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혁은 풍경(風磬)같다. 그는 어떤 상황이나 배경, 어떤 사람들과 어울려도 본래 그곳에 있었던 자만이 낼 수 있는 소리를 낸다. 에서는 내 남자친구 혹은 내 친구의 남자친구 같은 일상적인 온기로, 에서는 학교나 직장 어딘 가에 있을 것만 같은 좋은 오빠로. 그리고 에서는 급진적인 사고방식의 아내 때문에 속 터지는 대한민국 평범남으로 보통 남자를 대변했다. 그래서 김주혁에게는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운명을 가르는 사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사랑을 위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뜨거운 남자가 되었다. 신분도 뛰어넘는 사랑을 일궈낸 당찬 사내, 방자로 돌아왔지만 여전한 ‘바른생활 사나이’ 김주혁과 대화를 나눴다.영화 은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화제였다. 기존의 이미지대로라면 개성있는 류승범이 방자고, 진중한 김주혁이 이몽룡일 것만 같은데. 특별히 이미지 변신에 대한 계산이 있었나?
김주혁: 작품을 선택할 때 어떤 계획 하에서 다음은 이런 작품을 해야지 이런 적은 없다. 도 시나리오가 좋아서 하게 된 거지 특별한 이유는 없다. 좋지 않은 시나리오로 좋은 영화가 나올 순 없으니까. 내 역할이 아무리 좋아봤자 전체적인 시나리오가 탄탄하지 않으면 나만 바보 된다. 은 특히 새로움을 잘 정리해서 좋았다. 마치 진짜 있었던 것처럼, 이 아니라 이 진짜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굳이 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새로운 이야기가 탄탄했다.
“방자는 의 방자와 이름이 같을 뿐” 말한 것처럼 은 새로움에 방점이 찍힐 것 같다. 이미 전 국민이 알고 있는 이 있는 상태에서 관객의 머릿속에는 기존의 방자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가 박혀있을 텐데,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방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땠나?
김주혁: 새로운 방자라기보다는 그냥 방자다. 의 방자를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운 거지, 방자는 묵묵히 우직하게 일하는 남자다운 아이다. 근데 그 눈에 너무나 아름다운 춘향이가 들어왔고, 사랑이 너무 크다 보니 자기 신분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게 된다. 또 그걸 몽룡은 질투하는 거고. 나도 처음엔 원래 방자란 인물이 있으니까 새롭게 어떻게 하지 고민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왜 그 방자에 얽매여야 하지? 그냥 이름이 방자로 같을 뿐인데? 라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쉽더라. 의식적으로 새로운 걸 하겠다고 하면 보는 사람이 더 부담스러울 거고. 그런 생각을 아예 버리고 했다.
그렇게 아예 다른, 기존에 없던 김주혁의 방자를 보니까 어땠나? 스스로도 만족하나?
김주혁: 예전엔 촬영장 분위기가 좋으면 무조건 영화도 잘 나왔을 거야 했는데 지금은 좀 다르다. 도 공개되고 나면 답이 딱 나올 것 같다. 아무리 내 영화라고 해도 보는 순간 딱 재미있다, 재미없다가 나오니까. (웃음) 전체를 편집한 걸 보고 얘기해야겠지. 물론 배우는 아무리 주연이라고 해도 전체를 보긴 힘들지만.
보통 배우들은 자기 영화를 보는 걸 힘들어 하던데. 거기다 자신의 연기나 영화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다.
김주혁: 물론 내 영화를 보는 거 자체가 힘든 일이다. 몇 번씩 보고 또 보고 하지도 않고, 시간이 지나면 창피해서 더 못 본다. 아무래도 배우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뚝 떨어져서 보기는 힘드니까. 또 영화는 결국 감독의 예술인 거고, 배우는 그 안에서 전체적으로 어우러진 앙상블을 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연기하는 그 순간에 빠져서 전체적인 호흡을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러고 보면 김주혁이란 배우는 늘 상대배우, 특히 여배우들과의 호흡에 있어서 그들을 잘 받쳐주었던 것 같다. 에서도 그렇고, 에서도 그렇고 독특한 여성 캐릭터나 센 이야기에서 완충작용을 해줬다.
