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근우의 10 Voice] 신라면 블랙은 라면이 아니다
[위근우의 10 Voice] 신라면 블랙은 라면이 아니다
고급스러운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역시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릇에 담긴 라면 한 젓가락을 천천히 입으로 넘긴다. 그리고 들리는 내레이션. 내 건강을 위하여. 장혁이 출연한 신라면 블랙 광고는 개당 1000원이 넘는 프리미엄 라면답게 제품의 고급스러움을 어필하려 한다. ‘농~심 신~라면’ 같은 호들갑스러운 CM송도 없고 구성도 미니멀하다. 하지만 왠지, 온갖 고명을 올려놓고 찍은 라면 클로즈업은 그다지 먹음직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역시 장혁이 출연했던 MBC 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뒷골목 출신 명하(장혁)는 자신의 집에 놀러온 부잣집 딸 수빈(김하늘)을 위해 라면을 끓이고, 둘은 누가 냄비 뚜껑에 덜어먹느냐로 다투다 결국 명하가 손님 수빈을 위해 뚜껑을 포기한다. 별다른 고명 없이 허름한 냄비에 담긴 라면은, 하지만 신라면 블랙 광고의 그것보다 훨씬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라면의 상징성, 신라면 블랙에 무너지다
[위근우의 10 Voice] 신라면 블랙은 라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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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배고플 때 먹는, 혹은 군대에서 반합에 끓여먹은 라면이 제일 맛있더라는 환경과 식욕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때로 어떤 음식은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다. 프랑스 문예이론가 롤랑 바르트는 ‘포도주는 본질적으로 기능’이라면서 ‘(싸구려) 포도주는 작가가 지닌 지식인적 습성을 제거해 줄 것이다. 결국 포도주는 작가를 프롤레타리아와 동등하게 만들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앞서 말한 의 장면에서 라면이라는 음식 역시 하나의 기능으로서 등장한다. 가난한 명하의 세계를 대표하는 음식은 라면이고, 그런 라면 앞에서 오히려 뚜껑을 달라는 부잣집 따님은 그 세계와 융합할 수 있는 호감형 여주인공이 된다. 비록 실제로는 500원 짜리 동전 하나로도 라면 한 봉지를 살 수 없게 되어도, 3년 정도 주기로 소주 가격이 인상되어도 이들 음식은, 적어도 상징적인 차원에서는 돈이 부족한 이들도 따뜻하게 즐길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쌀이 떨어졌는가? 그럼 라면을 사 먹어라.

신라면 블랙 광고가 주는 위화감은 그 때문이다. 단순히 프리미엄을 강조해서가 아니다. 맛있는 라면도, 뉴면도, 무파마도 모두 프리미엄을 강조했다. 하지만 신라면 블랙은 기존의 라면이 가진 정서 자체를 부정한다. KBS ‘남자의 자격’에서 펼쳐졌던 라면 콘테스트는 매일 먹던 ‘그’ 라면도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으로 신선한 충격을 줬지만 라면 자체의 맛과 간편함, MSG, 칼로리 등을 시비하진 않았다. 하지만 광고 속 검은 셔츠의 남자는 건강을 챙기기 위해 이제 다른 라면은 먹지 말라고 말한다. 이 광고가 얼마나 제품의 특성을 헛짚었는지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 광고는 우리가 원형처럼 가지고 있던 정서, 혹은 상징성들이 실은 그다지 튼튼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초반 호기심 때문이라고 해도 런칭 한 달여 만에 신라면 블랙은 100억여 원의 매출을 올렸다.

언젠가 라면이 라면이 아니게 될 때
[위근우의 10 Voice] 신라면 블랙은 라면이 아니다
[위근우의 10 Voice] 신라면 블랙은 라면이 아니다
김연아가 출연했음에도 최근 많이 비판받고 있는 하우젠 스마트 광고를 보자. 크고 무거운 에어컨은 Stupid하고, 자기네 제품은 Smart하다는 그 오만함은 불쾌하지만, 구식 에어컨이 받는 천대 자체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MBC 에서 나름 중산층이라 할 동민(정준)네도 여름에 에어컨 구입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던 게 90년대 초중반이다. 제법 사는 집의 상징이었던 에어컨은 이제 그 모델로는 구식 정도도 아닌 Stupid 취급을 받는다. 물론 라면이 환기하는 정서는 에어컨이나 컬러 TV보다 훨씬 강력하다. 1986년에도 임춘애의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언론은 밥보다 라면을 많이 먹었더라는 이야기를 유포했고, 1989년 MBC 에서 부잣집 딸 유정(임미영)이 기태(박상원) 일행과 어울리다 집에 들어갔을 때, 먹고 싶다고 말해 집사를 당황케 한 음식도 라면이다. 는 1999년 작이고, 최근 방영 중인 SBS 에서 죽지 못해 사는 듯한 이경(이요원)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음식 역시 컵라면이다. 하지만 이제 이경은 삶을 포기한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음식을 선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어딘가에서 라면은 ‘내 건강을 위하여’ 먹는 음식이 되었으니. 물론 이것은 아직 작은 균열이다. 중요한 건 이 균열이 환기하는 진실이다.

작품들 안에서 계급적, 정서적 기능을 담당하던 물건들은 시대의, 더 정확히는 시장의 변화를 통해 그 의미 역시 변화한다. 라면을 보며 느끼는 그 친숙함과 따뜻함, 작품 속 주인공의 허기를 채워주던 그 면발과 국물의 느낌을 규정하는 건, 사실 수요와 공급의 시장질서가 규정하는 어떤 좌표에서 비롯된다. 있는 집의 상징이던 대형 에어컨이 Stupid한 것이 되는 것처럼, 언젠간 KBS ‘1박 2일’ 멤버들이 야외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모습이 소박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이건 어떠한 병리적 상황도 아니다. 다만,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왠지 조금은 슬플 것 같다.

글. 위근우 기자 eight@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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