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183cm의 늘씬한 남자, 아니 여자가 관객을 내려다본다. 화려한 의상과 하이힐, 가발을 벗어던질 때마다 단단한 뼈와 근육만으로 이루어진 몸이 드러나고 가슴에서 꺼낸 토마토를 그가 몸에 짓이겨 바르는 순간 섬뜩한 광기와 분노가 공간을 지배한다. 뮤지컬 에서 동독 출신의 트랜스젠더 록가수 헤드윅을 연기하는 김재욱은 인종과 성별, 배경은 물론 우리가 알고 있던 ‘헤드윅’의 캐릭터를 넘어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그에게는 ‘가장 스타일리시한 헤드윅’이라는 문구가 따라붙지만 압도적인 것이 비주얼만은 아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미소에서 시작해 때로는 여왕 같은 품위를, 때로는 어린 록스타의 치기를 보여주다 마지막 순간 암호랑이처럼 사나운 눈빛으로 세상을 물어뜯는 듯한 그의 연기에 대해 의 이지나 연출은 “자분자분하지만 막판에 광적인 악마성이 있다”고 표현했다. 분명 우리와 같은 땅에서 살고 있지만 매번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처럼 보이는 이 사람, ‘마성의 헤드윅’ 김재욱을 만났다.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김재욱 : 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처음 캐스팅 발표가 났을 때 ‘너무’ 적역이라서 놀랄 정도였는데, 혹시 전에도 캐스팅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나요?
김재욱 : 네, 아마 2009년쯤이었던 것 같아요. 앵그리 인치의 재키 형이 제 팬 미팅이나 공연 무대 연출을 항상 해 주고 계셨는데 을 하자고 꼬시더라구요. 그런데 그 때는 월러스로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을 때라 밴드가 더 중요했거든요. 그리고 사실 뮤지컬 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영화를 먼저 보고 굉장히 좋아했던 작품이라.
영화로 보게 된 건 언제였나요.
김재욱 : 2002년인가. 국내에서 개봉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재밌는 영화라고 보러 가자고 해서 영화관에 갔다가 그냥, 뿅 갔죠.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특히나 그 당시 제가 꽂혀있고 좋아했던 것들을 다 충족시켰어요. 음악, 미술, 스토리, 캐릭터 모든 게 너무 매력적이어서 “이 영화 진짜 최고다” 했죠. 그런데 그걸 한국에서 뮤지컬로 한다는 얘길 듣고 절대 안 볼 거라고 했는데…(웃음) 아이러니하죠. 지금 제가 그걸 하고 있으니.
“헤드윅을 지우고 아예 새로운 인물을 만들었죠”
그래서 결국, 올해 또 다시 이 왔을 때는 어땠나요.
김재욱 : 아, 이제는 해야 될 것 같다. 그럼 이십 대에 그냥 해버리자. (웃음) 언젠가 하게 될 거란 생각은 계속 하고 있었으니까 더 이상 도망칠 수가 없었어요. 원래 월러스 정규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멤버들조차 “지금 하는 게 낫지 않겠냐? 어차피 우린 길게 갈 거니까.”라고 했죠. 드럼 치는 태현이 형이 시즌 3 때 앵그리 인치를 하기도 했고, 베이스의 시온이도 재키 형이 계속 탐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공연을 같이 하고 있구요.
그래서 캐스팅 직후 처음엔 어떤 그림을 그리셨어요?
김재욱 : ‘진짜’ 헤드윅을 하고 싶었어요. 영화에서 존 카메론 미첼이 연기했던, 내가 봤던 그 캐릭터 그대로, 모방이라고 할 수도 있죠. 최대한 그걸 완벽하게 재현하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시작했는데 대본을 받는 순간 다 깨졌어요. 불가능하더라구요. 언어나 공간성부터 너무 달라지니까. 그래서 다시 만들어낸 것과 지금 연기하고 있는 헤드윅은 또 달라요. 이지나 선생님이 “관객들하고 만나면 또 달라질 거다” 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렇더라구요.
뭐가 가장 다르다고 생각했나요.