김주혁: 최대한 조화라고 할까, 함께 어우러지는 것에 접근하려고 한다. 연기를 할 때 욕심이 덜한 편이다. 내 걸 따먹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게 손해라는 걸 아니까. 상대를 살려줘야 내가 산다. 그게 내 성향이기도 하고. 내가 많이 줘야 그쪽도 많이 주는 거지 내가 안 주면 상대도 안 준다.
서로의 호흡도 중요하지만 배우들은 작품에서 대부분 경험하지 않았던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럴 땐 혼자서 감정을 끌어올리게 될 텐데, 과거의 경험에 의존하는 편인가 아니면 그 상황 자체에 몰입하는 편인가?
김주혁: 예전엔 전자의 경우였지만 요즘엔 후자가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그 상황, 그 장면에 어울리는 행동과 감정이 나온다. 눈물을 흘려야 하는 장면이라면 눈물도 더 쉽게 나오고, 집중할 수 있다. 그래서 평소에 계속 노력하고 훈련하려고 한다. 워낙 과장된 연기를 싫어하는 것도 있어서 어떻게 하면 편하게, 평상시 말투나 행동처럼 연기할까 고민도 하고. 그래서 다큐멘터리 보면서 사람들 따라하기도 한다. 사실 TV에서 하는 은 내 연기 교재다. (웃음) 그걸 보면서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감정이라도 나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일과 사랑, 두 가지를 다 잡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김주혁하면 연기적인 것 외에도 스타일리시한 배우라는 이미지 또한 강하다. 많은 작품에서 직접 스타일링 하기도 했고, 유일한 취미가 쇼핑이라고 할 만큼 옷 욕심도 많다. 그런데 이번 에선 그런 특기를 전혀 발휘할 수 없었겠더라. 많이 헐벗고 나와서. (웃음)
김주혁: 이번에는 전혀, 1%도 신경 안 썼다. (웃음) 그냥 주는 대로 입어서 너무 편했다. 의상에 신경 쓸 일이 없어서 너무 좋았다. 앞으론 시대극만 해야겠다. (웃음) 현대극을 할 때는 어떤 걸 입을까 고민하는 것도 일이다. 특히나 처럼 옷을 잘 입어야 하는 역할이면 정말 스트레스다. 드라마 같은 경우는 매 컷 옷을 갈아입어야 되니까 말할 것도 없고. 보통 사람이 하루에 옷을 몇 벌 입는가에 근거해서 준비해야 되는데, 이건 뭐 거의 패션쇼 수준이니까. 그러니 역할이 붕 뜨고, 사람한테 묻어나는 느낌이 없어서 아쉽다.
워낙 바른 생활 이미지가 강한데 일하지 않을 때 김주혁의 일상은 어떤 모습인가?
김주혁: 거의 매일 한 편씩 영화를 본다. 특히나 본 영화 또 보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와 함께 극장에 가서 보는 것보다 집에서 혼자 보는 걸 더 좋아하는데, 극장에 가면 그 분위기가 날 졸게 만든다. (웃음) 자세도 불편하고, 집중이 잘 안 된다. 집에서 혼자 밤새도록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 최근엔 이란 영화를 봤는데, 귀도라는 캐릭터가 참 매력적이더라. 내가 갖고 있지 않은 자유분방함이 있어서 그랬나? 나는 성향 자체가 어떤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다 엄한 집안에서 자라서 놀아도 고걸 못 넘는다. (웃음) 그런데 연기할 때는 그런 게 상관없으니까 그 맛에 한다. 터뜨리고 내지르는 맛에.
스스로에게 엄격한 성향에다 다큐멘터리를 즐겨보고, 연기도 과장된 걸 싫어하는 김주혁이란 사람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심심할 것 같다.
