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신은 한 인터뷰에서 “보드카레인은 주류 무대에서도 곧바로 통할 수 있는 인디밴드 중 한 팀”이라고 말했다. 이미 준비된 밴드라는 뜻이다. 안승준(보컬), 이해완(기타), 주윤하(베이스), 서상준(드럼)으로 구성된 4인조 모던록 밴드 보드카레인은 2005년에 데뷔한 이후 쉴 새 없이 달려오며 총 7장의 앨범을 발매했고 매년 어쿠스틱 공연 ‘로맨틱 보드카레인’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달에는 서울-도쿄 사운드브릿지 공연의 첫 단추를 꿰면서 일본 무대에까지 발 도장을 찍었다. “인디밴드의 대중화를 위해 우리가 가장 멋있게 잘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 이 부지런한 밴드가 지난 11월 9일, 3집 < Faint >를 발매했다. 그동안 20대가 겪고 있는 정신적인 사춘기를 노래하던 그들은 새 앨범에서 지난 5년 동안 겹겹이 쌓인 감정들을 바탕으로 “잊혀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성숙하게 담아냈다. 앨범과 밴드 모두 마치 속이 꽉 찬 열매처럼 느껴진 보드카레인과의 인터뷰를 공개한다.지난 달, 서울-도쿄 사운드브릿지 공연을 통해 일본 무대에 서 본 소감이 어떤가.
서상준: 항상 꿈꿔왔던 무대였기 때문에 잘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설레는 마음으로 갔다. 지금까지도 트위터를 통해 응원해주시는 일본 팬들이 있을 정도로 예상보다 반응이 좋았다.
안승준: 처음에는 가사를 영어로 개사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한국말로 불렀다. 멜로디와 목소리만으로 일본 관객 분들과 교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은 국경을 초월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걸 실제로 경험해보니 신기했다.
“이번 앨범은 감정의 변화들을 가장 잘 반영한 앨범” 일본 공연을 통해 얻은 게 있다면.
안승준: 국내 팬들은 우리 공연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아무래도 기대하는 부분이 있다. 아직까지 ‘100퍼센트’를 원하시는 분도 많고. 근데 일본 공연에서는 우리가 하고 싶은 곡들을 불렀다. 이번 앨범에 수록된 ‘보고 싶어’는 조용한 노래라 라이브로 불렀을 때 괜찮을까 걱정했는데, 관객들이 집중하시는 모습에 우리까지 빨려 들어갔다. 이제 어떤 무대에서도 ‘보고 싶어’를 자신 있게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서상준: 함께 공연했던 피아노잭(→Pia-no-jaC←), 오또(8otto)와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 무대를 통해 얻은 게 있다면, 밴드와 밴드간의 우정이다.
공연을 마치고 다 같이 뒷풀이를 했을 텐데, 일본 뮤지션들도 동참했나.
안승준: 다 같이 마셨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You like? 이런 식으로 영어를 주고받았는데, 술 취하니까 다 똑같더라. (웃음)
이해완: 나중에는 영어, 한국어, 일본어 다 튀어나오고. 심지어 상준이는 잠꼬대도 일본어로 했다. (웃음)
얼마 전 3집 앨범 < Faint >를 발매했다. 지난 앨범들과 비교해보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는데 전체적으로 어떤 얘기를 하고 싶었나.
안승준: 우리는 항상 앨범을 낼 때 그 시기에 하고 싶은 얘기들을 해왔다. 1집 때는 사춘기적인 감성이 남아있는 20대 후반을 이야기했고, 2집에서는 이제 막 인디계에 뛰어든 사회 초년생 같은 에너지를 보여줬다. 이번 앨범에서는 잊혀져가는 것들을 우리만의 방식으로 남기고 싶었다. 음악으로 남겨놓지 않으면 영영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 같은 얘기들.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기억’인데, 스토리텔링을 의도한 건가.
안승준: 감정의 흐름을 잘 배치하고 싶었는데, 그 작업이 의외로 수월했다. 1번 트랙 ‘지금, 여기’는 자신의 위치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고, 2번 트랙부터는 기차를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 중에서도 타이틀 곡 ‘기억의 꽃’은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다가 마지막 트랙 ‘우리는, 거짓말처럼’을 부르면서 이 모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잊혀지겠지만 분명 존재했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고 얘기한다.
주윤하: 이번 앨범은 감정의 변화들을 가장 잘 반영한 앨범이다. 멤버들끼리 이런 얘기를 하자고 약속하지 않았음에도 어느새 하나의 얘기를 하고 있더라. 곡 순서를 정하고 보니까 우리가 표현하고 싶었던 감정의 선들이 정확히 흐르고 있었다.
그런 흐름 속에서 ‘보고 싶어’는 감정의 클라이맥스를 보여주는 곡이다. 가사도 잔인하고, 보컬까지 후반부에서 질러주고.
