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의 ‘명탐정’을 연기하는 김명민의 모습은 낯설다. 농담을 일삼고, 여자를 밝히며 상대방의 신분에 따라서 말투가 휙휙 바뀌는 쾌활한 조선시대 탐정이 김명민이라니. 그러나 그는 탐정의 허술한 면모와 번뜩이는 재기를 화면 위에 새기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의 코미디 연기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도하는 오달수의 그것처럼 본능적이진 않을 수 있다. 대신 카이젤 콧수염을 씰룩이며 미묘한 타이밍으로 관객들의 웃음이 터지는 순간을 잡아채는 김명민의 연기는 이 유래 없는 조선 탐정이란 캐릭터를 관객에게 납득시킨다. 다시 말해 그는 또 한 번 배역의 삶을 살아내는데 성공했다.
삶과 연기가 동기화되는 지점까지 전력 질주하는 김명민에게 연기의 장르를 묻는 질문은 그래서 무의미하다. “배우는 연기에 어떤 한정된 장르를 두지 않아요. 영화는 장르를 나눌 수 있지만, 연기는 장르를 나눌 수 없거든요. 코믹연기, 스릴러연기, 공포연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자신의 필모그래피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곡들을 추천하며 그는 “내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 노래들”이라고 표현했다. 연기와 삶이 둘이 아닌, 배우이자 구도자인 그이기에 가능한 추천의 변일지 모르겠다.
누구보다 치열했던 장준혁의 삶을 상기시키는 <하얀거탑>의 O.S.T는 김명민에겐 매우 각별한 앨범이다. “오로지 탑만 보고 가려고 했던 인간의 욕망과 숭고함, 그러나 탑 위에 오른 뒤에 느끼는 허무함까지. 인생의 모든 게 한 곡에 다 들어 있는 거 같아요. 전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아직도 눈물이 나요.” 김명민은 이시우가 작곡한 메인테마 ‘하얀거탑’을 추천하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묵직하게 울리는 팀파니의 박자에 맞춰 곡의 베이스를 잡아주는 현악파트와 위풍당당한 관악파트가 근사하게 어울리는 ‘하얀거탑’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다. 어느 한 곡만을 편애할 수 없었던 김명민은 같은 앨범에서 한 곡을 더 추천했다. “‘B Rossette’도 너무 좋죠. 치열함 뒤에 밀려오는 외로움이 잘 드러난 곡이에요.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씨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고요.”
“제 입으로 제 드라마 O.S.T가 좋다고 말하기도 참 그런데. 하하” 난처한 듯 웃으면서 김명민이 추천한 두 번째 앨범은 드라마음악가 이필호가 작업한 <베토벤 바이러스 O.S.T>다. “이 ‘마지막 콘서트’라는 곡은 강마에가 베토벤의 ‘합창’을 지휘하고, 마비가 되어가는 손을 부여잡은 채 지휘자실로 돌아와 쓰러질 때 나오는 음악이에요. 그 때 제 상황도 똑같았단 말이죠. 실제 연주자들 앞에서 지휘를 했는데, 2박 3일을 샌 상태에서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강행군으로 찍었어요. 그래서 다음 장면을 채 찍지도 못 하고 집으로 실려 오다시피 했어요. 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탈진이었죠.” 아직도 김명민을 찌릿하게 만든다는 ‘마지막 콘서트’는 고된 피로 끝에 누리는 뿌듯한 성취감을 잘 보여주는 곡이다.
김명민의 추천은 자연스럽게 강마에를 탈진하게 만든 베토벤의 ‘합창’으로 옮겨 갔다. “‘합창’을 1악장부터 4악장까지 1시간 10분 동안 지휘한다는 건 그야말로 모든 것을 필요로 하는 일이에요. 카라얀조차도 폐인이 되실 지경이었으니까요. 베토벤의 모든 곡이 다 위대하지만, 그 중에서도 9번 교향곡은 모든 게 다 축약되어 있는 곡이지요.” 김명민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4악장 대신, 환희와 기쁨의 송가로 나가기 직전의 3악장을 추천했다. “3악장은 베토벤이 ‘천국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고 말할 정도로 아름다운 악장이에요. 너무 너무 아름답죠.” 김명민은 특별히 현악기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다이나믹한 음향으로 베토벤의 홀수 교향곡들에 강한 카라얀이 지휘한 버전을 추천했다. 카라얀의 지휘와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만나는 3악장은 김명민의 말처럼 평화롭고 아름답다.
김명민이 엔니오 모리꼬네의 ‘Gabriel`s Oboe’를 추천한 것도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KBS <해피선데이> ‘남자의 자격’ 합창단의 도전곡 ‘Nella Fantasia’로 더 잘 알려졌지만,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불만과 불신으로 강마에를 따르지 않던 오합지졸 석란시향을 하나로 만들어 낸 곡이 바로 ‘Gabriel`s Oboe’이기 때문이다. “박자 맞추고, 음 안 놓치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내가 관객에게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느냐, 그 마음, 느낌”이라는 강마에의 가르침은 극 중 인물을 오롯이 살아내는 김명민의 연기와도 그리 멀지 않다. 강마에가 지휘만으로 단원들을 잠시나마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새로운 세계, 넬라 판타지아의 세계”로 인도하는 이 장면은, 강마에가 처음으로 독설이 아닌 지휘만으로 단원들을 설득해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클래식과 연주곡으로 가득한 김명민의 추천 리스트의 마지막 곡은 의외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다. 그가 중학생 때부터 가사를 다 외워 불렀다는 ‘My Way’의 가사는 황혼에 도달한 프랭크 시나트라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친구들을 향해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노라 고백하는 내용이다. 까까머리로 ‘My Way’를 부르는 중학생이라니. “물론 느낌이 좀 다르죠. 중학생이니까 뭐 가사 내용을 알기를 했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던 시기에 노래 제목과 멜로디가 제 가슴을 후벼 팠던 거죠. 제가 프랭크 시나트라를 흠모하기도 했고요.” 초등학교 때부터 취미삼아 들어 간 연극반 활동 이후 지금까지 연기 외길만을 걷고 있는 김명민이라면, 중학생 때 ‘My Way’를 불렀다 해도 크게 이상하진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저는 어느 촬영장에 가도 즐거워요. 그게 유쾌하고 밝은 즐거움이냐, 아니면 뭔가를 극복해냈을 때 즐거움이냐의 차이는 있겠지만요.” 배역이 요구하는 육체적, 정신적 도전까지도 즐거움이라 표현하는 이 남자의 변신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알 수 없지만 그가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나설 때마다 관객과 시청자 역시 전에 없던 새로운 즐거움을 그의 연기를 통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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