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는 양심적인 건설자본가 강모(이범수)의 시선으로 70~90년대의 고도 성장 시기의 강남 개발사를 회고했다. 덩치 큰 악인들이 제 입맛대로 세상을 농락하는 어두운 시대에 맞서 조금이라도 죄를 덜 짓고도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던 청춘들의 이야기는 방송 초반 를 오해했던 사람들까지 돌려 세웠다. 그러나 통쾌한 카타르시스로 장식된 결말을 기대했던 시청자들은 허무한 표정을 거두지 못 하는 강모의 얼굴에 다시 한 번 당혹감을 느꼈다. 모두에게 해피엔딩을 선사했지만 정작 주인공이 행복한지에 대해서는 확언을 삼가는 이 냉정한 결말이 방영된 다음날, 유인식 감독을 만나 승리조차 모호한 세계에 대해 물었다.길었던 60화가 끝났다. 지금 기분은 어떤가.
유인식 감독: 내가 했던 드라마 중 가장 길고 힘든 드라마여서 갈수록 드라마를 파악하는 게 나조차도 버거웠다. 끝나고 나니 모든 감정이 썰물 빠지듯 쫙 나가는 거 같다. 요약하자면 시원섭섭 하달까. (웃음)
“상전벽해의 시대를 그리고 싶었다”
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유인식 감독: 장영철, 정경순 작가 두 분과 사극을 오래 준비하고 있었는데, 사정상 작품이 보류됐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차에 회사에서 창사 20주년이니 대하드라마를 제작하되, 시대극을 해 보라고 제안했다. 마침 사극을 준비하면서 “만약에 시대극을 한다면 이런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아이템이 의 강남개발사였다.
실제로는 전혀 다른 드라마였지만 처음에는 강남 개발을 옹호 내지는 합리화하는 드라마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었다.
유인식 감독: 강남 개발사라는 소재를 정했을 때, 건설이라는 직업군이나 당시의 정치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피한다면 제대로 이야기를 꾸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담이라면 오히려 작품에서 부정적으로 다뤄질 이들의 저항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컸다. 그랬으니 처음에 나왔던 반응들은 굉장히 의외였을 밖에. 하필 또 그 무렵이 ‘그건 오해다’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시점이었다. ‘오해’라는 단어 자체를 구사할 수가 없는 분위기였으니까. (웃음)
그 시대를 살았던 건설업자들이나 정치인들을 어떤 시각으로 그리고 싶었나.
유인식 감독: 새삼스레 뭔가 고발하겠다는 의지가 있던 것은 아니다. 다 아는 이야기니까. (웃음) 재벌이나 정치권을 어떻게 그리고 싶었다기보다는 상전벽해의 시대를 그리고 싶었다. 지금처럼 한계가 보이지 않는 그 개발광풍의 시대에, 욕망을 가진 인간이 어디까지 오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초반에 “이 드라마에 나오는 인명, 사건명, 지명은 허구입니다” 라고 자막을 띄웠던 것도 어느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국한시키지 말고 폭발적으로 개발이 진행 중이던 우리나라의 한 시대를 포괄적으로 봐주십사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런데 보편적인 캐릭터라고는 하지만, 조필연 역의 정보석은 말투나 외관이 전직 대통령을 연상시킨다는 얘기도 있었다. 혹시 부담이 되진 않았나.
유인식 감독: 군복과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첫 촬영에 나왔을 때 그런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 옷이 조필연이 입을 법한 군복인 걸 어떻게 하나. 큰 부담은 없었다. 우리 드라마에 나오는 악덕들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정도의 악덕들이 아니라, 보통 상식에서 보면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들이기 때문에. 설령 누군가 찔리더라도 그걸 왜 나쁘게 그렸느냐고 물어볼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웃음) 실제로 흔히 말하는 외압은, 적어도 제작진 쪽으로는 전달된 바가 없다.