안승준: 상당히 질러야 되는 음역대인데, 그렇다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건 지양하는 편이다. 그래서 프로듀서와 멤버들의 조언을 받으면서 적정한 선을 잡아 녹음했다. 그런 예민한 작업들이 가장 집중력 있게 녹아든 앨범이다. 가사도 ‘보고 싶어 너의 눈물을. 죽을 만큼 슬픈 너를’처럼 굉장히 잔인한데, 개인적으로 이중적인 감정에 관심이 많다. 괜찮다고 말하는데 그게 진짜 괜찮은 건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과연 이해인지 포기인지.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말이 쿨하게 들리지만 사실 그 안에는 어마어마한 의미가 있는 거니까.
다른 곡에서도 지르는 창법을 많이 쓰는데 보컬 녹음을 할 때는 어떤가.
안승준: 내 창법이 원래 그렇기도 하고 또 좋아하는 음역대이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다. 다만, ‘그 어떤 말로도’는 스토리텔링이 강한 곡이라 너무 지르면 자칫 신파로 흐를 수 있는 곡이다. 그걸 절제하는 게 좀 힘들긴 했다.
“일본 공연 갔을 때도 맥주 많이 먹었다” ‘그 어떤 말로도’는 루시드 폴이 작사하고, 장윤주가 피쳐링에 참여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참여하게 된 건가.
안승준: 요즘 인디 뮤지션들끼리 협업하는 게 이슈인데, 폴 형은 워낙 다른 뮤지션들에게 가사를 많이 주신다. 어느 날 우리와도 그런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린 그런 말 절대 잊지 않거든. (웃음)
이해완: 정작 형은 “내가 그랬나?” 이러시고.
안승준: 윤하가 ‘그 어떤 말로도’ 스케치 작업을 해왔을 때, 멤버들끼리 이 곡은 스토리텔링이 강하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사실 내부 사람이 스토리텔링을 만들면 관습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외부인에게 부탁하고 싶었고, 폴 형에게 부탁하면 재밌는 곡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폴 형이 “내가 쓴 곡 중에 가장 높이 올라가는 곡”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감정을 폭발시킬지 많이 고민하셨다고 하더라. 여자 보컬은 마치 가상의 소녀가 부르는 듯한 느낌을 원했는데, 장윤주 씨 목소리에 날 것의 느낌이 많이 묻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안을 드렸다.
그렇게 절절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곡들 사이에서 ‘심야식당’은 한 템포 쉬어가는 곡이 아닐까 싶다. 분위기도 상대적으로 밝은 편이고.
안승준: 과거로 가는 와중에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웃음)
주윤하: 처음에 ‘심야식당’을 넣을 땐, 전체적으로 어둡게 가는 데 갑자기 들뜨는 건 아닐지 걱정했다. 하지만 슬픈 영화가 계속 눈물을 강요하면 오히려 슬프지 않은 것처럼, 어느 정도 감정을 달래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가사가 재밌더라. ‘우리 사이, 아 shy’ 대목은 언뜻 들으면 아사히 맥주로 들린다.
안승준: 맥주를 마셔서 기분도 좋고 누군가가 보고 싶은 상태를 노래한 곡이다. 그래서 ‘우리 사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었고, ‘아사히’라는 단어로 장난도 치고 싶었다. 사실 내가 아사히 맥주를 좋아한다. 하하. 그 맥주를 먹을 때 행복지수가 높아진다.
이해완: 근데 워낙 비싸서 여유로울 때만 마실 수 있다.
안승준: 자주 못 마시니까 마실 때 행복한 거지. (웃음)
이해완: 이번에 일본 공연 갔을 때도 맥주 많이 먹었다.
안승준: 일본에는 어느 술집에나 ‘2시간에 술 무한정’이라는 옵션이 있다. 멤버들 모두 신선한 맥주를 좋아하기 때문에 주인이 “마지막 주문”이라고 말하면, 각자 잔이 차 있어도 막 “20잔, 20잔!”이라고 질렀다. (웃음) 다들 500cc 열 잔 씩은 마신 것 같다.
대체로 곡 작업은 어떻게 이뤄지는 편인가.
안승준: 우리는 주로 멜로디를 먼저 만들고 그 위에 가사를 붙이는 편이다. 윤하와 해완이가 멜로디를 만들어 오면 그 멜로디가 주는 메시지를 파악한 다음 생각나는 단어를 떠올려본다. 3집 앨범을 만들 때도 적절한 단어를 찾는 과정에서 협업을 굉장히 많이 했다. 계속 브레인스토밍 하고.
7장의 앨범을 만들면서 그런 조율 작업에 변화가 있었나.
안승준: 효율성 측면에서는 미스커뮤니케이션이 조금씩 없어지고 있다. 이렇게 수월해지는 부분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방법도 모색하고 있다. 소통이 효율적이라고 해서 결과가 항상 좋은 건 아니니까.
이해완: 매 앨범마다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해서 작업 시간이 단축되는 건 아닌 것 같다. 부담감은 매번 생긴다.
“정당한 수익구조가 있어야 뮤지션에 대한 인식도 바뀐다” 5년 동안 쉬지 않고 앨범을 만들면서 밴드가 발전하고 성숙해지는 동안, 인디밴드 시장은 사실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일본 공연을 통해 느끼는 바가 많았을 것 같은데.
