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익준│나를 사로잡은 영화들
양익준│나를 사로잡은 영화들
“잊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어요. 의 과정들? 아주 지독했죠.” 양익준은 지독하다고 말했지만 그가 연출하고 주연을 한 영화 는 그에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수준의 외형적 성과를 안겼다. 대화할 줄도 모르고, 입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욕설이요, 감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통로는 폭력뿐인 상훈의 등장은 보는 이의 심장을 물어뜯었다. 그리고 이 징글징글한 인간의 퇴장은 보는 이의 눈에서 소금기 진한 눈물을 뽑아냈다. 그렇게 는 2009년 개봉 이후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수상 소식이 끊이지 않으며, 제목부터 강렬한 영화의 파괴력을 자랑했다. 양익준이라는 낯설기 짝이 없는 이름을 작년 한 해 가장 핫한 코드로 만든 것 또한 물론이다. 그러나 이전에도 양익준은 연기를 하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 등으로 독립영화계에서 걸출한 배우였고, 자신이 연출한 단편 로 오랫동안 호평을 받았다. 양익준은 영화를 통해 안으로 꾹꾹 눌러놓았던 것들을 토해놓고, 연기를 하면서 자신을 표현한다. 그는 감독 혹은 배우라는 편의적인 구분을 초월해 영화 자체를 증류해 자기 안으로 체화시켰다.

그래서 본인이 연출을 하지 않은 첫 장편 주연작인 에서도 “배우가 고민할 부분이 아닌데도 눈에 보이곤” 했다. “연출도 하고 제작도 하다보니까 작업 하면서 영화의 모순이 발견되더라구요. 영화라는 기분 좋은 것 안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일들을 경험했으니까. 그런 얘기를 하면서 이게 내가 제일 되고 싶지 않은 꼰대는 아닌가 고민됐어요.” 그러나 10년째 감독 준비 중이라는 동민은 양익준을 위한 캐릭터 같다. 곁에 가기도 꺼려지는 의 상훈과 다르게 의 동민은 동네 여기저기를 기웃대는 똥개처럼 친근하다. 그래서 겉만 멀쩡한 성희(지진희)와 어울려도, 사기꾼 유곽(이문식)과 함께해도 매 장면이 착착 달라붙는다. “뭘 하고 싶단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날 놓고 싶은” 촬영 당시의 바람처럼 기분 좋게 풀어진 동민은 상훈 때문에 아렸던 가슴에 위안을 준다.

“3-4년 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어요. 난 지금 이 과정이 지나면 변할 것이다, 라고. 실제로도 저는 예전과는 다르게 말도 잘하고 변했어요. (웃음) 그런데 지금 내가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아직 전 하나의 과정 위에 있어요. 다만 영화나 연기를 할 때 분명한 건 있어요. 연기나 작품 안에서 거짓말은 안 한다는 것. 거짓말하면 빤히 보인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거짓말과 가식, 인위적인 모든 것을 너무도 싫어하는 양익준. 그래서 그가 고른 영화들도 젠 체하지 않고 느낀 대로 말하는 그의 화법처럼 솔직하다. 인터뷰 중간 불쑥 불쑥 끼어드는 구수한 욕설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그와의 대화처럼 신선하다. 다음은 양익준에게 거짓이 아닌 진심으로 다가와 그를 사로잡은 영화들이다.
양익준│나를 사로잡은 영화들
양익준│나를 사로잡은 영화들
1. (The Class)
2008년 | 로랑 캉테
“가장 최근에 본 영화예요. 웃긴 것도 웃긴 거지만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요. 보면서 자꾸 그 선생화가 되더라구요. 어우 이 사람이 애들한테 괜히 그런 얘길 해가지고 어휴… 그 후로 영화가 뭔가 마무리 짓지 않고 끝나지만 현재의 상황과 트러블만을 보여줘도 충분히 감흥이 있었어요. 그런 상황은 살면서 도처에서 만나게 되니까요. 영화를 보다가 고민하면 살면서 비슷한 문제에 대한 대처 요령도 생길 것이고. 그 시간 동안이라도 답답증을 안겨준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해요.”