김주혁: 맞다. 심심한 사람으로 보일 거다. 근데 나는 별로 심심하다고 생각 안 한다. 남들은 재미없게 산다고 할 수 있지만 난 그렇지 않으니까. 나만 행복하면 됐지. (웃음)
6월 3일 개봉을 앞두고 홍보를 하는 동시에 차기작 촬영도 들어간다. 지금까지 말한 본인의 성향이라면 두 가지 일이 겹치는 것도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 (웃음)
김주혁: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잘 못한다. 일과 사랑, 두 가지를 다 잡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난 결국 두 가지 일을 하려다 양쪽에서 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원래 스트레스를 잘 받는 성격이기도 하고. 그래서 일부러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잘 삭히고 별 거 아니라고 지나간다. 매사가 입장 바꿔 생각하면 별 일이 아니더라. 난 내 여자가 싸웠다고 해도 미안하긴 하지만 내 여자 편을 안 든다. (웃음) 딱 중립에 서서 네가 이거 잘못했네 이런 식이다. 주변 사람들한테도 늘 너는 이거 잘못했고, 너는 이만큼 잘못했으니까 서로 화해하면 되지 뭐가 문제냐 이런다. 나랑 친하다고 해서 그래, 저 놈이 나쁜 놈이야 이러지 않는다. (웃음) 워낙 대학 때 동기들이 싸우는 걸 많이 봐서 그런 것 같다. 내가 봤을 때 서로 잘난 거 없고 둘 다 잘못했는데 싸우는 게 너무 보기 싫은 거다. 그 이후로 생각 자체가 바뀌어서 싸울 일이 거의 없다.
“앞으로는 도전적인 삶을 살아보고 싶다” 그런데 영화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공동 작업인 만큼 의견 충돌이 비일비재 할 텐데.
김주혁: 물론 의견 충돌은 당연히 있지. 다만 자기 행동이 잘못된 걸 모르는 사람들이 싸우는 게 문제다. 서로 의견이 다른 건 얼마든지 싸워도 상관없다. 또 상대방의 의견이 나보다 옳다고 생각되면 바로 수긍하고, 내 걸 고집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 답답하기도 하다. 약지 못하달까? 자존심이 있어서 약은 행동도 못하고, 굽신거리지도 못하고.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과 많이 부딪쳐야하는 업계에서 일하기 쉬운 성격은 아닌 것 같다.
김주혁: 쉽지 않다. 아버지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자존심이 세다. (웃음) 그걸 드러내서 사람들이 불편할 정도로 티를 내진 않지만 어떤 누가 와도 먼저 다가가질 못한다. 이 사람이 나한테 필요한데, 이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면 좋을 텐데 생각은 하지만 그 사람한테 가는 행동 자제가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하는 거다. 혹시나 비굴해 보일까봐. 이건 좀 고쳐야 되는데 사회생활 하는데 힘든 스타일이다. 다른 사람 시선 신경 안 쓰는 척만 하지 사실은 A형이다. 트리플 A형. (웃음) 그런데 요즘은 좀 변하려고 한다. 내 속에 있는 얘기를 많이 하자. 무조건 쌓아두지 말자. 불만은 바로 바로 얘기하고, 표현하자는 쪽으로.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고, 책을 보니까 그렇게 하라더라. 자기계발서들이. (웃음) 원래 자기계발서를 참 좋아한다.
스트레스도 속으로 삭히고 웬만하면 싸우지도 않고, 자기계발서를 좋아하고. 정말 전형적인 바른 생활 사나이다.
김주혁: 그러려고 노력한다. 내년에 40세가 되는데 철저하게 날 실험해보려고 한다. 지금까진 괜한 자존심으로 어리숙하게 산 거 같다. 솔직히 죽도록 노력도 안 한 거 같고. 보통은 30대에 그러는데 이미 남들보다 10년은 늦었으니까 40대부터는 도전적인 삶을 살아보고 싶다. 책도 많이 읽고,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만나고. 겸손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나 자신을 낮추는 경향이 있었다. 이제는 스스로 자랑도 좀 하고, 어느 정도의 포장도 필요한 거 같다. 결국 그만큼 남들한테 보이니까. 성공한 사람들의 본보기를 보면서 따라 가려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갈 수 있다더라. 그것마저 안 하면 아무것도 안 되고. 너무 자기계발서처럼 말하고 있나? (웃음)
글. 이지혜 seven@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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