김재욱 :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게 헤드윅은 아닌 것 같아요. 그냥 같은 이름과 스토리를 가진, 그런 인생을 산 트랜스젠더인 거죠. 일단 저는 백인도 아니고, 그 문화권의 사람도 아니잖아요. 제가 그걸 극복해낼 연기력이 없는 걸 수도 있지만, 그냥 말이 안 된다는 느낌이 드는 거죠. 연습을 시작하고 보니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대사에서 “동독 출신의~” 라고 얘기를 하긴 하지만 저는 스스로 동양 여자라고 생각하며 하고 있어요.
대부분의 창작물이라는 게 연기하는 사람과 캐릭터의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고 시작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게 이라서 더 어려웠던 건가요, 아니면 어떤 작품을 하든 그렇게 물리적인 갭을 좀 불편해하는 건가요.
김재욱 : 가능하면 그 갭이 없는 상태에서 연기하는 걸 좋아해요. 조금 더 상대방에게 진정성을 쉽게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극에 빠져 들면 내가 흑인 캐릭터를 맡아 흑인인 척 해도 흑인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저는 그런 쪽의 연기자는 아닌 것 같아요. 지금으로선 그걸 하고 싶지 않기도 하구요.
뮤지컬이라는 낯선 무대에 서면서 스스로 부족한 점이 있다는 생각도 했을 것 같고, 그럼에도 놓치고 싶지 않은 목표가 있었다면 뭔가요.
김재욱 : 음, 저는 제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다른 뮤지컬이라면 그랬겠지만 앵그리 인치와 함께 하는 이라는 작품에는 부족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대신, 제가표현하고 싶은 게 명확했는데 지금 그게 잘 안 되는 거죠. 저는 정말로 관객들을 다 재우고 싶었고, 아니면 그들이 아주 불편해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객석 뒤편에서 헤드윅이 입장하는 순간부터 다들 환호를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트랜스젠더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누가 처음부터 그렇게 프렌들리할 수 있겠어요. 되게 불편해하잖아요.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종반부 ‘Midnight Radio’를 부르는 순간에야 관객들이 ‘아,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이구나’ 라는 걸 느끼되 그 전까지는 그냥 앉아 있는 게 고통이길 바랬어요. 도중에 나가 버리는 사람이 있길 바라기도 했고. 그래서 연습할 때는 지금보다 훨씬 불친절했고, 일부러 애드리브도 전혀 안 했는데, 막상 관객을 만나고 나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더라구요. 몸에 배어 있는 게, 사람들에게 뭔가를 해 줘야 한다는 거라 그런지.
불친절하다는 말을 했는데, 관객을 향해 대사를 하는 게 아니라 혼자 읊조리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그래서인가요.
김재욱 : 네. ‘듣든지 말든지’ 에요. 내 얘기를 듣건 말건, 귀 기울이면 더 괴롭히고 싶고 자 버리면 고맙고 지루해 하면 ‘그래, 너네 지루하겠지’ 하는 거죠. 그래서 첫 번째는 사람들이 잘 못 알아듣기를 바라는 게 있었다면, 아이러니하지만 반대로 저 사람과 내가 둘이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심어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어요. 저는 뮤지컬을 한다고 생각하기보단 그냥 헤드윅이라는, 실재하는 사람이 자기 얘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스탠딩 쇼라는 느낌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사실 첫 주 공연 마친 뒤 이지나 선생님과 대본을 굉장히 많이 바꿨어요. 6월 초부터는 그 대본으로 할 것 같아요. 거기서는 아예 헤드윅을 지우고 아예 새로운 인물을 만들었죠.
“게이 루머는 시간이 흐르면서 즐기게 됐어요”
나와 많이 다르거나, 뭔가 덜 채워진 상태의 캐릭터를 만날 경우 같이 만드는 사람들과 최대한 채워나가려고 하는 편인가요?
김재욱 : 얘기는 많이 하는 편이에요. 이지나 선생님과는 마침 집이 아주 가까워서, 노래 한 곡 다 듣기 전에 오갈 수 있는 거리거든요. 그래서 연습은 안 했어도 자주 만났고, 작품 얘기는 많이 했어요. 2005년 조승우 선배가 했을 때가 첫 시즌이었는데, 그 때는 정말로 모두가 헤드윅이 되고자, 완벽하게 그걸 구현해내고자 하는 시기였다면 지금은 그걸 다 해체시킨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시기를 잘 만났죠.
