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구│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화들
설경구│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화들
21세기, 혹은 뉴 밀레니엄이라는 말과 함께 모두가 다가올 미래에 대해 기대하고 열광하고 있을 때, 그는 과거의 상흔에 아파하고 지배당하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2000년 1월 1일 개봉한 영화 에서 순백의 박하사탕 같던 영호가 현대사의 폭력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은 기습적인 라이트 훅만큼이나 날카롭게 무방비였던 관객의 머리를 울렸다. 그리고 그런 영호를 연기한, 아직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설경구라는 이름은 대번에 연기파 배우의 만신전에 올랐다. 의 껄렁껄렁한 형사 강철중이나 의 종두처럼 이전에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캐릭터들을 거칠수록 이런 이미지는 더욱 공고해졌고, 천만 관객을 모은 , 를 통해 얻은 흥행 배우라는 타이틀조차 ‘연기 잘 하는 설경구’에 비하면 부차적인 수식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예상하지 못한 카운터펀치. “저는… 메소드는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연기하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아닌 캐릭터가 된다는 메소드 이론이 연기의 어떤 정답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체중을 수십 킬로그램씩 늘리고 줄이며 마치 빙의한 듯 강철중과 홍종두, 역도산 같은 인물들을 연기하던 그가 “설경구가 역도산을 연기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대본에 있는 활자를 보고 연기하는 거지. 메소드란 말에는 어폐가 있어”라고 말하는 건 의외일 수밖에 없다. 그에게 연기란 결국 관객을 “착각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하지만 중요한 메소드건 착각이건 그의 연기는 언제나 예상 바깥에서 혹은 예상보다 더 통렬한 울림을 관객에게 선사한다는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머리와 가슴에 남는 그 울림만큼은 ‘진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냉철한 부검의 강민호를 연기한 신작 에 대해 “그냥 상업영화”라면서도 “마지막에 어떤 여진이 남을 것”이라는 그의 말이 미더운 건 그래서다. 그는 연기라는 것에 대해 별 것 없다는 듯 말하지만 그의 작품과 연기가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잊힌 적은 거의 없다. “영화를 별로 보지 않는” 생활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은 다음의 영화들처럼.
설경구│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화들
설경구│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화들
1. (Christmas In August)
1998년 | 허진호
“하아, 하면서 뭔가 애틋함 마음을 가지고 집에 갔는데 계속해서 영화의 장면 장면이 떠오르더라고요. (한)석규 형이 애써 웃으면서 찍은 사진이 영정 사진이 되고, 경찰서에 잡혀 와서 “내가 왜 가만히 있어야 돼!”라고 외치면서 깽판 치는 모습 같은 거요. 뭔가 드라마틱하게 꽝 하고 쳐주는 건 없지만 조곤조곤한 에피소드 속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잘 드러나잖아요. 잔잔하게 빠져들 영화인 거 같아요.”

그 흔한 키스 신 하나 없는 멜로물이자 허진호라는 새로운 작가주의 감독의 탄생을 알린 작품이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진사 정원(한석규)과 주차단속원 다림(심은하)이 사진 찍는 일을 매개로 조금씩 서로에게 빠져들며 그 감정이 사랑이라고 확신하는 과정까지를 그렸다. 비록 그 지점에서 정원은 죽고 거기서 그들의 만남도 끝나지만 오히려 그 애틋함을 통해 감독은 연애 직전의 설렘이 얼마나 눈부신 순간인지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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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Life Is Beautiful)
1997년 | 로베르토 베니니
“얼마나 재밌어요. 유태인 수용소에 끌려간 상황에서 아들을 위해 거짓말을 지어내고 모든 걸 게임처럼, 희극처럼 만들어내는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게. 심지어 마지막에 독일 병정에게 잡혀서 총살당한 아버지가 끌려갈 때도 축 늘어진 모습이 웃기잖아요. 말하자면 죽고 나서도 아들에게 웃음을 준 건데 그렇게 즐겁게 보고 나서 집에 가서 생각하니 너무 슬프더라고요. 그런 식의 잔상이 남는 게 좋아요.”

결코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이 세상에 영화의 제목이 너무 대책 없이 낙관적이라고 느껴진다면 이 영화를 직접 보는 수밖에 없다. 나치 시대의 독일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들과 함께 수용소에 끌려간 귀도(로베르토 베니니)가 나치의 독일어를 엉터리로 통역해 아들에게 이 모든 것이 게임이고 끝나면 탱크를 상으로 받게 될 거라 달래는 부성애는 퉁명스럽게 마음을 무장하고 보던 관객조차 결국 굴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인생은,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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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09년 | 허진호
“작년에 본 영화중에서는 제일 좋았어요. 낄낄 거리면서 보다가 메이(고원원)가 동하(정우성)에게 남편이 있다고 고백할 때 ‘이게 뭐야?’라고 생각했다가 그녀가 1년 전 지진 때문에 죽은 남편을 위해 제를 올릴 때 가슴이 짠하다더라고요. 사실 허진호 감독님 영화답지 않게 해피엔딩을 예감하게 하는 마무리보다는 그냥 거기서 끝냈어도 여운이 오래 갔을 거 같지만. 개인적으로 흥행이 안 돼서 좀 속상하기도 해요. 흥행이 되어야 이런 영화도 꾸준히 만들어지면서 다양성이 보장될 텐데.”

