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라는 어휘가 보통명사처럼 사용되고 미국에서 방금 방영된 새 에피소드를 거의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외화 더빙이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오직 공중파만이 외화시리즈를 접할 유일한 채널이던 시대가 남긴, 자막 파일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과거의 유물일까, 아니면 자막 버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대체 불가능한 작업일까. 의견은 제각각일 것이고 취향 역시 제각각일 것이다. 다만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건 아직도 스컬리의 목소리는 배우인 질리언 앤더슨이 아닌 성우 서혜정의 목소리일 때 훨씬 자연스럽게 귀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더빙의 맛은 원작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면서 한국어의 호흡과 정서를 묻어나오게 하는 거 같아요. 자막과는 다른 재미가 있죠.” 요즘의 시청자들에게는 tvN ‘남녀탐구생활’의 독특한 목소리 톤으로 더 유명한 서혜정 성우지만 그녀는 가장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연기파 성우다. 어머니가 틀어놓은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성우의 꿈을 키우던 소녀는 1983년 서울예대 방송연예과 1학년 때 KBS 성우 공채에 1등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실력 있는 대중예술인 대부분이 그렇듯 그녀가 한 사람의 개성과 관점을 가진 성우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대학에서 여자 후배가 남자 선배를 형으로 부르는 시기에 왜 라디오 드라마 에서는 여학생이 청순가련형의 목소리로 “교수님.., 사랑해요”라고 말하는지 의아해하며 그녀는 좀 더 자연스러운 연기를 시도했고, 목소리만으로도 한 인물의 개성이 또렷해질 수 있었다. 그녀가 스컬리 연기를 위해 항상 그날 녹음할 에피소드에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한 이야기는 성우의 메소드 연기를 얘기할 때 아직도 전설처럼 회자된다.
그래서 간호사 역을 맡았던 나 손드라 역의 와 같은 과거의 더빙 작업들은 단순한 번역에 그치지 않고 한국 시청자에 맞는 연기가 결합된 새로운 2차 창작물로 받아들여야하지 않을까. 다음의 작품들은 ‘미드’가 아닌, 그녀가 더빙했거나 혹은 더빙하고 현재 방송을 기다리는 ‘Only Korea’ 버전의 외화시리즈다. 1994년 KBS2
“‘남녀탐구생활’ 이전에 제 이름을 가장 많이 알려준 작품이죠. 멀더 역의 이규화 씨가 동기인 저를 파트너 스컬리로 고르면서 참여하게 됐어요. 사실 질리언 앤더슨의 경우 목소리가 예쁜 편은 아니에요. 상당히 허스키하면서 하이톤이죠. 배우의 목소리를 참고하기보다는 지적인, 좀 푸른빛이 도는 목소리를 디자인했어요. 그걸 베이직으로 깔고 상황에 따라, 가령 해부할 때나 멀더와 사적인 대화를 할 때에 맞춰 약간의 톤 변화를 주는 거죠. 이게 목소리 연기다보니 자신과 닮지 않은 사람일수록 녹음이 어렵지 않느냐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제가 가지지 못한 걸 가진 강단 있고 똑똑한 여자를 연기해서 굉장히 즐겁게 작업했어요.” 2005년 KBS2