학생과 교사는 교실이라는 한 공간에 있지만 모든 것을 다르게 인식한다. 새 학기를 맞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학생들을 대하는 마랭(프랑소와 베고도)은 여전히 반항과 무시를 일삼는 아이들 때문에 뒷목을 잡기 일쑤다. 그러나 교사와 학생의 반목에도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토론하고, 학교의 정책 수립에도 학생 대표가 참여하는 프랑스의 시스템이 부러울 따름이다. 61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양익준│나를 사로잡은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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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e Border City 2)
2009년 | 홍형숙
“잘 모르고 관심이 없는 사건이었는데, 이 영화 역시 보고 나서 답답해지더라구요. 는 많은 분들이 봤으면 좋겠어요. 한국 안에서 벌어지는 뭐랄까 버려져 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랄까요? 송두율 교수는 한국에서 학자로서 의미 있는 일들을 많이 하셨을 텐데… 자꾸 색깔로만 판단이 되니까 아주 훌륭한 사람들인데도 안타까워요. 한국은 좋은 인재들을 자꾸 밖으로 내모는 나라가 되어버린 것 같아요. 지금 우리 사회에는 2000년대 최고의 명대사죠, 의 대사 ‘너나 잘하세요’가 생각나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국제사회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의미 있는 학문적 성과를 내놓은 재독철학자 송두율 교수는 37년 만에 밟은 고국 땅에서 체포당했다. 거물간첩이라는 국정원의 의심은 한 철학자의 모든 것을 짓밟았다. 그리고 그 야만은 항소심에서 일부 무죄를 판결 받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대한민국에서 철학자로 산다는 것은 이다지도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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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ust In The Wind)
1986년 | 허우 샤오시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봤는데 너무 좋더라구요. 전날 친구랑 엄청나게 술을 많이 마셔서 같이 간 친구는 조느라 정신없었는데 전 잠들 수가 없더라구요. 다 보고 나서 혼자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어요. (웃음) 그 전까지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를 한 편도 안 봤는데 으로 존경하게 됐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존경하게 된 분이죠. 작년에는 를 보시고 밥을 사주신다고 하셔서 뵈었는데 술을 마시면서 에서 상훈이 한 대사를 외쳐주셔서 너무 좋았어요. (웃음)”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온 아원과 아운은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레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또 그처럼 담담하게 헤어진다. 흔하디흔한 연애의 생성과 소멸을 그린 영화는 지나간 대만의 일상을 소박하되 아름답게 그려내며 한 편의 시로 완성됐다. 허우 샤오시엔의 청춘 4부작(, , , ) 중 마지막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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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Glasses)
2007년 | 오기가미 나오코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를 좋아해요. 도 재미있게 봤고, 그 분의 영화를 보면 참 편안해지잖아요. 음식을 만드는 모습처럼 인간이나 배우들의 일상을 계속 보여주다가 새로운 캐릭터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도 좋구요. 바르셀로나 아시안 영화제에서 만나 뵌 적이 있는데 같이 사진을 찍을 정도로 좋아하는 분이에요. 물론 제 노트북 배경화면은 그 때 함께 찍은 사진이구요. (웃음)”

외딴 섬으로 도망치듯 떠나온 타에코(코바야시 사토미)는 그곳 사람들의 특이한 행동에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아침마다 요상한 체조를 하고, 다함께 모여 밥을 먹는 등 혼자 있고 싶어 하는 타에코에게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특별한 사건 없이도 조금씩 마음을 열게 만드는 사람들의 마법은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소박한 요리들과 함께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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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e Brown Bunny)
2003년 | 빈센트 갤로
“빈센트 갤로 감독의 도 좋아하고, 는 엄청나게 좋아하는 영화예요. 그런데 사실 이런 감수성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긴 해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일단 한국에서는 다양한 영화들이 상영되기가 힘드니까요. 극장에 가면 7-8개의 영화들이 다 점유하고 있다는 게 참 이상해요. 맨날 콩밥에 미역국, 김치 먹는 것 같달까요? 전 햄버거도 먹고 싶다구요! (웃음)”

는 칸영화제에서 공개되자마자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외설이냐 예술이냐는 해묵은 논쟁을 다시 벽장 속에서 꺼냈고,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를 둘러싼 시끄러운 잡음을 꺼두고 찬찬히 영화를 음미하면 그저 더 이상 슬플 수 없는 연가(戀歌)가 들린다. 연출, 각본, 주연까지 해낸 빈센트 갤로는 물론이고 패셔니스타 이전에 배우인 클로에 세비니가 돋보인다.
양익준│나를 사로잡은 영화들
양익준│나를 사로잡은 영화들
“지금은 별로 영화 생각이 없어요. 영화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까. 얼마 전에 홍대 앞으로 이사를 해서 주변의 맛집이나 카페를 찾아다니는 게 지금은 훨씬 중요해요. (웃음)” 일상에서 양익준은 “행복해지는 주문을 매일 외우고” 동료들과 재밌는 장난을 치기 위해서 사진을 찍다가도 상의를 벗어던진다. 그는 그저 하루 하루를 즐겁게 살고 싶고, 그 길 위에 영화는 가장 좋은 동반자로 자리 잡고 있다. “영화라는 게 일단 맛을 보면 벗어나지 못하는 거 같아요. 뭔가를 담아낼 수 있는 좋은 그릇이거든요. 모든 감각들을 활용해서 감정, 모습, 소리 등 내가 갖고 있는 걸 굉장히 많이 담아 낼 수 있어요.” 영화와 그는 열정을 고백하고, 들뜬 포부를 밝히는 관계가 아니라 하고 싶은 얘기를 하지 않으면 화병이 나는 것처럼 즉각적이고 자연스러운 생리활동의 일부다.

양익준은 뜬구름 잡는 예술관이나 설익은 관념들을 말하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기쁘게 이야기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영화라는 소통수단 자체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그것에 압도되지 않는다. 그는 큰 그림을 그리다가 정작 제 앞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양익준이 지금 홍대 카페에서 한가로이 보내고 있는 시간마저 치열한 이야기로 숙성시켜 꺼내놓을 것 같은 예감으로 이어진다.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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