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러스의 양시온, 유승범, 김재욱, 김태현. (왼쪽부터)


첫 번째 싱글이 나오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말에 월러스의 김재욱(보컬, 기타)은 “결국 했다는 게 중요한 거”라며 웃었다. 서울예대 실용음악과 동기와 선후배 사이로 2002년 처음 만난 이들이 함께 밴드활동을 시작한지는 어느새 10년이 가깝다. 그 사이 김재욱은 모델과 연기자로 활동했고 김태현(드럼)은 스무 개 이상의 밴드를 거쳤으며 유승범(기타)은 밴드와 가요 세션으로 경력을 쌓았다. 브레멘의 멤버였던 양시온(베이스)이 제대해 합류하면서 가속이 붙었고 드디어 올해 초, 이들은 첫 싱글 앨범 < WALRUS >를 내놓았다. 그럭저럭 서른 줄이 코앞인 신인 밴드, 그러나 여전히 서두르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음악을 하겠다고 말하는 네 명의 록키드, 월러스를 만났다.
처음 가까워진 계기가 궁금하다. 인간적으로 친해져서 음악적인 것들을 공유하게 된 건지 혹은 그 반대 순서였는지.
양시온
: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당시 실용음악과 분위기는 재즈나 퓨전 재즈, 애시드 같은 장르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우리 넷은 다른 사람들이 많이 하는 음악보다 좀 더 오래된 록 같은 걸 좋아하다 보니 더 쉽게 친해지고 공유하게 된 것 같다.

“죽어라 하는 타입이 아무도 없다”



유승범 “멜로디가 예쁜 음악을 좋아한다”


김재욱 “이들과 하는 밴드 = 내가 하는 음악”
같이 밴드를 해 보자는 논의는 계속 있었던 것 같은데 구체화된 타이밍은 어떻게 결정된 건가?
김재욱
: KBS <바람의 나라>가 2009년 1월에 끝났는데 태현이 형이 그 몇 달 전부터 내 집에 살고 있었다. 당시 형이 히피처럼 자기 집을 두고 남의 집에 며칠씩 묵으면서 돌아다니던 시절이었는데 우리 둘 다 그렇게 될 줄 몰랐지만 그 후로 1년 반을 같이 살았다.
김태현 : 집이 넓었다. (웃음) 어느 순간 매트리스도 생기고 내 방도 생겼고.
김재욱 : 나는 원래 혼자 있는 시간이 굉장히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인데 태현이 형은 같은 공간에 있어도 혼자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라 같이 살아도 문제가 없었다. 그 때부터 쉬면서 그동안 못 다한 얘기를 많이 했다. 같이 어울리는 것과 얘기를 나누는 건 다른 건데, 그 때 정말 많은 얘기를 나눴고 그러던 중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참여 요청이 들어왔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알고 지낸 시간이 긴 만큼 본격적인 결과물을 빨리 내고 싶은 욕심도 있었을 텐데 그 사이 데모 작업 같은 걸 좀 해 두었나?
김재욱
: 조금씩 깔짝깔짝 하긴 했지만 ‘언젠가 기회가 오면 확 보여줘야지!’ 하고 미친 듯 준비한 건 아니다.
김태현 : 우린 게으르다. (웃음)

혹시 그렇게 했으면 월러스가 오래 유지될 수 없었을까?
김재욱
: 그렇게 죽어라 하는 타입이 아무도 없다. 발등에 불 떨어져도 한쪽 발이 다 타야 좀 움직이지 그냥 불 떨어졌다고 움직이는 타입은 아니다. (웃음)
김태현 : 왜 죽어라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물론, 진지하지 않다는 건 아니고. 변명 같지만. (웃음)
양시온 : 내가 군대 가기 전에 들어왔다면 아마 그 사이 못 참고 나왔을 것 같다. 난 성격이 급하고 좀 빨리빨리 해야 하는 사람이라 2년을 기다리진 못했을 거다. 그래서 내 입장에선 제대하고 들어온 게 시기적으로 좋았다.

