에서 윤성호 감독을 수식하며 가장 많아 썼던 말이지도 하잖아요.
윤성호: 오용된 거죠. (웃음) 대신 노멀함, 구차함, 이런 게 저에게 맞는 것 같은데 말이죠.
“1억 원 규모의 영화를 준비 중” 100: 요즘은 대한민국이 돌아가고 있는 풍경이 가히 아름답지는 않잖아요. 예전엔 속이려는 제스처라도 했다면 요즘엔 진실을 덮을 제대로 된 시나리오를 꼼꼼히 짤 염치조차 없는 세상이 랄까요. 이런 공포스러운 시대가 윤성호 감독의 영화 속에서 결국 어떤 이야기의 통해 발아하게 될까요.
윤성호: 안 그래도 2008년에 5월, 6월을 겪고 나서 트리트먼트를 쓴 게 있었어요. 98년에 스무 살이었던 여자가 2008년에 서른 살이 되기까지의 지난 10년을 그리는 이야기였어요. 사실상 촛불집회의 중심이었던 그 또래의 여자가 신세대라는 담론 속에서 20대를 시작하고 이후의 10년을 그 해 그 해 유행하던 음악과 함께 보이는 식의 구성을 생각했어요. 낙원상가에서 록 스피릿으로 기타 치는 오빠랑 사귀던 고등학생에서 벗어나 서태지 좋아하고 아이돌에 빠지고 브릿팝 좋아하고 오아시스에 심취하고 홍대에 살고, 그 사이 연애도 하고 배신도 당하는 그런 이야기였는데, 신나게 썼는데,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결국 사회적 이슈를 건드리는 프로젝트는 가능한 타이밍을 만날 때까지 소재와 서사를 쟁여놔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음 대선 전에는 오히려 만들어 질 수 있을지도 모르죠. (웃음)
100: 그러면 지금 타이밍에 들어갈 다음 작품은 뭘까요?
윤성호: 올 여름에 1억 원 규모의 영화를 한 편 찍어요. 아리랑 TV와 함께 하는 라는 프로젝트인데 우리나라 도시 하나를 배경으로 거기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거죠. 작년에 배창호 감독이 제주를, 전계수 감독이 춘천을 찍었고, 저는 올해 대구를 하게 되었어요. 사실 대구라는 공간보다는 ‘육상’이라는 소재가 마음에 들었어요. 여자 장대 높이뛰기 선수에 대한 영화를 하려고요. 시나리오는 이번 주부터 시작해야죠.
100: 그나저나 당분간은 를 알리고 설명하는 일에도 온 힘을 기울여야겠네요.
윤성호: 안 그래도 도대체 의 정체가 뭐냐고 하시는 분들도 많으셔서 이 작품은 이런 겁니다 소개하는 쇼케이스 같은 걸 다음 주에 열어볼까 하구요. 촬영을 한 그 카페가 무지하게 좋은데 무지막지하게 손님이 안 들어서, 서로 윈윈 하는 마음으로 쇼케이스는 그 카페에서 열려고요 (웃음). 그냥 백설기 먹는 파티 같은 건데 의 주제곡을 부른 ‘9와 숫자들’이나 제 영화를 좋아해주셔서 약간 친분이 생겨가고 있는 티어라이너, 시와 등 인디 밴드들과도 역시 윈윈을 해볼까 해서, 방금 통화했는데, 음향시설이 안 좋아서 공연은 안 되겠다는…. 제가 노래를 부를 수도 있고 아! 대신 혁권이 형이 브루스 기타를 연습하고 있으니까 즉석 공연을 할지도 몰라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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