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정은 늘 현실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었다. 생활의 흔적이나 일상의 고단함으로부터 격리되어 무균 상태에 놓인 석고상 같은 소녀. 그래서 동생을 앗아간 잔인한 현실에 눈을 감거나(<장화, 홍련>) 연인과의 이별을 감당하지 못해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순간에도 몸과 마음이 아팠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앓고 있는 병 때문에 사랑이 깨지기도 했다. (<행복>) <전우치>에서 자동차를 움직이는 괴력에 도취되는 모습이 가장 낯설 수밖에 없었던 그녀에게는 환자복이나 소독약 냄새가 연상되는 특유의 인상이 있었다.

그랬기에 영화 <김종욱 찾기>에서 아버지에게 잔소리 듣는 노처녀 지우는 이제까지의 임수정과 가장 동떨어졌다. 선배의 고까운 커피 심부름도 참아내고, 실수에 책임도 질 줄 아는 삼십대 초반의 직장 여성. 가끔 애교도 부리고, 옛 추억에 젖는 감성도 있지만 대부분 일하느라 정신없는 보통 여자. 병약한 소녀로만 보이는 그녀의 몸에 삼십대 초반의 평범한 여자를 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실제 가지고 있는 고민이나 감성과 일치하는” 지우는 임수정에게 “오히려 연기하기 어렵지 않았”다. 남자의 첫사랑으로 스케치북에 담겨 있던 광고 속 이미지 대신 서른한 살 여자의 고민이 남은 시간. 다음은 첫사랑을 간직하기 보다는 누군가의 “마지막 사랑이 되고 싶”고, 먼 훗날에는 “작은 오두막에서 남편과 함께 글을 쓰는” 꿈을 꾸는 임수정에게 오랫동안 남은 영화들이다.




1.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
1939년 | 빅터 플레밍

“옛날 영화를 좋아해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어릴 때 TV에서 처음 보고 너무 감동 받았죠. 어린 마음에도 ‘아, 이게 영화구나’ 감탄했던 기억이나요. 그 이후에도 기회만 되면 봤어요. 절 스칼렛 오하라에 대입시켜서 보기도 하고, 레드 버틀러를 보면서 ‘저런 남자를 만나야해’ 다짐하기도 하고. (웃음) 그 영화는 정말 걸작일 수밖에 없는 게 시대적인 이야기와 로맨스를 너무나도 절묘하게 배합한데다 스토리와 캐릭터의 힘이 굉장했잖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해요.”

평생 동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단 한 권만을 쓴 마가렛 미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탄생부터 전설로 남기 충분했다. 당시로는 드물게 600만 달러가 투입된 대작은 전대미문의 캐릭터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와 레드 버틀러(클라크 케이블)를 탄생시켰다.



2. <티파니에서 아침을> (Breakfast At Tiffany`s)
1961년 | 블레이크 에드워즈

“오드리 햅번 영화중에서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제일 좋아해요. 그 중에서도 오드리 햅번이 창가에서 기타 치는 장면이요.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창가에 않아서 기타 치는 장면을 보고선 꿈이 생겼죠. 나도 언젠가 기타를 배워서 저렇게 해봐야지. 그래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기타를 배우고 있죠. 악기는 취미로 좋아서 배우긴 하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음악영화에도 나오고 싶어요. 물론 밴드에서 기타를 맡아야겠죠? 보컬은 목이 약해서 못하겠어요. (웃음)”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패션 아이콘으로서 오드리 햅번을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영화다. 창가에서 ‘문 리버’를 연주할 때 그녀의 크루즈룩과 보석상 티파니 앞에 선 그녀의 볼드한 선글라스까지. 물론 그 패션보다 오래 남는 건 오로지 여배우만의 매력으로도 영화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오드리 햅번의 아우라다.