다양한 활동과 여러 밴드를 거쳤는데 월러스의 어떤 점이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오게 된 이유가 됐나.
김태현
: 무엇보다 함께 하는 게 즐겁기 때문이다.
김재욱 : 다른 멤버들이 음악을 하는 사이 나는 모델과 연기 일을 했는데 언젠가 음악을 한다고 할 때 이 사람들이 아닌 멤버나 다른 형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 사람들과 하는 밴드 = 내가 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이 멤버들이 다른 밴드를 하다가 그게 아무리 커지고 성공하더라도 내가 ‘이제 밴드 시작하자’고 하면 와줄 걸 알고 있었다.

솔로로 좋은 세션들을 데리고 월러스 같은 음악을 할 수 있다 해도 중요한 건 월러스라는 밴드인 건가?
김재욱
: 월러스 ‘같은’ 음악은 할 수 있겠지만 월러스의 음악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

“가사든 곡이든 최대한 날것을 좋아한다”



양시온 “오래된 록을 좋아한다는 계기로 친해졌다”


김태현 “토미 리를 좋아하지만 퇴폐적이지는 못하다”
하지만 친구로 즐겁게 지내는 것과 음악을 함께 만드는 밴드활동은 좀 다른 영역 같다. 좋게 말하면 의견을 주고받고, 나쁘게 말하면 고성이 오갈 수 있는 부분인데 이번 싱글을 준비하는 과정은 어땠나.
김재욱
: 각자 좀 다르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나 같은 경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다른 멤버들이 알아서 잘라 내거나 부각시킬 부분을 잘 조정하고 정리해주기 때문에 이번 싱글은 그런 식으로 작업했다. 나머지 멤버들은 내내 죽으려고 했을지 모르지만. (웃음) 이 세 사람은 날 맘껏 뛰어놀게 해 준다.
양시온 : 100% 의견이 맞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다들 ‘이건 좀 아닌데’ 하는 생각들은 해봤을 거다. 하지만 누가 의견을 냈던 간에 결과물을 들어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에 크게 부딪힐 일은 없었다. 넷 다 지향하는 바와 목표가 확실했기 때문에.

목표라면 어떤 건가.
양시온
: 멋있는 거? (웃음)

어떤 게 멋있는 거라고 생각하나. 싱글에 수록된 세 곡의 스타일도 모두 다른데, 어떤 ‘멋있는’ 걸 추구하고 싶었나.
김재욱
: 어떤 밴드의 곡을 들었을 때 ‘리프가 멋지다, 보컬이 좋다, 구성이 뛰어나다’ 같은 분석을 떠나 그 음악에서 나오는 에너지 자체가 주는 영향력이라는 게 있다. 우리도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건 그거다. 하지만 결국 뭐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지는 모르고, 우리 넷이 음악이란 필터를 통해 그 에너지를 만들어보고 싶은 거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록음악에서만 느낄 수 있는 폭발력, 저항이나 시스템에 대한 반항 같은 걸 21세기 들어 서른 가까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려고 한다.

그런 부분을 가사에서도 많이 고민했을 것 같다.
김재욱
: 가사든 곡이든 최대한 날것을 좋아한다. ‘서울마녀’ 같은 경우는 좀 예외적으로, 제목부터 지은 다음 승범이 형이 써온 곡에 맞춰 말랑말랑하고 예쁜 가사를 써본 경우다. ‘To be’나 ‘모자이크’는 가사가 너무 어렵다고도 하는 분들도 있고 나는 정말 명확한 주제를 가지고 썼는데 해석을 다들 다르게 하는 분들이 있으니까 재미있다. 내 의도를 알아주지 않는 데 대한 답답함보다는 결과물을 받아들이는 게 이미 내 힘이 지배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걸 많이 느낀다. 그래서 더욱,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쓰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To be’ 같은 경우 약간 너바나의 < In Utero > 앨범에 수록된 ‘Radio Friendly Unit Shifter’의 오마주 느낌이 들기도 한다.
김재욱
: 너바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밴드다. 크면서 다른 음악을 많이 들었는데도 내가 뭔가를 만들어낼 때는 기본적으로 너바나 같은 리프나 멜로디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 아직까지는.

