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나영(신은경)은 마지막에 웃었다. MBC 은 윤나영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대신 대서양 그룹을 선사했고, 그가 다시 살아갈 또 다른 욕망을 제공했다. 남편을 갖기 위해 남편의 여자를 차로 들이 받았던 여자, 자신의 딸을 저버린 여자, 대서양 그룹의 안주인이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여자. 도덕적인 관점에서 악녀라고 하기에 충분했던 윤나영에게 행복일지 불행일지 모를 엔딩을 선사한 은 분명히 평범한 드라마는 아니었다. 정하연 작가는 왜 윤나영을 “귀엽게” 바라보았던 것일까. 작가경력 43년 째, 그럼에도 2000년대 이후에도 MBC , 등 여전히 문제작을 써내는 정하연 작가에게 에 대해, 그리고 ‘작가의 불꽃’에 대해 물었다.작품을 마무리하는 기분이 어떠신가요?
정하연: 생활의 리듬이 바뀌니까 죽겠어요. (웃음) 원고 끝난 뒤에는 자다가도 깜짝 놀라서 일어나게 되고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작품의 결말은 만족스러우신가요? 이 인터뷰는 마지막 회가 나온 다음날 올라가는데, 어떤 결말이 나든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 될 것 같습니다.
정하연: 원래 계획은 김민재(유승호)가 죽던지 백인기(서우)가 죽던지 그렇게 구상을 했어요. (웃음) 그런데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도 다 죽어버리면 살아남을 놈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지 말고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걸로 바꾸자고 해서 안 죽였어요. (웃음) 그리고 김태진(이순재)과 윤나영도 묘한 해피엔딩으로 했어요. 김태진은 쇼크로 쓰러지기도 하지만 워낙 대단한 사람이니까 결국 헤쳐 나갈 거고, 나영이도 상황에 맞춰 살아남을 테니까 극단적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어요. 싱겁다는 말을 듣더라도 삭막한 세상에 행복하게 하자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
“윤나영을 먼저 만들고 나서 이 나왔다” 이 막장? 나는 윤나영이 귀엽다” -1" />
김태진 회장이나 윤나영의 독한 인생을 생각하면 그들도 다 이해하고 쓰다듬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후반으로 갈수록 누구의 인생이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정하연: 그런 거죠. 초반에 막장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웃음) 막장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패륜만 보여주는 게 막장이에요. 저는 사람들에게 어떤 자극을 주고, 그 사람들이 그 자극에 대해 어떤 모습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나영이라는 여자를 그릴 때 이 여자의 행동을 자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 드라마가 끝났을 때 이 여자를 가장 사랑스러운 여자로 표현하고 싶었던 거예요.
사랑스럽고 독한 여자겠군요. (웃음)
정하연: 김태진 같은 재벌에 비하면 나영이는 순수하고 착한 여자라고 생각해요. 김태진은 사람도 쓸모없으면 버리면 그만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나영이는 재벌가 안에서 어떻게든 자기가 살아남으려는 거고, 자기한테 오는 상황을 안 피하잖아요. 김태진 같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나영이가 어떻게 사느냐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마지막 회 보시면 이해가 될 거에요. (웃음) 드라마를 보면 어떤 인간이 머릿속에 남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무조건 나영이라는 여자 하나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그 여자의 슬픔이든 고통이든, 악한 모습이든 선한 모습이든 그런 걸 다 가진 모습을 그려가다 보면 한 인간의 모습이 나올 것 같았어요.
윤나영이라는 캐릭터를 그렇게 욕망으로 가득찬 인간으로 묘사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정하연: 한 여자의 일생의 사랑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그게 남자든 자식이든 인생이든 정말 열정적으로 사랑하면서 운명을 헤치고 살아가는 여자. 시놉시스에는 “운명에 굴복하는 자가 패배자다”라는 말도 있었는데, 어떤 운명이든 그걸 뛰어넘는 사람이 승자 아니냐, 삶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있어요. 그 열정이 사랑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겠죠. 그런 격렬한 여자를 만들고 싶어서 윤나영을 먼저 만들고, 그 성격에 맞는 사람들을 만들다 보니까 이 됐어요.
그렇게 열정적인 인생에 대해 관심을 두는 이유가 뭘까요?
정하연: 나이 든 작가들은 항상 그런 것에 관심이 많아요. 인생을 마무리 해야 할 시점인데 뒤돌아서서 더 열심히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에서 영민이가 자기 아들한테 “젊다는 게 뭐냐 그러면 길을 잘못 들어도 돌아가서 또 시작하면 된다”고 하잖아요. 나이 들면 그런 열정이나 인간을 움직이는 에너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요. 나를 움직이는 힘은 뭐였느냐 하는 거. 그래서 나는 나영이가 귀여워요. (웃음) 아무리 불리해도 다 틈을 찾아서 쑤시고 들어가려고 하니까.
캐릭터와 배우가 굉장히 겹쳐 보이는 이유가 있네요.
정하연: 처음에는 신은경 씨가 캐스팅 후보에 오르지 않았어요. 그런데 우연히 만나게 됐는데, 눈 속에 욕심이 지글지글 끓는 거예요. 내가 이 사람하고 뭔가 하나 해서 살아야겠다 하는 그런 욕심. (웃음) 그래서 스태프에게 얘기했더니 다 반대하는 거예요. 연기 외적인 요소에서 문제가 많아서 못 해낼 거라고. 그런데 나는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할 거라고 말했어요. 살 길이 이것 밖에 없으니까.