이해완: 일본에 가서 가장 부러웠던 건 아티스트에 대한 대우였다. 일본에서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존중받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딴따라 이미지가 강하지 않나. 그리고 서교음악자치회가 40개 인디 레이블 연합인데, 일본 쪽은 1400개 레이블 연합이라고 하더라. 인디밴드는 무려 7000개가 넘고. 시장이 커야 음악하는 사람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많아질 텐데 그런 부분이 좀 부러웠다.
주윤하: 물론 시장 규모의 차이도 원인이 될 수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구조적인 이유도 있다. 최근 음악 시장에서 떠오르고 있는 이슈 중 하나가 수익구조인데, 음악하는 사람이 정당한 수익배분을 받아야 음악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고 그래야 뮤지션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도 바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중들에게 인디밴드를 알릴 수 있는 통로가 점점 사라지는 게 현실이다. 가령, MBC 에 이어 KBS 까지 라이브 음악프로그램이 하나 둘씩 폐지되고 있다.
안승준: 안 그래도 며칠 전에 녹화를 하고 왔다. 그 땐 “역시 이런 음악 방송이 있으니 좋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며칠 뒤에 폐지 소식을 들었다. 문화 콘텐츠는 시장논리와는 별개로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지원해야 되는 분야인데, 시청률이 프로그램 존폐를 결정짓는 유일한 잣대가 된다는 게 당혹스럽다. 이런 프로그램에서는 뮤지션들이 어떤 개인기도 하지 않고 온전히 음악 얘기만 할 수 있어서 좋은데.
개인기?
이해완: 라디오나 예능 프로그램들. 특히, 라디오는 목소리만 나오니까 뭔가 준비해오는 걸 원하시더라. 심지어 콩트까지. (웃음) 얼마 전에 KBS 2FM 객원 DJ를 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 얘기만 해서 너무 재밌었다.
안승준: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이라도 남아있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 다른 방송들을 보면 인디 뮤지션이나 싱어송라이터를 불러놓고 아이돌이 하는 걸 똑같이 시킨다. 우리가 거기 나가서 개그를 해도 개그맨보다 안 웃길 거고, 첫사랑 얘기를 해도 멋진 배우가 하는 게 훨씬 잘 먹힐 거다. 우리가 멋있게 잘할 수 있는 걸 시켜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대중들도 인디뮤지션이나 싱어송라이터의 가치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싸이월드 클럽에 종종 올리는 ‘안승준의 추천음악’도 “잘 할 수 있는 것”의 일환인가.
안승준: 나름대로 팬들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뮤지션이 음악을 추천하는 거니까 팬이나 대중들이 더 귀를 기울인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좋은 음악들을 알려주고 싶다.
다른 멤버들은 어떤 식으로 소통을 하고 있나.
서상준: 최근에 만화를 업로드 하고 있다. 승준이 형은 글로, 윤하 형은 음악으로, 해완이 형은 사진을 통해 소통을 하고 있으니까 나도 뭔가 다른 방법으로 해보고 싶었다. 만화를 그리는 친구가 있어서 내가 소재를 던져주면 그 친구가 그려준다. 우리 밴드의 이야기를 만화로 보여주면 나름 소통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완: 사진을 좋아한 지 2~3년 밖에 안됐다. 근데 어떤 걸 좋아하면 거기에 푹 빠지는 성격이라 이번에 일본 우에노 동물원에 가서 실컷 찍고 왔다. 우리나라 고릴라는 항상 갇혀있고 화난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일본 고릴라는 표정도 밝고 막 활동적으로 움직이더라. 고릴라 사진을 많이 찍었다.
매년 ‘로맨틱 보드카레인’ 공연을 하고 있는데, 어떤 취지에서 기획하게 됐나.
안승준: 록 음악도 로맨틱하고 따뜻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신나게 달리고 에너지를 주는 것도 좋지만, ‘로맨틱 보드카레인’은 앉아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어쿠스틱 공연이다.
주윤하: 1년에 딱 한 번 하는 공연을 위해 모든 곡을 어쿠스틱 버전으로 편곡한다.
이해완: 3집 수록곡 중에서는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 ‘기억의 꽃’, ‘심야식당’, ‘보고싶어’, ‘Moment’ 등을 편곡할 예정이다. 특히, ‘Moment’는 매니악하게 접근한 곡인데 이번 공연에서는 놀랄 만큼 전혀 다른 스타일로 편곡해서 들려줄 계획이다.
그 밖에도 앞으로 해보고 싶은 공연이 있다면.
안승준: 아직 기획 단계에 있지만, 계속 콜라보레이션 기획 공연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게 어떤 조합이든 간에 이 안에서 새로운 걸 창출하는 작업이 흥미롭다. 솔로와 밴드를 조합할 수도 있고, 큰 무대가 아니라 작은 연극 무대에서 공연을 할 수도 있고. 루시드 폴 형과의 조합도 언제든지 기회만 노리고 있다. (웃음)
글. 이가온 thirteen@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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