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12월 31일 의 ‘10 포커스’는 KBS 와 SBS 에 대한 프리뷰였다. 그만큼 두 작품은 2010년을 여는 기대작이었다. 그럼에도 KBS 의 폭발적인 시청률과 거듭되는 호평은 쉽게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KBS 와 같은 영화적 볼거리와 MBC 같은 정치 사극으로서의 무게감이 공존하는 이 작품은 한 편의 리뷰로 소화하기 어려운 다양한 매력과 풍부한 해석적 맥락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번 중간 점검에서는 이 작품의 정치적 함의와 블록버스터급 제작의 비밀과 촬영현장, 그리고 저자거리의 삶에 대한 소소한 기록까지, 라는 텍스트를 파악하기 위한 다양한 시선을 준비했다. 과연 는 무엇을 보여주었으며, 또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KBS 에는 두 가지 세상이 존재한다. “어차피 궁궐은 궁궐이고 저자는 저자야.” 저자의 추노꾼 대길은 같은 패거리인 최장군(한정수)에게 말한다. 그것은 반대파를 숙청하며 “민심을 들먹이는 자들이 어찌 어심을 모르시는가”라고 말하는 좌의정 이경식(김응수)의 이분법과도 상통한다. 저자에서 바라보는 궁궐도, 궁궐에서 바라보는 저자도 모두 자기와는 다른 세상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세계를 나누는 장벽은 어느 순간 무너진다. 궁궐과 저자가 다름을 주장하던 대길은 궁궐의 세계에서 보낸 자객인 철웅(이종혁)과 합을 겨룬다. 저자의 망나니 대길이 도망 노비를 쫓아 휘두르는 칼과 궁궐의 실세인 이경식의 정치적 음모를 위해 철웅이 휘두르는 칼이 맞부딪히는 공간은 궁궐인가 저자인가. 두 세계가 조우하며 만들어지는 이 모호함이야말로 이제껏 보지 못한 하이브리드 사극으로서의 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퓨전의 얼굴을 한 정통 사극
<추노>│무엇을 쫓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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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쪽에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정 늦었다”는 현대의 유행어가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동성의 손윗사람을 이르는 ‘언니’라는 표현이 쓰인다. 한 회에 한 번 이상 등장하는 현란한 액션 신은 무협 장르를 연상케 하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인물들이 자신의 꿈을 추구하는 과정에선 정치 사극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10회 만에 시청률 35%를 기록한 의 인기에 대한 분석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대길 패거리와 태하(오지호)의 잘 다져진 육체와 그들이 펼치는 화려한 검무를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과거 사극에서 쉽게 볼 수 없던 저자의 풍경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가 진정한 하이브리드인 것은 이 모든 요소들이 일관된 맥락 안에서 자리하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가상의 무대로 삼아 한 판 난장을 벌이기보다는 시대적 특성 안에서 극적 요소와 캐릭터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는 정통 사극이다. 의 배경인 인조의 시대는 SBS 와 KBS 에서 담아냈던 것처럼 병자호란을 겪은 난세 중의 난세다. 백성들은 도덕적 헤이가 극에 달한 양반들의 횡포와 법과 제도의 붕괴 때문에 괴로워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능하고 도덕적 결함을 지닌 왕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이런 혼란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난세가 영웅을 부르는 건 이러한 카오스 안에서 비로소 은폐되어 있던 국가 시스템의 문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대길이 같은 노비 사냥꾼이 등장할 수 있는 건 노비를 관리해야할 공권력이 무너져서고, 태하가 석견을 찾아 옹립하려는 건 이 난세가 왕의 무능 탓이기 때문이다. 쫓고 쫓기는 두 인물은 한 시대가 낳은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들이자 난세를 극복하는 방식에 대한 대답이다. 순리대로 살며 허물어진 국가 시스템을 순간순간 보수해야 하는가, 커다란 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을 성군을 앉혀야 하는가. 그도 아니라면 업복이(공형진)가 바라는 것처럼 폭군이 군림할 수 있는 시스템 자체를 뜯어고쳐야 하는가. 이들에게서 오늘 날의 우리를 비추는 정치적 함의를 읽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때문에 는 사극인 동시에 현재를 비추는 텍스트가 된다.