특히 처음 읊조리는 부분에서 이펙터를 걸어 정제되지 않은 느낌이 인상적이었다.
김재욱
: 다른 곡들은 철저하게 모든 단계를 차례로 거쳐 녹음했다면 ‘To be’는 리프와 구성만 만들어놓은 채 멜로디와 가사는 녹음하면서 애드리브 식으로 만들었다. 합주를 열 번도 안 해 보고 바로 녹음했는데 그게 오히려 이 곡의 매력을 살리는 데 훨씬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모든 곡의 ‘작곡’에 대한 표기가 ‘월러스’로 되어 있다. 전부 공동 작업으로 만드나?
김재욱
: 물론 곡마다 모티브나 아이디어를 가져온 사람은 다 다르다. 이번 싱글의 ‘서울마녀’는 승범이 형, ‘모자이크’는 태현이 형, ‘To be’는 내가 메인 라이터라 할 수 있는데 이 곡들은 각자의 성향을 굉장히 친절하게 대변해주는 편이다. 우리도 만들고 나서 그걸 느꼈다.

특히 ‘서울마녀’는 다른 두 곡과 굉장히 다른 느낌이다.
유승범
: 아기자기하거나 멜로디가 예쁜 음악을 좋아한다. 그래서 록도 시끄럽다고 생각되는 사운드보다 8,90년대 팝적인 록을 좋아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세 곡을 같은 싱글에 넣기로 했을 때는 하나의 앨범 안에서 사운드의 균형을 무시할 수는 없는 거니까 신경을 좀 썼다. 내가 기타를 연주하지만 기타가 음악의 주가 되는 게 아니라 음악에 기타를 맞춰야 하는 것처럼.

일단 메인 라이터의 손을 떠나면 곡이 완성되는 과정은 어떤가.
김태현
: 밴드들은 보통 그렇겠지만 합주를 하면서 한다. 자신의 포지션을 중심으로 서로에게 어드바이스를 해 주면서 모니터하고 넣었다 뺐다 하며 살을 붙인다.

사실 밴드를 직업으로 한다는 건 생계와 연관되는 문제이기도 한데 월러스의 록킹한 사운드는 요즘 인디 신의 ‘말랑말랑한’ 음악과는 거리가 먼 편이다. 하고 싶은 음악과 소위 ‘팔리는 음악’ 사이의 갭에 대한 부담도 있나.
김재욱
: 없진 않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 아무리 고민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냥 믿고 가는 방법밖에 없는 거 같다. 굳이 말랑말랑한 음악에 대해 좋다 안 좋다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들이 그런 걸 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하고 싶은 걸 보여줄 뿐 큰 의미는 없다. 그리고 우리 색깔이 바뀌게 되면 이 팀 자체의 의미가 사라질 거다.

“태도 같은 면에서는 오히려 커트 코베인을 닮고 싶다”



월러스라는 밴드 명을 짓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김재욱
: 그냥 진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처음 모였을 때부터 월러스였나?
김태현
: 아니다. 별별 이름이 다 있었다. 하지만 뭔지 말씀드릴 수는 없다. (웃음)
유승범 : 다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너무 많았다.
김재욱 : 2009년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에 나가는 게 결정되면서 오피셜한 밴드명이 필요해 졌는데 어느 날 자려고 누웠다가 비틀즈의 ‘I`m the Walrus’라는 노래가 떠올라 태현이 형에게 물어보니 괜찮다고 해서 결정했다. 이를테면, 처음 ‘동방신기’라는 팀이 나왔을 때 사람들 반응은 무슨 이름이 저러냐, 왜 멤버 이름이 네 글자냐 하는 식이지 않았나. 하지만 지금 동방신기라는 이름에서는 ‘굉장히 멋있는 아이돌 그룹’,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아이돌 그룹’, ‘아무도 못 하는 걸 해낸 아이돌 그룹’ 같은 문구들이 막 떠오른다. 즉, 결과적으로는 그 팀으로 어떤 활동을 하느냐에 따라 이름의 무게가 달라지는 거기 때문에 이름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사실 월러스만큼 마음에 드는 밴드 이름은 처음이다.

