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이 튀기보다는 연기자들이 튈 자리를 확보해주는, 카메라에 얼굴을 드러낼 때 남우세스러워하는, 이승기가 종종 흉내 내는 차분한 말투의 이 남자는 그래서 최고 시청률 예능 프로그램의 PD처럼 안 보이기도 한다. 이번 그의 ‘테마 영화 추천’은 그래서 흥미롭다. “기본적으로 비현실적인 영화를 좋아해요. 드라마 장르의 영화, 사람을 몰입하게 하는 영화는 안 봐요. 내 감정이 붙잡혀서 휘둘릴 때 감정의 소모가 피곤하거든요. 비현실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어서 감정 소모가 적고 눈으로 쫓는 즐거움이 큰 영화가 좋아요.” 남들이 다들 욕해도 1, 2, 3편을 DVD로 소장하고 있다는 그의 흥미로운 취향을 통해 비로소 예능 PD 나영석의 속내를 조금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1977년 | 조지 루카스
“어렸을 때부터 가장 좋아했던 영화는 예요. 어떻게 저렇게 신기한 영화가 있지? 싶은 기분, 우주에서 광선검 가지고 싸우고, 지금은 다양한 의미의 텍스트로 읽히지만 어린 남자애들에게 딱 맞는 이야기 같아요. 제가 어디에 열렬히 빠지거나 탐닉하는 타입이 아닌데 가 에피소드 4라는 이름으로 재개봉할 때 처음으로 극장 예매라는 걸 해봤어요. 수요일 밤 10시 프리뷰하는 표를 어렵게 구해 보는데 그 자막 올라가는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있더라고요. 그런 기억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거 같아요. 요즘도 뇌를 쉬고 싶을 때 시리즈 전부를 멍하니 앉아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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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 팀 버튼
“팀 버튼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좋아해서 그의 거의 모든 영화를 다 봤는데 그 중 을 가장 좋아해요. 우울한 SF 영웅이라는 면에서 배트맨 캐릭터를 좋아하고 그래서 다른 최근 작품들도 좋아하지만 모든 시리즈 중 이 가장 좋아요. 잭 니콜슨의 존재감이 너무너무 대단하잖아요. 요즘 조커라고 하면 다들 히스 레저의 조커 연기를 얘기하는데 그건 그야말로 연기를 잘하는 거고, 잭 니콜슨의 조커는 영화의 세계관을 완성하는 톱니바퀴인 거 같아요.”
팀 버튼 최고의 작품으로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기괴한 상상력이 불을 뿜던 ? 그의 페르소나 조니 뎁을 발굴한 ? 후기 걸작이라 할 ? 사람마다 그 순위가 다르겠지만 그들의 순위에는 항상 1, 2편이 수위를 차지하지 않을까. 그만큼 특유의 음울함으로 완성한 고담시의 풍경과 편집증적 영웅의 이야기는 엄청나게 매력적이다. 특히 나영석 PD가 말한 것처럼 1편의 악당 조커의 존재감은 그토록 매력적이던 2편의 캣우먼으로서도 넘을 수 없는 굉장한 것이다.

1994년 | 제임스 캐머런
“한동안 내 마음속 영화 순위에서 를 밀어내고 1위를 차지하던 영화예요. ‘나는 즐길 거야’라고 마음먹는 순간, 이렇게 백퍼센트 즐길 수 있게 하는 영화는 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거 같아요. 비주얼이나 속도감, 이야기의 짜임새에 있어서. 예능이나 코미디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영화를 봐야하지 않나 싶어요. 영화 속 아놀드가 아내와 바람피우던 사기꾼을 혼내주고 호텔방에서 아내에게 섹시한 춤을 추게 하는 장면이 있어요. 거기서 아내가 막 춤을 추다 쿵하고 넘어졌다가 벌떡 일어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예능에서 정말 많이 쓰는 코드예요.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뗄 수 없는 영화죠.”
으로 아카데미까지 확실하게 접수하고, 로 영화계의 신기원을 열었지만, 감독으로서 제임스 캐머런의 재능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영화는 역시 다. 아랍계 테러리스트를 미국의 액션 히어로가 응징한다는 설정은 진부하지만,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첫 등장하는 탱고 신부터 실제 해리어 전투기를 등장시킨 마지막 액션 신까지 웃음과 액션 두 마리 말은 정말 쉬지 않고 질주한다. 그리고 영화의 수미상관을 이루는 마지막 탱고 신은 그야말로 백미.

2001년 | 주성치
“주성치를 전부터 좋아하고, 이나 같은 옛날 영화들도 좋아해요. 그런데 TV 예능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그다지 훼손하지 않으면서 대중의 입맛에 맞춘 를 높게 평가해요. 올해 초, 사업상 한국에 방문했던 주성치를 지인의 소개로 직접 만난 적이 있어요. 그 때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자기가 만든 영화 중 최고로 꼽는 건 인데 흥행에서 대 참패를 해서 실의에 빠졌었다고. 그냥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주성치의 옛 영화를 향수하지만 어쨌든 그도 비즈니스에 발을 담그고 있는 영화인이잖아요. 그래서 거기에 부합하는 영화를 만든 게 라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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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 로버트 로드리게즈
“앞선 4개의 영화가 변치 않는 제 탑4고, 나머지는 여러 영화들을 좋아해요. 타란티노와 로드리게즈 두 감독의 작품들을 좋아하는데 그 중 어느 하나를 고르라면 역시 조금은 로드리게즈 쪽인 거 같아요. 타란티노는 훨씬 미국적인 거 같고. 는 뱀파이어 영화라는 것부터 좋고, 술집 안에서 뱀파이어에 맞서 인물들이 조합되는 게 재밌어요. 별 거 아닌 조연이지만 채찍을 쓰는 남자, 거구의 흑인 등 일종의 히어로들이 하나씩 모이는 거잖아요. 그들이 모여 위기를 돌파하는 구조가 재밌어요.”
포스터에 그려진 조지 클루니만 보고 평범한 액션 영화 정도를 기대하며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영화다. 그만큼 이 영화는 진정한 황당함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은행을 턴 두 형제가 여행 중이던 목사 가족을 만나 술집 안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일종의 로드무비인가 싶던 영화 속 세계는 해가 지는 순간 뱀파이어의 아수라장이 된다. 그 당혹스러움, 그리고 그걸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새도 없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뱀파이어와의 대결은 제대로 된 영화적 농담의 절정이다.

자신의 연기자들을 ‘예능 특공대’라 부르며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밀어 넣는 건, 사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으로서 본인 역시 그 상황에 밀어 넣어지기 때문이다. 부침 심한 예능의 세계에서, 외부적 요인으로 멤버들을 떠나보내는 등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1박 2일’이 주말 예능의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는 건 관성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겁 없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항상 나침반을 들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주저하지 않는, 나영석 PD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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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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