3. <노팅힐> (Notting Hill)
1999년 | 로저 미첼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 영화중에서 가장 좋아해요. 지금도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봐요. 여배우가 주인공이라 더 이입이 됐던 거 같아요. 사실 그런 일이 현실에서 잘 일어나지 않지만 영화 마지막에 휴 그랜트에게 했던 줄리아 로버츠의 대사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더라구요. “나도 그냥 한 남자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여자일 뿐이에요.” 남들은 그녀를 스타로만 보는데 그냥 평범한 여자일 뿐이라는 말을 하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돌아서는데 ‘아, 그래 완전 이입된다’ 그랬죠. (웃음)”

기자회견장의 극적인 프러포즈와 함께 마지막 해피엔딩 장면까지,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가 가져야 할 덕목을 모두 갖췄다. 귓가를 간질이던 O.S.T. ‘She’가 영화의 여운을 더욱 오래 남긴다.



4. <500일의 썸머> (<500> Days Of Summer)
2009년 | 마크 웹

“오래 전부터 제작 소식을 듣고 기대를 많이 했던 영화였어요. 한국에서 개봉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죠. <500일의 썸머>는 영화 자체가 너무 귀엽지 않나요? 톰과 썸머를 연기한 조셉 고든 래빗과 주이 디샤넬도 너무 귀여웠구요. 어떻게 보면 슬프고 구질구질한 이야기인데 영화적인 효과나 편집, 배우들의 연기가 굉장히 상큼한 영화를 만든 것 같아요.”

똑같은 점, 똑같은 치열, 똑같은 버릇. 연인이 가졌던 모든 장점은 이별하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이별 후 그것들은 고스란히 나를 차 버린 이를 욕하고 원망하는 재료로 쓰인다. 썸머(주이 디샤넬)와 헤어진 후 여자와 사랑과 인생을 부정하던 톰(조셉 고든 래빗)의 갱생기를 MTV스럽게 풀어냈다.



5. <라 비 앙 로즈> (La Mome)
2007년 | 올리비에 다한

“위대한 아티스트들은 그 분야가 음악이든 연기든 그림이든 글이든 다 비슷한 공통점이 있어요. 그렇게 엄청난 재능을 뽑아낸 만큼 그 이면에는 어두운 인생이 있다는 거요. <라 비앙 로즈>의 에디트 피아프 역시 그랬죠. 인생도, 사랑도 늘 비극적이었으니까요. 그분은 노래를 하는 분이지만 배우는 온몸으로 노래를 하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아티스트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에 흥미를 느끼고 좋아해요. 그리고 배우로서 한 캐릭터의 평생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너무나도 큰 행운이죠. 배우 인생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그런 캐릭터를 꼭 맡고 싶어요.”

살아온 인생 자체가 작품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프랑스의 가수 에디트 피아프가 그랬다. 거리에서 태어나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연명하던 그녀가 최고의 가수가 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의 비극까지 <라 비앙 로즈>는 ‘장밋빛 인생’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던 한 여자의 인생을 들려준다.




“아주 나중에는 나이 들어서 글을 쓰고, 인세 받으면서 살면 참 멋있을 거 같아요. (웃음) 즐거운 상상이라고 이름 붙인 앞으로의 계획에도 포함된 건데, 70-80대까지 어떻게 살아갈지 꿈꾸고, 상상해봤어요. 그 때가 되면 작은 오두막 같은 집에서 자식들도 다 독립시키고 남편하고만 있을 거 같아요. 전 조그마한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을 거 같고, 남편은 옆에서 채소밭을 가꿔도 되고 집에서 뭔가 만들어도 되고. 그렇게 둘이서 오붓하게 있는 걸 상상해봐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의 그녀는 임수정의 먼 훗날 꿈과 가깝게 살고 있다. 결혼한 지 5년이 넘었고, 커피를 잘 끓이는 배려심 많은 남편(현빈)이 곁에 있다. 여자는 서재에서 일을 하고, 남자는 지하실에서 작업을 한다. 그렇게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함께 일하며 살아가던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이별을 맞게 된다. 다른 사람이 생겨 집을 떠나겠다고 담담히 말하는 여자. 그녀는 어쩌면 당신이 보아왔거나 상상했던 임수정과 가장 동떨어져 있을 것이다. 천방지축이었던 지우보다 더. 그러나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추억을 더듬고, 상처를 다독이는 그녀에게서 진짜 임수정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