로 사랑에 빠지기 직전의 설렘을, 로 덧없기에 아름다운 연애의 짧은 순간을 그렸던 허진호 감독이 사랑 그 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미국 유학시절 만나 서로를 좋아했던 기억을 희미하게 간직한 동하와 메이가 중국에서 재회한 이후의 일은 어떻게 과거의 기억과 감정이 재구성되며 현재진행형의 사랑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원래는 쓰촨 대지진 1주년 기념 프로젝트인 3부작 중 한 편으로 기획됐지만 허진호 특유의 담담한 러브스토리를 좀 더 세밀하게 전달하기 위해 장편으로 단독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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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Il Postino)
1994년 | 마이클 래드포드
“나는 에서 우체부 역을 맡은 마시모 트로이시의 그것처럼 연기 같지 않은 연기를 좋아해요. 사랑에 빠지면서, 네루다(필립 느와레)를 기다리면서 살이 쭉쭉 빠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배우가 실제로 심장병에 걸려 죽음과 싸우며 연기했다고 하더라고요. 극 중 경찰의 진압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결말처럼 배우 역시 촬영 끝나고 열두 시간 만에 운명을 달리하고. 돌아온 네루다가 바닷가를 걷는 결말의 여운도 좋지만 무엇보다 배우가 표현해낸 그 담담하고 리얼한 정서가 좋아요.”

서점에 꽂힌 두꺼운 두께의 웬만한 시론보다 더 시의 본질에 대해 명확하게 드러내는 영화다. 이탈리아 시칠리아로 망명한 당대의 시인 네루다와 그의 우편물을 전속으로 배달하는 마리오의 우정을 그린 이 영화에서 마리오는 사랑하는 베아트리체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시의 운율과 은유에 대해 배우고 진심으로 빠져들게 된다. 단순한 지식의 배움이 아니라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마리오가 시인이 되어가는 모습은 왜 잘 쓴 시는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가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르겠다.
설경구│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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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usic Box)
1989년 | 코스타 가브라스
“이건 지금까지 말한 영화들과는 좀 다른 의미의 잔상을 남기는 영화에요. 변호사인 여자 주인공이 있는데 자기 아버지가 나치 전범으로 고발당하게 되자 거기에 맞서 아버지를 변호하는 내용이거든요. 자기에겐 너무나 자상한 아버지였으니까. 그런데 결국 승소하고 나서 친구의 유품인 뮤직 박스를 열었더니 아버지의 양민 학살 기록이 들어 있더라는 거죠. 그 순간 소름이 돋는 동시에 그 충격이 정말 오래 남더라고요.”

지난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신작 를 들고 왔던 정치 영화의 거장 코스타 가브라스의 작품이다. 주인공 앤(제시카 랭)과 그의 아버지 라즐로(아민 뮬러)가 파티에서 다정하게 춤을 추는 초반부와 아버지의 양민 학살 전과를 알게 된 앤이 외손주에게 승마를 가르치는 아버지 앞에서 울부짖는 후반부의 대조적 모습은 평온해 보이는 현대 사회가 얼마나 추악한 악을 덮은 상태에서 존재하는지 보여준다. 결국 앤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결말은 그 악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감독의 신념을 드러낸다.
설경구│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화들
설경구│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화들
“영화 보고 나서 ‘점심 뭐 먹을까?’ 이런 건 좀 아닌 거 같다”고 말하는 설경구에게 이번 는 오랜만에 대본을 보고 나서 강한 기억으로 남았던 작품이다. 하지만 뭐 하나 확답을 주지 않는 이 배우는 영화에 대해서는 “잘 만들면”이라는 단서를 굳이 달고야 만다. 그 의뭉스러움이 얄밉지 않은 건 ‘나도 잘 모르겠다’는 엄살 뒤에 다시 한 번 관객의 혼을 빼놓을 회심의 한 방을 뒤에서 준비하는 것을 이제 우리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강철중이나 홍종두처럼 강한 첫 인상으로 캐릭터를 강조하는 작품은 아니라고 하지만 전면부에 드러나지 않고도 속 인물들과 갈등과 조화를 직조하던 그를 기억한다면 정제되지 않은 에너지의 류승범과의 매치는 기대와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공은, 이미 울렸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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