상황부터 나영이 같았죠.
정하연: 그래서 두 달 동안 캐스팅을 두고 싸웠어요. 다른 사람들은 무조건 안 된다고 하고. 그래서 신은경 씨를 만나서 다시 다짐도 받고. 지금 생각해도 최선의 선택이었던 거 같아요.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변덕스럽고, 악랄하기도 한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라 시청자들이 주인공을 미워하면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시청자들이 나영이를 사랑하게 만들었잖아요.
“재벌이 어떻다는 이야기를 쓰려고 그런 건 아니다” 이 막장? 나는 윤나영이 귀엽다” -1" />
나영이의 인생은 김태진 회장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태진 회장의 젊은 시절이 나영이와 비슷했을 것 같구요. 작품 안에서도 김태진 회장이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자꾸 되풀이 하잖아요.
정하연: 그렇죠. 김태진과 나영이 아버지는 둘이 시골에서 친구였고, 동시에 삼각관계였어요. 그런데 여자는 김태진을 더 좋아했고, 나영이 아버지가 김태진이 그 여자를 포기하겠다는 조건으로 김태진 대신 감옥에 갔잖아요. 그런데 김태진이 사업해서 돈을 번 뒤에 다시 그 여자를 찾아와서 간통을 저지르는 거예요. 그 광경을 나영이가 보게 되는데 아버지가 못 보게 한다고 눈을 손으로 가리는 거죠. 그 부분에서 김태진은 나영이에게 죄를 지은 거고, 그 부분에 김태진의 남은 인간성이 있는 거예요. 나영이가 김태진에게 그 문제를 얘기하니까 무너지잖아요. 마지막 남은 양심이나 죄의식 같았던 거죠. 그리고 다시 나영이는 자신의 대에서 백인기에게 죄를 짓게 되고.
그 점에서 은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현대적 버전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나영이가 얼마 전 방영분에서 “내 눈을 파버렸으면 좋겠어”라는 대사도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생각나구요.
정하연: 대학교 다닐 적에 순수문학이나 평론, 희랍 비극에 대한 책을 많이 읽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그 작품들의 영향을 안 받을 수 없어요. 드라마라고 해서 항상 시류에 영합하는 말만 쓰지 말고 독서든 뭐든 사고를 거쳐 나온 대사도 나와야 하는 거구요. 김태진 회장이 저지른 일이 나영이에게 가고, 나영이가 저지른 일이 백인기까지 가는 건데, 그게 신화적인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겠네요. 그런 장치를 계속 쓰기 때문에 내가 가끔 가다 실패작이 나와. (웃음)
하하. 시청률 50%이상의 드라마가 나오는 건 이상한 일이라는 말도 자주 하셨죠.
정하연: 시청률이 너무 올라가면 불안해져요. 아무리 좋은 드라마라도 국민의 40, 50%가 그 드라마를 본다는 건 이상한 거예요.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건 다양한 기호와 취미와 생각을 가졌기 때문인데, 어떻게 우리나라 국민의 반이 한 가지를 좋아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인간이 얕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잖아요. 모든 드라마가 색깔이 있어야 하는데 다 똑같은 걸 내놓으니까 그 중 제일 나은 걸로만 몰리는 거예요.
그만큼 드라마 작가가 세상에 갖는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데, 그 점에서 을 한 여자가 재벌가로 들어가는 이야기로 풀어낸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정하연: 일단 그게 선이든 악이든 너무 열심히 사는 여자를 하나 그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나영이가 소소한 데 가서 부딪히고 깨지는 것 보다는 좀 거대한 게 나영이를 짓눌러야 할 거 같았어요. 자기네를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믿는 그 재벌가에 한 서민 여자가 던져졌을 때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어요. 재벌이 어떻다는 이야기를 쓰려고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에서는 재벌의 역사가 상당히 자세하게 나오잖아요. 대서양그룹은 군부 권력과 유착돼서 지금의 위치에 오른 걸로 묘사되기도 하구요.
정하연: 우선 박정희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거 같아요. 우리 세대는 박정희에 대해서 이중적인 감정을 갖고 있어요. 하나는 유신 독재로 우리의 자유를 못 누리게 했다는 것에 대한 증오가 있죠. 그런데 우리 세대가 철저하게 반항하지 못한 건 그 박정희 시대에 우리의 생활이 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거예요. 그게 막 미치는 거지. 다들 먹고 살 수 있게 되고, 돈을 모아서 큰 아들을 대학교 보낸다든가 하는 게 되기 시작하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죽이고 싶기도 하지만 완전히 미워할 수만은 없는 사람, 그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거든요. 재벌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점에서요?
정하연: 재벌들이 자기 능력으로만 그렇게 되진 못했죠. 재벌이라는 게 박정희 시대의 정책에서 나온 거거든요. 일제시대에 일본이 한국 팔도에 부자들을 만들어놓고, 그 사람들이 그 지역 경제를 이끌도록 했는데, 재벌도 그 비슷한 거였어요. 국가 권력을 통해서 큰 부자 여럿 만들어서 여러 사람 먹여 살리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운 좋게 몇 사람이 선택됐는데, 그 중에 못난 사람들은 또 도태되고, 남은 사람 몇 명이 소위 지금의 재벌을 만든 거죠.
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와 사진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글, 인터뷰. 강명석 two@
인터뷰. 최지은 five@
인터뷰. 김선영(TV평론가)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