“사실 많은 분들이 저를 스컬리의 목소리와 캐릭터로 기억해주시지만 저랑 가장 많이 닮은 건 에서 연기한 수잔(테리 해처)이에요. 사랑에 쉽게 빠지고 허점투성이에 맹한 게 많이 닮았어요. 아무 계산 없이 우선 일을 벌이고 보니 어떤 입장에서는 사고뭉치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저는 그런 면 때문에 수잔이 굉장히 사랑스럽더라고요. 이야기가 조금 무거워질 때 즈음 코믹한 모습으로 활력울 주는 것도 수잔 몫이거든요. 그래서 더 많이 아쉬운 작품이에요. 시청률 반응도 좋았는데 중간에 종영했거든요. 이 작품 끝난 이후 작년까지 외화시리즈물을 더빙한 적이 없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2010년 KBS2
“ 이후 정말 오랜만에 하는 외화시리즈에요. 처음 오디션을 볼 때 주인공인 릴리 러시(캐서린 모리스)가 너무 예뻐서 많이 부담스러웠어요. 그냥 예쁜 게 아니라 눈도 깊은 게 스컬리보다 예쁘더라고요. (웃음) 그런데 오디션에 붙고 나서 시즌 1의 에피소드 하나를 찾아봤더니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터프함이 보였어요. 그래서 목소리 선을 좀 더 굵게 가려고 해요. 여형사라는 면에서 많은 분들이 스컬리를 떠올리는데 스컬리는 현장에 나가지 않고 메스를 들 때도 많잖아요. 그에 반해 릴리는 맡는 건 기본적으로 미해결 사건이고 결국 살인사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캐릭터의 질감은 많이 다른 거 같아요.” 추천작품에서 말한 것처럼 그녀는 1월 10일부터 방영하는 시즌1에서 다수 국내 팬들을 거느린 ‘완소 릴리’ 릴리 러시를 연기한다. “ 때와 달리 이제는 다들 자막 버전을 보고 배우 목소리에 익숙해진 상태라 더빙하기가 더 힘들어요”라고 말하지만 그녀는 오랜만의 외화 더빙 도전 때문에 신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스컬리를 할 때는 제 주위에서 FBI를 만나 자문을 구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릴리는 현장 위주의 여형사 타입이라 지인을 통해 우리나라 여형사를 직접 만나 취재를 좀 하기로 했어요. 릴리처럼 이제 머리카락도 길러야죠.” 그녀의 말처럼 이제 사람들은 인터넷과 케이블을 통해 ‘미드’ 원작 캐릭터의 목소리에 더 익숙해진 게 사실이다. 그들에게 더빙으로 공감을 얻는 건 예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첫 녹음에 들어가기 전 의 첫 에피소드만 열 번을 봤다는 그녀의 노력이 덧씌워진다면 미처 원작이 드러내지 못했던 릴리의 매력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배한성의 맥가이버와 최응찬의 콜롬보 같은 그 대체 불가능한 작업들처럼.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더빙의 맛은 원작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면서 한국어의 호흡과 정서를 묻어나오게 하는 거 같아요. 자막과는 다른 재미가 있죠.” 요즘의 시청자들에게는 tvN ‘남녀탐구생활’의 독특한 목소리 톤으로 더 유명한 서혜정 성우지만 그녀는 가장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연기파 성우다. 어머니가 틀어놓은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성우의 꿈을 키우던 소녀는 1983년 서울예대 방송연예과 1학년 때 KBS 성우 공채에 1등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실력 있는 대중예술인 대부분이 그렇듯 그녀가 한 사람의 개성과 관점을 가진 성우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대학에서 여자 후배가 남자 선배를 형으로 부르는 시기에 왜 라디오 드라마 에서는 여학생이 청순가련형의 목소리로 “교수님.., 사랑해요”라고 말하는지 의아해하며 그녀는 좀 더 자연스러운 연기를 시도했고, 목소리만으로도 한 인물의 개성이 또렷해질 수 있었다. 그녀가 스컬리 연기를 위해 항상 그날 녹음할 에피소드에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한 이야기는 성우의 메소드 연기를 얘기할 때 아직도 전설처럼 회자된다.
