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5일 개봉을 앞둔 영화 에서 엄정화는 그동안 배우로서 쌓아왔던 모든 것을 다 보여준다. 구르고, 다치는 액션에서부터 환청에 시달리는 신경쇠약, 가슴 절절한 모성까지 어느 하나 쉽지 않은 감정들로 오래 달리기를 한다. 그래서 영화를 막 끝낸 그녀는 홀가분해야 하지만 홍보를 위한 인터뷰라는 또다른 레이스가 남아있기에 지쳐 보이기도 한다. 지금 엄정화는 상처를 헤집는 질문에도 답해야하는 ‘연예인’이란 직업의 잔인함을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 때문에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의식적으로 경계했고, 대화의 즐거움을 찾으며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낸 신작에 대해 자신감도 드러냈다. 힘든 순간에도 가수로서 배우로서의 꿈을 얘기할 수 있는 그녀, 대한민국에서 엔터테이너로서 유일무이한 엄정화다.의 시나리오는 대한민국의 모든 여배우들이 탐냈을 것 같다. 흔치 않은 여배우 원톱의 영화인데다가 백희수라는 인물 자체도 감정의 극단을 오르내리며 넓은 연기 폭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엄정화: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몸이 움찔거릴 정도로 신나고, 이정호 감독이 애초에 나를 염두에 두고 썼다는 게 참 좋더라. 잔잔한 영화도 물론 좋아하지만 배우로서 장르적인 영화는 연기하는 재미가 다르다. 할 것도 많고 보여줄 것도 많으니까. 그래서 는 하고 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희수는 연기하는 내내 힘들었지만 그만큼 즐거웠다” 실제로도 후련하다고 느꼈을 것 같다. 그동안 엄정화가 배우로서 키워온 모든 내공을 백희수에게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고 할까? 베스트셀러로 칭송받다가 표절 시비에 시달리는 작가로 추락하는 동시에 신경쇠약과 강박, 모성까지 다양한 감정을 소화하며 극의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인물이었는데.
엄정화: 연기하는 내내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힘든 만큼 즐길 수 있었다. 일상에서도 백희수의 고통스러운 감정에 억눌릴 땐 ‘어머, 나 배운가봐’ 하기도 하고. (웃음) 오히려 그런 생각이 안 들 때는 나 자신을 다시 일깨워야 된다. 그래서 스스로를 더 힘들게 하는 부분도 있는데, 그런 순간이 와주는 게 좋다.
어떤 배우들은 그렇게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곧 그 캐릭터가 되어버리는 걸 빙의나 접신으로 표현하기도 하던데.
엄정화: 접신은 안 해봐서 모르겠는데 어떤 장면에서 내가 이 사람의 감정하고 맞닿을 때가 있다. 모든 작품에서 항상 그런 게 오는 건 아니니까 내가 그 사람이 된 거 같을 땐 희열이 느껴지고 기쁘다. 맨날 접신이 되면 좋을 텐데.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도 백희수와 엄정화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장르적인 연기의 재미를 느낀 것인가?
엄정화: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희수가 별장에서 딸의 얘기를 듣고 서서히 눈빛이 변하는 순간이 있다. 글을 쓰고 싶은 간절한 마음, 원하는 것을 얻고 싶은 마음에 딸한테까지 광기를 보인다. 자신의 욕망과 별장의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변해가는 모습을 표현하는 게 재밌었다. 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나오니까 강약 조절도 고민되고 힘들었지만 그런 고민을 하는 걸 보면 스스로 좀 멋있는 것 같고. (웃음) 난 정말 배우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희수는 연기하기 쉽지 않았는데 쉽지 않아서 좋았다.
엄정화 원톱의 영화지만 사실 함께 연기한 조연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남편을 연기한 류승룡은 분량과 상관없이 존재감이 느껴지고 조진웅, 조희봉 등 조연들과의 화학작용도 만만치 않더라.
엄정화: 확실히 화학작용 같은 게 있었다. 그들과 만나는 장면이 많지는 않았는데 서로 화합하는 게 느껴졌다. 혼자 찍다가 함께 연기하면 너무 신났다. 스타가 아닌 말 그대로 배우인 사람들이니까. 그런 배우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어 간다는 게 좋았다. 현장에선 내내 그들에게 존경심 같은 걸 느꼈고. 연기하는 모습만 봐도 감동적이었다. 어쩜 그렇게 영화의 느낌들을 잘 살리는지.