권력에 대해 비판적인 묘사를 하는 부분이 많다. 특히 조필연은 어느 때나 권력을 통한 폭력을 쓴다. 누구든 수틀리면 죽여 버리고 어디론가 끌고 가는. (웃음)
유인식 감독: 조필연이란 인물이 어쩌다 보니 절대 악이 되었는데, 실제로 그런 인물이 누구였는지의 문제보다 중요한 건, 그 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내가 수틀리면 죽을 수도 있고 어디로 끌려가 보내질지도 모른다’는 내면화된 공포가 있었을 거라는 점이다. 그런 공감대가 없었다면 굳이 조필연을 그런 인물로 그리진 않았겠지. 그런 부분이 강력한 적인 조필연에게 강모(이범수)가 대항하는 것이 개인의 복수를 넘어서는, 사회적인 의미를 띄게 만들었던 거 같다.
는 강모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조필연의 역사이기도 하다. 조필연을 절대 악으로 설정한 이유가 있나.
유인식 감독: 조필연을 중심으로 악이 퍼지는 방식을 더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 보통 악의 창궐은 거래를 통해 일어나지 않나. “내가 너에게 뭘 해줄 테니 영혼을 팔아라”라는 식으로. 실생활에서도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기브 앤 테이크로 묶이듯이. 조필연이 자기편을 포섭하는 과정은 굉장히 신사적이고 합리적이다. (웃음) 상대가 필요한 걸 제시하며 거래를 제안하니까. 조필연은 1화에서부터 황태섭(이덕화)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황태섭이 강모의 아버지를 직접 죽이지 않았음에도 죄인이 되는 건 그 거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세상이 선과 악이 명료하다면 얼마나 편하겠나” 정보석이 이렇게 철저한 악역을 연기한 경우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유인식 감독: 연기 욕심이 말도 못 하게 많은 분인데, 악역을 제안하니까 뛸 듯이 기뻐하시더라. (웃음) 참고할만한 악역이 있느냐 물으시기에 영화 의 나치 장교 캐릭터를 살짝 언급하며 말끔한 계란 껍질 같은 외피 안에 빠직 하는 균열감의 위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드렸는데, 톤을 아주 잘 잡아 주셨다. 1회부터 60회까지 자세히 보면 목소리, 말투, 걸음걸이가 계속 변한다. 정말 대단한 퍼포먼스다.
정보석뿐만 아니라 남자 배우들이 기존의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남자 배우들의 캐스팅은 어떻게 이뤄졌나.
유인식 감독: 어느 정도는 양식화된 연기가 필요한 작품이었다. 세세한 디테일보단 장면을 장악하는 힘이 있어야 하고, 눈만 마주쳐도 불꽃이 튀어야 하니까 클로즈업을 잘 견디는 훈련된 연기자가 필요했다. 작가님들과 전작 에서 함께 작업했던 중견 연기자 분들을 베이스로 깔고 시작했다. 주연급들 캐스팅은 다 어려웠지만 민우 역이 특히 어려웠다. 악마의 아들이면서도 (웃음) 아버지의 방식에 동의하지는 않는 새 세대의 딜레마를 표현해야 하니까. 주상욱은 때부터 지켜봤는데, 꼭 그래픽 노블 속의 인물처럼 선이 굵고 얼굴의 각이 아주 멋있게 생긴 배우다. 게다가 발성도 좋고. 기대 이상으로 잘 해줬다.
조필연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남성 캐릭터가 선과 악 사이에서 흔들린다. 배우들에게 어떤 부분을 특히 부탁했나.
유인식 감독: 제일 어려운 게 강모였다. 강모는 혼자 악으로 깡으로 시대를 헤쳐 나가는 인물이니까. 이범수에게 순진하지 않은 선한 인물을 연기해달라고 주문했다. 악인의 수를 읽고 역이용도 하고, 그들 이상으로 독해지기도 하고. 강모는 억제하고 참고 있는 것이지, 천성이 유약하고 고지식해서 선한 행동을 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가끔 강모가 욱 하고 폭발하지 않나. (웃음) 특히 이런 류의 이야기는 주인공 자리가 조연보다 폭발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오히려 배우로서는 갈증이 더 많을 수도 있는데, 이범수가 참 잘 해줬다. 이범수도 이렇게 긴 드라마는 처음이라서 처음엔 스스로 고민도 많이 했다. 영화처럼 여러 테이크를 보면서 최적점을 찾을 만한 여유가 없으니까.