프레스콜 현장에서 객석의 남자 기자에게 카워시(헤드윅이 객석으로 내려와 남성 관객의 의자 위에서 춤을 추는 신) 당시 찍힌 사진이 앞서 얘기한 ‘도중에 나가버릴 것 같은 관객’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재미있었어요.
김재욱 : 그 날 제가 ‘Sugar daddy’를 부르게 됐는데 분장실에서 카워시를 해야 하는지 여쭤보니 아직 그렇게 한 사람이 없대요. 그리고 (조)정석이 형한테 “프레스콜에선 뭘 해도 엄숙하고 즐기는 분위기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으니 되레 그 분위기를 망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웃음) 그래서 노래를 부르다 쓱 보니 남자 사진기자분이 계시더라구요. 제가 그쪽을 향해 가니까 다들 웅성웅성대고. 그분 의자에 올라가서 춤을 췄는데 힐이 바깥쪽으로 빠지면서 넘어지다가 그 분을 붙잡았는데 정말 싫은 표정을 지으시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 불편해하는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웃음)
내가 모든 사람을 다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누군가 나를 싫어하는 건 견디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거나 누군가 나를 싫어하게 되는 것에 대해 별로 두려움이 없는 편이세요?
김재욱 :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걸 놨어요.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지만 이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룰이 있잖아요. 그게… 싫더라구요. 거기서 해방되고 싶은 욕구가 컸고, 그냥 이렇게 살아야겠다. 내가 행복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생각했죠.
보통은 어딘가에 올라갔다가 그러한 일탈적인 행동으로 인해 아래로 떨어지는 걸 겁내잖아요. 그런데 내가 올라왔다고 생각하지 않는 건가요, 아니면 떨어지는 게 겁나지 않는 건가요.
김재욱 : 둘 다인 것 같아요. 그리고 이렇게 살아야 내가 행복하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유)아인이가 나오는 Mnet 를 좀 봤는데, 그게 딱 제가 아는 유아인이에요. 그걸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죠. 아마 제가 그런 프로그램에 나갈 것 같지는 않지만, 대리만족도 좀 했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나’를 그대로 드러내고 일부러 친절한 모습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물질적으로 잃는 게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김재욱 : 굉장히 많을 거예요. 아인이는 그걸 알면서도 했을 거고, 그런 면에서 저보다 더 절실하게 발버둥 친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그래도 ‘이게 나야’ 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사실 이후로 ‘게이 이미지’가 굉장히 뚜렷하게 남았잖아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그에 대한 의미부여도 크고 그 배우에 대해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편인데, 에서 트랜스젠더 역을 맡는다는 게 또 하나의 리스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보통은 할 것 같거든요. 혹시 그에 대한 고민도 좀 하셨나요.
김재욱 : 안 했어요. 그리고 이제는 좀 재미있어요. (웃음) 그런 루머가 돌고 아예 확신하는 분들까지 계시다는 걸, 시간이 좀 흐르면서 즐기게 되더라구요. 그렇다고 이제는 제가 남성적인 역할을 못 할 정도는 아닌 것 같고, 가능성을 봐 주시는 분들은 어떤 역할이라도 맡기시겠죠.
“한 달 정도 트렌스젠더 바에서 일했어요”
하이힐에 미니 원피스를 입고 무대에 서는데, 그걸 준비하는 과정은 어땠나요.
김재욱 : 연습 다닐 때 꽤 거금을 투자해서 여자 옷이랑 화장품이랑 하이힐을 다 구했어요. 그걸 만들어준 친구가 10cm 힐을 만들어 왔는데 집에서 계속 입고 신고 놀다 보니 그걸 신고 뛰어다닐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죠. 연습 때는 항상 원피스랑 하이힐을 가방에 넣고 가서 갈아입었어요. 원래는 몸에 익질 않아서 치마를 입더라도 그냥 다리 벌리고 밥 먹고 그랬는데 자세가 달라지면 사람의 애티튜드도 달라지니까, 계속 의식을 하면서 연습을 한 게 많이 도움이 됐어요.
발 사이즈가 몇인가요?
김재욱 : 275mm요. (웃음)
치마를 입고 생활하는 건 어떤가요?
김재욱 : 편하던데요? 카키색 롱스커트가 하나 있는데 허리가 고무줄로 된 거여서 정말 편해요. 다만 집에서 그런 걸 입고 있다가 피자집이나 중국집 배달 오면 제가 못 나가고 방에서 친구한테 지갑만 던져줘야 했죠. (웃음)
와 을 거치면서 나 개인에게 성별이라는 것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험들을 몇 번 쌓은 셈인데, 그런 게 어떤 의미를 갖나요.