하지만 같이 연기하는 입장에서 존경심 뿐 아니라 경쟁심도 생겼을 것 같다.
엄정화: 지하실에서 희수와 중년 4인방(조진웅, 최무성, 조희봉, 오정세)이 육탄전을 벌이는 신은 4일 동안 찍었다. 그런데 촬영 첫 날 죽은 중년 1(최무성) 같은 경우는 삼일 동안 죽은 연기를 하는데 계속 모니터를 하는 거다. 원래는 모니터도 잘 안 보는 배운데. 계속 모니터를 보면서 “내 배 안 움직이냐, 숨 멈춰야 되는데” 그러는데 참 인상 깊었다. 희수의 남편을 연기한 류승룡 씨도 손발이 묶여서 누워있는데 사실 멀리서 보면 잘 안 보인다. 그런데도 조연출한테 “꽉 묶어, 더 꽉!” 하더라. 그걸 보니까 와 장난이 아닌거다. 그래서 나도 “더 꽉 묶어 진짜처럼 해야지!” 소리치고. (웃음) 엄살을 전혀 부릴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런 것들이 기분 좋은 자극이 됐다.
“아직도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영화는 사건이 다 해결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결말에 이르러서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마지막에 관객을 향해 짓는 백희수의 묘한 표정은 영화가 개봉되면 많은 논란을 일으킬 거 같다.
엄정화: 감독이 그 장면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서 여러 가지 버전으로 찍었다. 다시 딸 연희랑 시골로 내려가는 것도 찍고. 연기한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 거 같다. ‘사실 이거 다 내가 만든 얘기야’로 볼 수도 있고, ‘이 얘길 다 믿어?’ 이런 느낌일 수도 있고. 잘 모르니까 되게 모호한 느낌으로 찍었다. 답이 없으니까. 그런 독특하고 새로운 결말이 좋았다.
그동안 배우 엄정화가 돋보였던 작품들도 그랬던 거 같다. , , 처럼 새로운 이야기, 새롭게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는 영화들을 잘 골라냈고 그 안에서 배우로서 더 깊어졌다.
엄정화: 다행히 그랬던 거 같다. 재밌게 와 닿는 시나리오를 좋아하는데 영화가 전체적으로 재밌다고 해도 내가 해야 할 인물이 어떤 부분에서 느낌이 오지 않으면 못하겠더라. 이야기는 재밌는데 내 역할이 평면적이거나 안 끌리면 할 수가 없다. 같은 경우도 재밌게 읽히는 동시에 내가 생각했던 것들과 캐릭터의 생각이 같아서 끌렸던 것 같다. 그래서 영화를 끝내고 나서도 친구들과 함께 보고 밤새도록 얘기할 수 있었고. 화두를 던져주는 이야기가 좋다.
최근 인터뷰에서 아이콘이나 롤모델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이미 엄정화란 엔터테이너는 한국에서 아이콘이 되지 않았나? 그만큼 사람들의 기대도 많이 받고, 한 개인으로 볼 때는 부담도 클 것 같은데.
엄정화: 아이콘이란 자각은 무대에서 노래할 때는 많이 느낀다. 고백하자면 언젠가 한 번은 이란 뮤지컬 영화를 보면서 내 노래로만 뮤지컬 같은 걸 만들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 노래는 ‘배반의 장미’처럼 배신하거나 ‘하늘만 허락한 사랑처럼’ 친구의 친구를 사랑하고 우울해서 안 되겠더라. (웃음) 하지만 배우로 연기할 때는 그런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않는다. 다만 가수로 돌아갔을 때는 누군가의 롤모델이고, 아이콘이라는 걸 즐긴다. 사실 가수로서 부담이나 책임감을 갖지 않아도 되는데 자꾸 갖게 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후배들과 같기보단 다른 걸 원하고, 엄정화니까 더 멋지게 하고 싶고. 그래서 아이콘이나 롤모델이란 걸 내 스스로를 더 자극시키는 말인 것 같다.
하긴 천하의 이효리도 엄정화 언니가 다 망쳤다고 푸념하더라. (웃음) 맨날 변신하니까 사람들이 다른 가수들에게도 그 정도의 기준을 요구한다고.