를 선과 악이 겹쳐 있는 세계로 바라본 이유가 있다면.
유인식 감독: 그것이 더 현실에 가까우니까. 세상이 선과 악이 명료하다면 얼마나 편하겠나.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용광로처럼 들끓는 격변의 시대였던 거고.
민우가 대표적인 경우 같다. 미주(황정음)를 사랑하면서도 이권에 있어서는 냉혹하다. 민우와 미주를 통해 다음 세대의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주려고 한 건가.
유인식 감독: 해답을 정해놨다기보다 해결이 불가능한 수준의 딜레마를 푸는 과정을 음미해보고 싶었다. 물론 미주는 민우를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래야만 할 것이라는 큰 귀결점은 정해놓고 시작했다. 강모도 조필연도 원래는 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다. 조필연은 성골이 아니라는 이유로 진급에서 물을 먹고 난 뒤, 꼭대기까지 올라가야겠다는 꿈을 꾼다. 그런데 이게 생사를 건 싸움이 되면서 이기는 것 자체가 욕망이 된다. 자신의 애초 목적이 뭐였는지 잊게 됐다. 결말에 나오는 강모의 회장실은 그의 꿈대로 서울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이 살 가족은 이미 없다. 싸우는 과정에서 잃어 버렸으니까. 그래서 미주나 민우를 통해서는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깨닫고 택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바뀐 시대의 새 출발을 하는 사람의 마인드라고 믿었다.
그러고 보면 여성, 또는 모성이 화해의 근원이 되는 것 같다. 정연(박진희)과 경옥(김서형), 미주가 남자들의 화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유인식 감독: 그 시대에는 여자들의 사회진출이 지금보다 활발하지 않았으니까, 격전지의 중심에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었던 면이 있다. 여자 캐릭터를 남자들의 결점을 감싸주고 치유해주는 존재로만 그리지 않으려 나름 애는 썼는데, 깊이 있게 그리지는 못 한 거 같아서 아쉽다.
하지만 의 여성 캐릭터들은 기존 시대극에 비해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똑똑하고 당찬 모습을 보여준다.
유인식 감독: 정연의 무대가 되는 사채시장도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있는 곳이었는데 상대적으로 많이 활용하지 못 했다. 에서 보듯 사채가 그 당시 국내 총생산의 굉장한 부분을 차지했었다. 사채 조직 간의 싸움과 알력을 그리긴 했지만 분량 조절을 하다 보니 그들의 활동 무대를 많이 그리지 못 했다. 박진희에게 미안했는데, 짧은 분량을 나와도 선명하게 각인되는 연기를 해줘서 고마웠다.
“강남 8학군에서 착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으로 살았다”
강모의 성공이 다소 우연에 기대거나, 보일러 전쟁에 발목이 묶인 채 늘어진다는 지적도 있었다. 60부작 드라마 안에서 호흡을 유지하면서 대중성을 확보하기는 어땠나.
유인식 감독: 그 무렵 건설업을 다루면서 빼놓지 말아야 할 게 해외 건설이다. 자료조사도 많이 해놨고. 그 쪽으로 가면 폼 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제작비 문제로 (웃음) 다룰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써먹을 수 있는 아이템이 보일러였다. 호흡 조절은 어려운 문제인데, 사업체간의 경쟁은 경쟁대로 벌어지고, 정치권에서는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가 연대기 순으로 진행되고, 멜로는 멜로대로 진행된다. 이 모든 게 하나로 묶이는 지점이 있었고. 이쪽에서 빨리 전환이 되어야 다른 쪽도 돌아가서 모든 걸 아우르는 최적점을 찾다 보니 내가 생각해도 찔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의 시대와 당신의 유년기가 겹친다, 어떤 학생이었나.