김재욱 : 그런 것들이 나 자신을 조금 더 좋아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인 것 같아요. 내가 부모님 모두 건강하신 가정에서 태어나 형 하나를 두고 어린 시절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살아보고 자라는 동안 만들어진 개념이나 사상 같은 게 정말 내 의지에서 나온 게 맞을까 고민이 계속 있었거든요. 정말 이대로 살다 죽는 게 행복한가 라는 생각에서부터 모든 것에 의문이 시작되더라구요. 그 때부터는 그걸 최대한 해체시켜보려고 했어요. 내가 왜 성소수자를 싫어해야 할까, 그렇게 살면 왜 안 되는 걸까, 트랜스젠더가 왜 나쁜 걸까 하는 물음을 던져본 거죠. 그리고… 을 하기로 결정한 뒤 한 달 정도 이태원에 있는 트랜스젠더 바에서 여장하고 일을 했어요.
알아보는 사람이 없던가요?
김재욱 : 한 명도 없었어요. 오히려 제가 그렇게 일을 해보겠다고 했을 때 가게에 계신 분들은 걱정하셨지만 저는 전혀 걱정 안 했어요. 처음부터 일할 목적은 아니었고, 때 게이 바에 가본 것처럼 가서 술 마시고 얘기하고 관찰하려고 했던 건데 첫 날 가보니 ‘여기 더 있어야 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 분들과 매일 밤 어울려 놀면서 일해 보니까 너무 좋았어요.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절대적이라 여겨지는 벽을 이미 넘어버린 사람들이니까 정말 자유롭고 편하고 사랑스럽더라구요. 많은 도움이 됐고, 재미도 있었고. 또 화가 날 때도 많았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대로 살고 있는, 그런 고민을 한 번 겪어보지도 않고,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과연 이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그런데 그들 또한 누군가에겐 정말 좋은 사람, 소중한 사람일 테니까 이 분노를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내가 다 뜯어고칠 수 없다면 나라도 행복하자는 결론이 나왔죠.
그건 무대 위가 아닌데도 내가 아닌 인간으로 살아보는 경험인데, 어떤 캐릭터를 상정하고 가셨나요?
김재욱 : 특별히 정해놓고 간 건 아니었어요. 그냥 좀 낯설고 무서운 경험이니까 약간 새침하게, 접근하기 힘든 사람처럼 행동하게 됐는데 지금 헤드윅 캐릭터의 기본은 거기서 만들어진 것 같아요.
스타는 기본적으로 대중의 욕망의 대상이고, 모델로나 연기자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 앞에 놓이는 경험도 많았을 텐데 남자일 때의 나와 여장을 했을 때의 느낌이 많이 다른가요.
김재욱 : 달라요. 사실 여자일 때가 더 재미있어요. (웃음)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조금 더 섹슈얼한 느낌이 강해요. 좀 더 동물적이고, 헤드윅을 보는 여자 관객들의 시선도 그래요.
“ 보러 오는 관객분들, 욕 할 각오하고 오세요”
그동안 TV나 영화 연기를 하면서 카메라 앞에 계속 서 왔지만 의외로 경험이 전혀 없었던, 라이브로 연기를 해야 하는 무대에서 제일 자유로워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땠나요.
김재욱 : 이상하게 불편하지는 않았어요. 세 번째 공연까지는 덜덜덜 떨었는데 올라가면 그게 멈춰요. 저는 ‘김재욱’으로 사람들 앞에 섰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캐릭터가 있거나 월러스 공연처럼 노래를 한다는 목적이 있을 때는 괜찮은 것 같아요. 그리고 시온이나 드럼 치는 민기 형처럼 앵그리 인치가 사운드를 완벽하게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에서도 월러스로 무대에 설 때와 큰 이질감은 없었던 것 같아요.
헤드윅은 대개 어떤 희망이나 구원의 아이콘으로 해석되지만 김재욱 씨가 연기하는 헤드윅은 삶에 대해 체념하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했어요. 그렇다면 자신이 그리는 헤드윅의 마지막은 어떨 것 같나요.