엄정화: 진짜 그런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난 변신하는 걸 즐기니까. 근데 보통 후배들은 변신하는 것에 대한 강박을 갖고 있는 거 같다. 그런 점에서 좀 미안하긴 하다. (웃음) 하지만 난 노래마다 달라 보이길 원하고, 변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다른 사람과 비슷한 건 싫다. (이)효리한테도 부담을 없애라고 하는데 사실 (이)효리도 그런 걸 없앨 순 없을 거다. 나 때문이 아니라 그 때마다 유행도 다시 오고, 트렌드도 다르니까. 변신이라기보다 그런 걸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세대니까. 요즘은 다들 옷도 너무 예쁘게 입고 스타일이나 트렌드 같은 걸 풍족하게 누릴 수 있는 시대인 거 같다. 나 때는 정말 그런 게 없었다. 요즘 애들은 참 좋을 거 같다. (웃음)
“엄정화가 시집 간다고 하면 이상하지 않나” 올해에는 새 앨범을 발표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배우 엄정화의 행보도 기대되지만 가수 엄정화의 새로운 변신 또한 궁금하다.
엄정화: 아직도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오래 일을 하다 보니까 알고 있는 뮤지션도 많고. 대중가요 쪽 뿐만 아니라 언더 쪽 뮤지션들과도 계속 교류하고 있다. 그들의 음악을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한다. 사실 평소에 듣는 음악도 루시드 폴이나 정재형 같은 뮤지션들의 음악이다. 그래서 9집 앨범에서 페퍼톤스와 함께 ‘여왕폐하의 순정’을 작업하기도 했고. 내 노랜데도 듣고 울 정도로 좋아한다. (웃음) 그렇게 들을 수 있는 노래를 좋아해서 그쪽으로 친한 뮤지션들한테는 나를 위한 노래 좀 만들어봐 하기도 하고. (웃음) 아무래도 나는 곡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곡을 받아서 노래를 하는 사람이니까.
듣기에 좋은 음악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과는 별개로 가수 엄정화에게선 무대 위의 퍼포먼스도 빼놓을 수 없다. 얼마 전 방송에서 동생인 배우 엄태웅이 누나가 클럽에서 춤추는 게 이젠 힘들어서 울었다고 폭로했는데, 화려한 무대를 못 보는 건 아닐까 걱정된다. (웃음)
엄정화: 난 음악 듣고 춤추는 걸 너무 좋아한다. 인생에서 그렇게 빠져본 게 없다. 아직까지 빠져있으니까. 7년쯤 전에 파리 클럽에서 한 할머니를 봤다. 그 때는 아 나한테도 저런 순간이 올까, 내가 어느 순간 클럽에 가거나 음악을 듣는 게 싫어지는 순간이 올까, 그런 순간이 오지 않고 나도 그런 할머니처럼 늙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춤과 음악을 좋아한다. 그런데 지금은 물론 춤추는 걸 좋아하지만 예전만큼 클럽 같은 곳에 찾아가거나 꼭 가려고 하는 의지는 덜해진 걸 발견하다. 끊으려고 노력 하지 않아도 시간이 이렇게 만드는 구나해서 반갑진 않더라. 근데 사실 또 그래줘야지 언제까지 클럽에 다니겠나. (웃음) 막 가고 싶은데 나이 때문에 참는 것보다 그런 순간들이 서서히 다가오는 게 고맙다.
당신에게도 클럽에 가길 주저하는 순간 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엄정환데. (웃음)
엄정화: 사실은 없다. (웃음) 주저한다기보다는 가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는 순간이 요즘은 없다. 사실 언제든지 갈 수 있는데 ‘오늘은 너무 너무 춤추고 싶다’ 이런 게 조금씩 사라진다.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그런 욕구들을 끌고 온 것 같다. 이런 게 나이 드는 건가? (웃음)
엄정화도 이젠 나이 드는 게 아닐까라고 느낀 게, 결혼에 대한 발언에서였다. 예전에는 오히려 결혼을 꼭 해야하냐고 반문했지만 최근에 진행된 인터뷰들을 보면 요즘은 결혼하고 싶어졌다로 바뀐 것 같더라.
엄정화: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이 자꾸 물어보니까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결혼은 나한테 우선순위가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이 이렇게 많은데. 결혼은 별로 매력 없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 하게 되는 거지, 나이나 이런저런 조건들 때문에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엄정화가 시집간다고 하면 이상하지 않나? (웃음)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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