그래서 간호사 역을 맡았던 나 손드라 역의 와 같은 과거의 더빙 작업들은 단순한 번역에 그치지 않고 한국 시청자에 맞는 연기가 결합된 새로운 2차 창작물로 받아들여야하지 않을까. 다음의 작품들은 ‘미드’가 아닌, 그녀가 더빙했거나 혹은 더빙하고 현재 방송을 기다리는 ‘Only Korea’ 버전의 외화시리즈다. 1994년 KBS2
“‘남녀탐구생활’ 이전에 제 이름을 가장 많이 알려준 작품이죠. 멀더 역의 이규화 씨가 동기인 저를 파트너 스컬리로 고르면서 참여하게 됐어요. 사실 질리언 앤더슨의 경우 목소리가 예쁜 편은 아니에요. 상당히 허스키하면서 하이톤이죠. 배우의 목소리를 참고하기보다는 지적인, 좀 푸른빛이 도는 목소리를 디자인했어요. 그걸 베이직으로 깔고 상황에 따라, 가령 해부할 때나 멀더와 사적인 대화를 할 때에 맞춰 약간의 톤 변화를 주는 거죠. 이게 목소리 연기다보니 자신과 닮지 않은 사람일수록 녹음이 어렵지 않느냐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제가 가지지 못한 걸 가진 강단 있고 똑똑한 여자를 연기해서 굉장히 즐겁게 작업했어요.” 2005년 KBS2
“사실 많은 분들이 저를 스컬리의 목소리와 캐릭터로 기억해주시지만 저랑 가장 많이 닮은 건 에서 연기한 수잔(테리 해처)이에요. 사랑에 쉽게 빠지고 허점투성이에 맹한 게 많이 닮았어요. 아무 계산 없이 우선 일을 벌이고 보니 어떤 입장에서는 사고뭉치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저는 그런 면 때문에 수잔이 굉장히 사랑스럽더라고요. 이야기가 조금 무거워질 때 즈음 코믹한 모습으로 활력울 주는 것도 수잔 몫이거든요. 그래서 더 많이 아쉬운 작품이에요. 시청률 반응도 좋았는데 중간에 종영했거든요. 이 작품 끝난 이후 작년까지 외화시리즈물을 더빙한 적이 없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2010년 KBS2
“ 이후 정말 오랜만에 하는 외화시리즈에요. 처음 오디션을 볼 때 주인공인 릴리 러시(캐서린 모리스)가 너무 예뻐서 많이 부담스러웠어요. 그냥 예쁜 게 아니라 눈도 깊은 게 스컬리보다 예쁘더라고요. (웃음) 그런데 오디션에 붙고 나서 시즌 1의 에피소드 하나를 찾아봤더니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터프함이 보였어요. 그래서 목소리 선을 좀 더 굵게 가려고 해요. 여형사라는 면에서 많은 분들이 스컬리를 떠올리는데 스컬리는 현장에 나가지 않고 메스를 들 때도 많잖아요. 그에 반해 릴리는 맡는 건 기본적으로 미해결 사건이고 결국 살인사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캐릭터의 질감은 많이 다른 거 같아요.” 추천작품에서 말한 것처럼 그녀는 1월 10일부터 방영하는 시즌1에서 다수 국내 팬들을 거느린 ‘완소 릴리’ 릴리 러시를 연기한다. “ 때와 달리 이제는 다들 자막 버전을 보고 배우 목소리에 익숙해진 상태라 더빙하기가 더 힘들어요”라고 말하지만 그녀는 오랜만의 외화 더빙 도전 때문에 신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스컬리를 할 때는 제 주위에서 FBI를 만나 자문을 구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릴리는 현장 위주의 여형사 타입이라 지인을 통해 우리나라 여형사를 직접 만나 취재를 좀 하기로 했어요. 릴리처럼 이제 머리카락도 길러야죠.” 그녀의 말처럼 이제 사람들은 인터넷과 케이블을 통해 ‘미드’ 원작 캐릭터의 목소리에 더 익숙해진 게 사실이다. 그들에게 더빙으로 공감을 얻는 건 예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첫 녹음에 들어가기 전 의 첫 에피소드만 열 번을 봤다는 그녀의 노력이 덧씌워진다면 미처 원작이 드러내지 못했던 릴리의 매력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배한성의 맥가이버와 최응찬의 콜롬보 같은 그 대체 불가능한 작업들처럼.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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