유인식 감독: 나도 강남 키드다. 강남 고속터미널 공사할 무렵에 어머니께서 강남으로 이사를 하셨고. 강남 8학군에서 착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으로 살았다. 그 무렵 내가 본 강남은 신기했었다. 잘 차려 입은 부잣집 애들이 등교하는 길에 개발 안 된 동네가 있고, 부잣집 아저씨 아줌마들이 다니는 성당 옆에 고아원이 있어서 고아들 보면 도망 다니고 그랬다. 어릴 땐 그런 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 하면서 자랐다.
갈수록 높아진 시청률이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유인식 감독: 처음 실시간 시청률 20%를 돌파한 시점이 다른 장면이 아니라 강모가 이한위 선배가 연기한 백수염파 두목의 수염을 뽑는 장면이었다. (웃음) 시청률이라는 건 그만큼 알다가도 모르겠는 지점이 있다. 어떤 시청자는 목숨 걸고 우주커플의 분량을 늘려달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우주커플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고 하고. 우리도 회의 때마다 반응도 살피고 고민하다가 결국 에라 모르겠다 하고 생각하던 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60부작 드라마를 이끌고 오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을 것 같다.
유인식 감독: 스태프들을 많이 믿게 됐다. 각 파트 별로 신뢰가 없으면 해결할 수 없는 사이즈의 드라마였으니까. 다른 부분은 스태프들을 믿고, 연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법이랄까. 결국에는 연기와 그 장면의 뉘앙스를 결정하는 일이 내 일이더라. 시간 대비 퀄리티를 뽑아내는 것에 있어선 대한민국 스태프들은 세계 최고다. 스태프들에게 공식 홈페이지에 감사의 인사를 적어놓고 정작 마지막 방송은 러닝타임이 오버되는 바람에 스태프 스크롤을 못 올렸다.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에서 묘사한 그 시대를 어떻게 생각하나.
유인식 감독: 가 시작한 시점이 와우아파트가 무너진 70년도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것으로 끝난다. 속도도 빨라지고 외피도 근사해졌지만, 핵심은 달라진 게 없다. 사람의 행복보다 다른 걸 우선으로 생각했던 개발시대였고, 우리는 그래서 과연 행복해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에서 살아남은 기업가가 강모다. 이 시대를 희망적으로 본 건가.
유인식 감독: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전국 주요 건물들에 대해 안전 진단을 했더니 양심적으로 건설된 건물이 전체의 2%라는 자료가 있더라. 뒤집어서 말하면 그 2%는 그 모든 관행에도 불구하고 건물을 제대로 지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2%가 강모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자료조사를 하면서 경실련에 가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관행이니 이권이니 다 마다하고 양심적으로 성공한 기업가가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더니 그 분이 한참 생각하더니 “못 찾을걸요”라고 하시더라 (웃음) 그래서 강모는 모델이 없다. 그냥 그 2%가 어딘가에 있다고 믿고 싶다.
강모 같은 사람이 정말 조필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까?
유인식 감독: 그런 사람들이 승리할 수 있는 세상일까라고 질문한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다.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강모가 이룬 것을 승리라고 읽느냐, 아니면 희망이라고 읽느냐 보다 승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냐는 식의 심드렁한 태도를 가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가장 위험한 거니까. 강모가 이룬 것이 정말 승리인가에 대해 사람들이 궁금해 했으면 좋겠다.
마지막 화에서 강모는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3남매가 부둥켜안고 즐거워하던 과거를 회상한다. 강모는 행복해진 걸까.
유인식 감독: 아, 그 표정 참 좋았지. 강모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준모를 돌려줬다. (웃음) 준모가 돌아오는 버전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한강건설 몇 주년 행사장을 배경으로, 한국말을 하나도 못 하는 새로 온 교포 셰프가 강모에게 직접 서빙하면서 물끄러미 보는 식으로 등장시킬까 생각도 하고. 강모가 준모와 함께 새로운 가족사진을 찍는 결말도 생각했다. 어떤 버전이든 간에 강모는 새로 시작하고 싶었을 거고, 이전보다는 많이 성숙하게, 많이 깊어진 상태로 조심스럽게 행복을 쌓아가지 않을까. (웃음)
글. 이승한 fourteen@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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