육체로 부딪히는 서로 다른 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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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사건의 공간이 저자로 옮겨지는 건 그래서 흥미롭다. 독살당한 소현세자의 뜻을 이루기 위해 도망 노비는 저자를 뛰어다니고, 그를 잡기 위해 위정자는 거리의 해결사를 고용하는 동시에 자신의 심복을 파견한다. 모두의 시선이 이 추격전에 쏠려있을 때 한 노비는 총을 들고 양반 사냥에 나선다. 시대의 흐름을 결정지을 치열한 다툼이 궁궐 바깥에서 이뤄지는 건 과거의 사극에서 볼 수 없던 일이다.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왕에게 바른 정치를 청하는 사극의 클리셰는 에선 단 한 장면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저자에 카메라의 포커스를 맞췄다는 뜻이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시대는 난세고 그것을 벗어나려는 능동적 움직임이 중요해진다. 하지만 손자 석견까지 제거하길 바라는 인조와 이경식의 음모로 정적들이 제거된 순간, 궁은 서로 다른 의견이 맞서는 정치적 갈등의 장이 되지 못한다. 새 시대를 꿈꾸는 세대에게 변화는 과연 어디서 추구될 수 있는가.

하여, 의 인물들은 궁 바깥에서 싸운다. 의 액션은 정치 사극에 뿌려진 양념 같은 것이 아니다. 논리 대 논리로 맞설 수 있는 정치 공간이 무너진 상황에서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이들이 맞부딪히는 방식은 결국 검과 검을 맞대는 것으로 귀결된다. 흩날리는 종이 사이로 비치던 대길, 태하, 철웅의 삼자 대결처럼 의 액션 장면은 종종 탐미적이다. 그것은 영상 자체만으로도 탁월하지만 이들이 겨루는 합이 긴장감을 담아낼 수 있는 건 싸움 방식의 디테일 때문이다. 영춘권에 기반한 대길의 빠른 손놀림은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는데 적격이고, 그에 반해 철웅의 검은 합과 합의 엇박을 노려 상대방의 급소를 노리는 전형적인 자객의 검이다.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태하의 경우 승패보다는 석견을 향한 활로를 여는 것이 중요하다. 의 액션 신이 아름다운 건, 서로 다른 신념이 부딪히는 것을 육체적 움직임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사극의 미래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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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극과 현대극, 그리고 무협 장르가 절묘하게 하이브리드된 이 지점에서 의 영상은 종종 그 완성도에 취한 나르시시즘적인 태도를 보인다. 여태까지 보여준 탁월한 미적 성취와 풍부한 정치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가 과연 사극의 새 장을 연 걸작인가에 대한 평가를 보류하게 되는 건 그래서다. 이 드라마는 철저하게 시대적이고 철저하게 정치적인데다가 심지어 치열하기에 아름다운 싸움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허나,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는 결국 아무런 전망도 보여주지 못하게 된다. 생살이 부대끼는 이 싸움은 치열하지만 정치라는 것은 진정성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대길을 제외하면 태하도, 업복도, 심지어 공공의 적인 이경식조차 “대나무는 곧으나 기둥을 세울 수 없다”는 나름의 명분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치가 어려운 건 바른 생각을 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바른 생각으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어려워서다. 올바른 꿈을 꾸었으되 역사적 맥락 안에서 결국 실패한 정치인들이었던 곽정환 감독의 전작 의 젊은 주인공들처럼.

성공한 정치가 꼭 좋은 정치는 아니지만 좋은 정치는 꼭 성공한 정치여야 한다. 과연 궁궐을 다시 유의미한 정치 공간으로 개편하려는 태하와 아예 궁궐을 세상에서 없애려는 업복이, 혹은 배다른 형제인 큰놈이(조재완)의 죽음으로 신분제의 모순에 조금씩 자각하기 시작하는 대길은 이 싸움을 통해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을 위한 징검다리 혹은 연대에 대한 전망을 남길 수 있을까. 그들이 최악의 난세를 몸으로 이겨내며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할 수 있을 때 역시 사극의 미래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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