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그녀가 그 자리에 서 있다. 반갑다는 말도 없이, 그렇다고 어색하거나 멋쩍은 미소도 없이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사람처럼 김현주는 브라운관 안에서 말을 건다. 그 인사를 받아들이기 위해 ‘아, 김현주구나, 오랜만이다’ 같은 되새김질은 필요 없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오랜 시간 동안 연락도 없이 지내다가도 무심히 건 전화 한 통에 마음 편히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 같은 느낌으로 그녀는 다가온다.

주연급 여배우들의 경우 지치지 않는 다작으로 자신의 잔상을 꾸준히 남기거나 CF 속의 박제된 이미지로 신비감을 조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걸 떠올릴 때 김현주의 호흡은 참으로 느릿느릿하다. SBS <백만장자와 결혼하기>와 KBS <인순이는 예쁘다> 사이 2년여의 공백이나 그로부터 KBS <꽃보다 남자>의 깜짝 출연을 거쳐 KBS <파트너>에 이르기까지의 거리는 절대 짧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컴백이라는 그 흔한 수식이 왠지 어색했다. 컴백이 어디론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라면, 그녀는 그저 자기의 길을 일직선으로 꾸준히, 그러나 단지 느리게 걸어갈 뿐이다. 걸음걸음마다 뚜렷한 방점을 찍으며.

사실 시청률이라는 잣대만으로 따진다면 그녀의 활동이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꽃보다 남자>야 최고의 히트작이었지만 구준희의 등장은 강렬하되 너무 짧았다. 하지만 흥행에서 부진했다고 하더라도 <인순이는 예쁘다>는 아마 2007년 드라마 중 가장 저평가된 작품일 것이며, <파트너>는 팬들에게 시즌2 요청을 받을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줬다. 그리고 그때마다 김현주는 자기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인순이의 힘겨운 노력을, 법이라는 룰 위에서 싸우지만 법보다 정의를 우선하는 은호의 강단을 자신의 표정에 효과적으로 담아냈다. 시청률에 대한 부담감이나 작품 사이의 공백에 대한 조급함이 아닌 캐릭터의 표정만이 남을 수 있었던 건, 그래서 김현주의 복귀가 아닌 김현주의 연기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말처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많은 것을 이겨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그 느릿한 걸음과 함께 하며 추억을 공유한 음악들을 추천했다. 그녀의 플레이리스트와 함께 어느 공원을 느리게 걸으며 우리의 추억들을 반추해보는 건 어떨까.




1. 윤상의 <윤상>
“이 앨범을 들을 때 저는 아마도 사춘기였던 것 같아요. 바람 소리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리던 시기에 이 앨범의 음악은 제게 너무 강렬했죠.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감수성을 만들어준 앨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추천할만한 곡으로 역시 타이틀곡인 ‘이별의 그늘’을 꼽을 수 있겠지만 당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던 곡은 ‘무지개 너머’예요.” 지금이야 한국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전자 음악의 장인이지만 1집 시기의 윤상은 지적으로 생긴 사춘기 소녀들의 ‘오빠’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특유의 담담하되 감성적인 멜로디와 신서팝의 감성은 지금 들어도 세련된 만듦새를 보여주는데 당대의 히트곡 ‘이별의 그늘’이나 김현주가 추천한 ‘무지개 너머’ 모두 전면적인, 하지만 과도하지 않은 신시사이저 전주가 인상적인 곡이다.



2. 유희열의 <익숙한그집앞-삽화집>
윤상과 유희열. 이 정도면 김현주의 어떤 일관된 취향을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추천하는 유희열의 앨범은 객원 가수들과 함께한 토이 앨범이 아닌 연주자 유희열을 전면에 내세운 <익숙한그집앞-삽화집>이다. “선물로 받은 앨범인데 그 안에 예쁜 삽화집이 있어서 더 기분이 좋아졌었어요. 1999년은 데뷔 이후 가장 바쁜 한 해였는데 피곤한 몸으로 들어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음악을 트는 거였죠. 이 앨범의 노래들은 일 때문에 여전히 흥분상태인 저를 진정시켜주고 심신을 달래줬어요. 덕분에 편안히 잠들 수 있었고요. 힘든 시기를 함께한 앨범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도입부의 오르골 소리가 편안하게 들리던 ‘어렸을 때 그 자리’를 가장 좋아해요.”