요즘은 작업을 어떤 방식으로 하나.
김재욱
: 그 사이 내가 이사를 한 번 하면서 태현이 형도 독립을 했는데 올 겨울이 너무 춥다 보니 잠시 우리 집에 들어와 살고 있다. 시온이도 지금 우리 집에서 지내고. 각자 방도 있고 침대도 있는데 셋이 같이 있지는 않고 각자 방에서 뭘 하다가 모일 일 있으면 식탁에 모인다.
양시온 : 방에서 혼자 드라마를 보거나 하다가 갑자기 리프가 생각나면 기타 들고 나와서 들려주고 하는 식이다.

셋이 같이 살면 식량 조달은 누가 하나?
김재욱
: 아무래도 내가 호스트니까.
김태현 : 원래 주인이 하는 거니까. (웃음)
양시온 : 같이 산다기보단 우린 손님이니까. (웃음)

최근 일본에서 열린 김재욱의 팬 미팅에서 미니 콘서트에 가까운 공연을 했다고 들었다. 사실 그 자리에 온 관객들은 월러스의 음악을 낯설어하는 편이었을 텐데 어땠나.
김재욱
: 내가 월러스 활동을 그리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기자, 혹은 모델 김재욱의 이미지를 가지고 나를 보러 와 주신 분들이 99%였을 거다. 그런데 월러스의 나는 그 이미지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니까 어떤 반응이 있을지 예상해 봤는데 딱 그렇게 됐다. 처음엔 “와~~~!” 하다가 나중에는 “…와…” 이런 느낌? (웃음) 그걸 실제로 보니까 정말 재미있었다. ‘미안해요. 이게 진짜 나에요. 노래할 때 나는 이래요’ 라는 마음으로 편하게, 있는 힘껏 보여드린 것 같다. 아, 그렇다고 다른 때가 가짜 나는 아니지만.

혹시 닮고 싶은 로커의 이미지 같은 게 있나.
김태현
: 머틀리 크루의 토미 리를 좋아하는데 내 본성이 그렇게 퇴폐적이지는 못하다. (웃음) 태도 같은 면에서는 오히려 커트 코베인을 닮고 싶지만 우린 또 그렇게 대놓고 망나니는 아니다. 어릴 땐 그렇게 되고 싶기도 했지만 한국에서 그러다간 죽도 밥도 안 될 수가 있는데 난 이민 갈 형편도 안 되고. (웃음) 그래서 혼자 삭히고 음악 할 때 보여주는 정도로 할 생각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도 엄격한 잣대가 들이대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김재욱
: 바로 그런 게 재미있어질 거다. (웃음) 이건 섹스나 드럭, ‘로커는 이래야 돼’ 라는 문제가 아니라 음악으로 내가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가에 대한 문제다. 커트 코베인이 기타로 사람 머리를 찍은 것도, 마릴린 맨슨이 닭을 뜯어먹은 것도 자신의 음악을 표현하는 시각적 퍼포먼스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표현하고 싶은 분노나 저항심이 있다면 보여주고 싶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내가 한국에서 계속 배우를 할 수는 있을까 궁금하다. (웃음) 어쨌든, 월러스를 하면서는 최대한 솔직하려고 한다.

상반기 중 발매 예정인 정규 앨범은 어떤 느낌일까.
김재욱
: 지금 곡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번 싱글이 ‘우리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라는 단계라면 첫 번째 앨범은 월러스의 제대로 된 인트로듀스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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