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간다고 해서 세상이 앞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조지 오웰의 은 인간이 빅 브라더에 의해 정신까지 조종당하는 디스토피아에 관한 픽션이지만 2010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은 논픽션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지난 2년 사이 방송 판에는 낙하산 인사, MBC < PD수첩 > 사태, ‘빵꾸똥꾸’ 권고 조치, KBS 보도의 편향성 논란 등 80년대로 시간을 되돌린 듯한 크고 작은 문제점들이 터져 나왔지만 해결의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우리의 방송은 어디까지 가게 될까. 2012년에 우리는 어떤 TV를 보고 있을까.
언론장악 전야│2Q12
2012년, 텔레스크린에서는 MBS의 건전 드라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80년대 방송된 , 아침부터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난달까지 방송됐던 ‘장관님 스페셜 1탄’ 에 비하면 낫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김금동은 스위치를 돌렸다. 그러나 텔레스크린은 과거의 텔레비전과 달리 소리를 약간 줄일 수는 있을망정 아주 꺼버릴 수는 없게 돼 있었다. MBS에서는 그 이유가 시청자들에게 수신료의 혜택을 보다 공평하게, 쉬지 않고 빠짐없이 주기 위해서라고 발표했지만 그것이 말인지 당나귀인지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수신료나 좀 깎아주던가. 옘비…셔스”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하던 욕설을 간신히 영단어로 승화시킨 김금동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지상파 3사 통폐합이 이루어진 것은 작년 가을, 새 미디어법이 날치기 통과된 직후의 일이었다. MBC, SBS, KBS를 합친 MBS가 설립되자 혹시 Myoung Bak See 아니냐는 농담을 하던 사람들은 문광부로부터 날아온 고소장을 받은 뒤 사회에서 사라졌다.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것은 정부의 오랜 전통이었다. MBS의 월 수신료는 10만 원, 질 좋은 국영방송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최소금액이라고 사장은 발표했다. 텔레스크린은 전국 모든 가정이 의무적으로 비치해야 했으며 1인 가정이라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수신료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독신자들이 대거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는 사태도 발생했다. 게다가 민간인이 케이블 채널을 보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해야 하고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김금동은 신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5년 사이 괴이한 일들이 계속되는 데 익숙해진 김금동이었지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왜 하필 저것만 새로 더빙한 거지?’ 텔레스크린 속의 용식이가 ‘양촌리’ 대신 ‘청백리’라는 낯선 지명을 입에 올리는 중이었다.
언론장악 전야│2Q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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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방송은 너무 떨린단 말이야…’ 키스신을 제외하면 발연기의 대가로 불리는 성민우는 초조하게 온에어를 기다리고 있었다. MBS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이 거의 폐지된 뒤 남은 시간 대부분이 드라마로 채워졌다. 개그와 예능 프로그램도 ‘선정적이고 코미디를 빙자해 시청자를 선동한다’는 이유로 사라졌지만 드라마 왕국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 ‘똑같은 장면을 이 방향 저 방향에서 여러 번 찍는 것은 비실용, 비효율’ 이라는 이유로 사장이 큰 집에 불려가 조인트를 까인 이후 드라마 생방송 제도가 도입되었다. “꼭 50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야.” 에서 성민우의 아버지 역으로 출연하는 노배우는 종종 말했다. 생방송 도중 대사를 잊어버린 배우들은 애드리브로 위기를 넘겼지만 함정이 있었다. 방통위 산하 심의기구에서는 모든 생방송을 모니터링함과 동시에 불온 대사 및 금지어가 등장하면 곧바로 송신과 연결해 해당 단어를 음소거한 뒤 자막 처리했다.
지난 주 숙취로 정신이 혼미하던 성민우는 임신한 애인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어머니에게 강한 분노를 표현하는 신에서 무심코 “엄마는 빵꾸똥꾸야!”라고 외쳤지만 재빠른 심의실은 “엄마…모래반지 빵야빵야!”라는 자막으로 대체한 뒤 성민우와 PD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성민우 애인의 전 남자친구로 출연 중인 배우 역시 최근 출연료 2개월분을 삭감당하는 중징계를 받았다. 연락을 받지 않는 전 애인에게 분노해 “으아니, 왜 난 행복해질 수가 없어! 핫 챠!” 라며 휴대폰을 바닥에 집어던지는 신에서 절대 망가져서는 안 되는 휴대폰을 박살냈기 때문이었다. 징계 사유는 ‘휴대폰 제조업체이자 광고주인 오성그룹과 MBS에 대한 해사 행위’였다. “레디- 액션!” 2시 정각과 함께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쥐 한 마리가 나타나 세트를 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마다 가장 나쁜 것은 다 다르지만 성민우의 경우 가장 끔찍한 것은 쥐였다. 온몸의 땀구멍에서 피가 빠져나오는 기분으로 성민우는 “쥐새끼 잡아!!!”라고 외쳤다. 아니, 외쳤다고 생각했다. 그가 “ㅈ…”를 발음하는 순간 위기를 눈치 챈 배우들이 달려와 성민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쥐새끼’는 방송법 1001조 1항에 의거한 특급 금칙어였고 이를 위반할 경우 징역 1년 6개월 이하, 벌금 1000만 원 이하의 형벌에 처해졌다. 0.5초 뒤, 전국 가정의 텔레스크린에 자막이 떴다. “서생원이시네요.”