3. Stevie Wonder의 < Hotter Than July >
그냥 듣기 좋은 음악을 부담 없이 즐겨 듣거나, 모든 음악을 평등하게 좋아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자기가 제일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곡 하나쯤 가슴에 품는 것도 행복한 일일 것이다. 스티비 원더의 < Hotter Than July >가 김현주에게 소중한 이유는 그래서다. “세상 모든 음악 중 나에게 베스트 곡인 ‘Lately’가 있는 앨범이에요. 2002년에 외국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호텔에서 일행의 체크인을 기다리다가 호텔 로비에서 ‘Lately’를 연주하는 걸 듣고 소리를 지를 뻔했을 정도죠. 모든 연주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Lately’를 한 번 더 부탁했어요.” 가수로서 또 인간 승리의 주인공으로서 스티비 원더의 위대함을 언급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리메이크를 시도하는 ‘Lately’ 같은 명곡을 들을 때 결국 우리는 위대하다는 그 빤한 수식을 다시 한 번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Lenny Kravitz의 < Lenny Kravitz >
“이 앨범도 선물로 받은 앨범인데 아직도 꾸준히 자주 듣고 있어요. 기분이 울적해질 때 볼륨을 최대로 올려 ‘It Ain`t Over Til It`s Over’의 전주를 들으면 기분이 많이 나아져요. 뭔가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면 차를 으슥한 곳으로 몰고 가 이 곡을 듣고 오기도 하고요.” 정확히 말해 ‘It Ain`t Over Til It`s Over’가 처음 소개된 앨범은 두 번째 정규 음반이자 록계의 명반인 < Mama Said >이다. 그녀가 추천한 < Lenny Kravitz > 앨범은 일종의 베스트 음반으로 ‘It Ain`t Over Til It`s Over’를 비롯해 < Mama Said >와 < Are You Gonna Go My Way > 같은 명반에 소개됐던 곡들이 포함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다양한 악기를 다루며 자란 뮤지션답게 그의 ‘It Ain`t Over Til It`s Over’는 록적인 흥겨움과 소울의 감성처럼 다양한 장르의 매력을 담고 있다.



5. Kotaro Oshio의 < Starting Point >
음악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듣는 것도 있지만 직접 부르거나 연주하는 방식도 있다. 김현주가 최근 코타로 오시오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 그렇다. “최고의 핑거스타일 기타 연주자인 코타로 오시오를 알게 된 건 최근 기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예요. 이 앨범의 수록곡인 ‘Twilight’는 직접 쳐보고 싶은 곡이에요. 핑거 연주의 입문 곡이라고 하는데 결코 쉽진 않아요. 많이 들어야 잘 칠 수 있을 테니 요즘 가장 많이 듣는 곡이기도 하죠. 언젠가 완벽히 연주해내고 싶어요.” 한국의 팬들에게 ‘고달호’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코타로 오시오는 가장 대중적인 인지도를 자랑하는 핑거스타일 연주자다. ‘Twilight’를 비롯한 그의 곡들은 테크닉적인 완성도가 탁월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즐길만한 멜로디를 자랑한다.




언제나 느린 호흡으로 대중과 만나던 그녀는 최근 브라운관 밖에서 <현주의 손으로 짓는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자신의 취미인 뜨개질을 소재로 한 이 책이 흥미로운 건 단순히 연기 외 활동이기라서만은 아니다. “남들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높이 뛰고 싶은 욕심이 오히려 내 발목을 잡을 때 좀 천천히 가고자 하는 생각에 바느질로 마음을 다스렸어요. 그게 이젠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요.” 그녀가 바느질을 하며 무언가를 만들 때마다 생겼던 추억담을 담은 이 책은, 말하자면 언젠가부터 그녀가 걸어온 삶의 방식에 대한 담담한 기록이자 앞으로도 조급해 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다짐인 셈이다. 그녀는 앞으로도 자신의 호흡을 잃지 않으며 연기자의 길을 걸을 것이고, 우리는 다시 그녀의 얼굴을 브라운관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어느 날,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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