김재욱 : 결국 ‘Midnight Radio’를 부르면서 해방되는 거잖아요. 나의 다른 자아일 수도 있는 이츠학을 보내주고, 이제 남자도 여자도 무엇도 아닌 그냥 음악을 통해 살아가겠다는 폭발이나 해방감을 보여주는 건데 사실 저는 아직 큰 해방감을 못 느꼈어요. 그냥, 다음 날부터 또 그렇게 살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걸어 나갈 때도 마음이 좀 힘들어요.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데 일단 가는 거죠.
하지만 그 직전, 의상을 다 벗어던지고 가슴에서 토마토를 꺼내 짓이기며 관객들을 바라볼 때는 굉장히 처절한 에너지가 느껴져요.
김재욱 : 그 신이 너무 좋아요. 결국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라는 걸 다 내던지고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거기서 해방감을 느껴요. 단추를 하나씩 끄르면 사람들이 다 놀라는데, 그건 불편함의 끝이거든요. 정면으로.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럴 때 “제발 날 좀 봐주면 좋겠어. 눈 피하지 말고. 이렇게 보고 싶지 않은 진실이 많겠지만 지금은 나를 봐. 도망갈 데도 없잖아” 라는 느낌으로 관객을 보는 거예요.
헤드윅의 연인이었던 토미를 같이 연기하잖아요. 내가 표현하는 헤드윅이 있는 것처럼 내가 표현하는 토미도 다를 텐데요.
김재욱 : 그래서 토미 목소리를 녹음할 때 많이 고생했어요. 헤드윅이라는 캐릭터가 다른 사람들이 연기하는 것과 많이 달라져 버리니까 토미도 그만큼 달라질 수밖에 없더라구요. 좀 더, 비열한 느낌이 있어요. 나의 토미는. 야망도 있고, ‘저 여자에게서 진짜 다 뽑아먹겠다’는 태도가 있는 캐릭터거든요. 그래서 마지막에 ‘Wicked Little Town’을 부를 때조차 약간 자기만족이 있어요. 내가 정말 이 사람에게 노래를 불러주며 용서를 빌고 싶다는 마음도 없진 않은데, 이 많은 관중들 앞에서 록스타인 내가 이렇게 멋지게 얘기하는 거야 라는 느낌도 있는 거죠.
같은 록 가수지만 토미로서 노래할 때와 월러스에서 노래할 때의 기분은 어떻게 다른가요?
김재욱 : 토미일 때는 굉장히 좋아요. 머리 끝까지 자뻑의 감정으로 꽉 찬 건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웃음) 월러스 할 때는 없는 텐션이 확 생겨요. 그리고 월러스에서 노래할 때는 그냥 쾌락만 있는 것 같아요. 내 상태가 어떻든, 술에 취해 있든 가사를 좀 잊든 이 밴드와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좋아요. ‘나의 재능과 우리의 음악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건 아니고, 그야말로 저희 좋자고 하는 거죠.
지금 일하는 분야 자체가 자신의 뜻대로 안 되는 부분이 굉장히 많은 곳이잖아요. 여러 가지 편의와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게 많은데, 그래도 지금까지 해 온 정도면 앞으로도 할 만 하다고 생각하세요?
김재욱 : 앞으로는 더 힘들어지는 것도 있겠죠. 하지만 하면서 그동안 풀기 어려웠던 물음표가 확신으로 바뀌긴 했어요. 앞으로 내가 어떻게 이 일을 해 나갈 것인가가 명확해진 거죠.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나 작품을 하지 않을 때 나의 텐션 등, 돈은 못 벌겠지만 이렇게 일하는 게 내가 행복하고 재밌고 편하겠다는 그림이 그려졌어요.
그 기준이라는 건 ‘내가 원하는 것’을 의미하는 건가요?
김재욱 :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내가’ 꼭 해야 되는 것 세 가지 다에요.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
마지막으로, 앞으로 을 보러 올 관객들에게 일종의 선전포고를 하자면? (웃음)
김재욱 : 욕 할 각오하고 오세요. (웃음) 돈 내고 오락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에게 기대와 다른 걸 보여준다는 게 오만함일 수도 있고 정말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는데, 이런 사람 하나쯤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아무도 안 했다면 내가 해야지. 그게 재미있어요.
인터뷰, 글. 최지은 five@
인터뷰. 장경진 three@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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