언론장악 전야│2Q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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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S 앵커 조인두는 손에 들린 한 장짜리 원고를 백두 번째로 읽고 있었다. 오늘도 그가 보도할 뉴스는 아주 짧았다. 한 여당 의원의 힙합 앨범 발매 소식, 여당 고위당직자의 해외 봉사활동 소식, 그리고 역대 최장수 재임 기록을 또 다시 경신한 문광부 장관의 치적에 대한 월례 보고였다. 그가 MBS의 유일한 뉴스인 ‘대한 뉴스’의 앵커로 발탁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실제로 화면에 등장한 시간은 총 100분이 되지 않았다. 매일의 뉴스를 각하가 직접 발표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대한 뉴스’가 지나치게 친정권적이라는 이유로 ‘땡각 뉴스’라는 별명을 얻으며 빈축을 사자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정부 관계자가 내놓은 아이디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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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각하는 뉴스만 일방적으로 전달하기를 거부하며 21세기적 ‘국민과의 대화’를 창안해 쌍방향 소통을 원했다. 매주 MBS 사이트의 각하 페이지에 “각하께서 보신각에서 종을 치신다면 나는 옆에서 OOO을 하겠다”, “각하께서 광화문 광장을 거니신다면 나는 옆에서 XXX을 하겠다” 등의 아이디어가 올라왔다. 모든 포털 사이트와 주요 웹사이트에서 각하와 관련된 글에는 일괄적 댓글차단조치가 이루어진지 오래지만 유일하게 이 이벤트만큼은 참여가 권장되었다. 전국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수행평가에 댓글 기록이 반영되었으며 특히 “각하의 옆에서 삽질을 하겠다”나 “각하의 옆에서 통성기도를 올리겠다” 등 모범적인 댓글을 달아 각하와 함께 뉴스에 출연한 학생은 입학 사정관제에서 가산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각하의 옆에서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르겠다”와 같은 댓글은 조용히 삭제되고 해당 학생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오늘의 주요 뉴스는 각하의 제 133차 재래시장 방문이었다. 재개발로 일터를 곧 잃게 된다는 시장 상인에게 각하가 손수건을 건네며 “나도 한 때는 철거민이었다”는 따스한 위로를 건네는 장면이 롱테이크로 이어졌다. 조인두는 하품을 씹어 삼키며 백 세 번째로 뉴스 원고를 내려다보았다.
언론장악 전야│2Q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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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열 142번, 142번 태도 불량!” 기계음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그 하나하나는 모두 빠짐없이 요원들의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었다. 팀장이 말한 D열 142번 모니터 속의 남자는 체제에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눈빛으로 코를 후비는 중이었다. 김현준이 재빨리 단말기를 두드렸다. ‘임익…마포구 거주, 나이는 서른하나, 독신, 직업은 프리랜서…’ 역시 팀장은 예리했다. 남자는 좌파적 요소를 거의 모두 갖추고 있었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최첨단 텔레스크린 국가개념보안시스템 덕분으로, 현재 모든 텔레스크린은 방송과 동시에 시청자의 동향을 정부 기관 모니터에 자동 전송하는 시스템으로 작동되고 있었다. 강력한 법치를 통해 상습적 데모꾼들을 대거 소탕한 뒤 정부는 이러한 반정부, 반체제 성향을 지닌 ‘생활 좌파’들을 미리 파악하고 유사시 선고발 후조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물론 압도적인 의원 수를 통한 인해전술 덕분이었다.
특히 ‘대한 뉴스’에 대한 시청 태도는 절대적 기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텔레스크린 앞에서 진지하게 정좌하고 있지 않거나 ‘대한 뉴스’를 제대로 보지 않는 사람의 경고의 빨간 등이 3차례 들어온 뒤 1단계 좌파로 분류되었다. 빨간 등이 누적되면 내역은 경찰청으로 넘어갔다. 끝나지 않는 지루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청년 실업 천만 시대에 시력과 끈기만으로 이토록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된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며 김현준이 모니터로 다시 시선을 돌리던 순간, 날카로운 경보음이 공간을 갈랐다. “C열 129번, E열 153번, F열 171번 오프! 코드 레드! 코드 레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절대로 끌 수 없는 텔레스크린이 한꺼번에 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텔레스크린의 주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졌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그들이 거리로 나올까? 계엄령이 선포될까? 텔레스크린 속의 각하만이 홀로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