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계상│나를 채워준 영화들
윤계상│나를 채워준 영화들
윤계상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가 가장 많이 쓴 단어는 ‘진짜’, ‘진정성’, ‘진심’이다. 진짜 연기를 하고 싶고, 사람들에게 배우의 진심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그는 마치 세차게 흔들어 놓은 콜라병 같았다. 4편의 영화를 찍고 4편의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았음에도 윤계상은 아직도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신인처럼 부글거리고 있었다. “한동안 사람들을 만날 때 제 히스토리를 얘기하는 버릇이 있었어요. 2시간씩이나. (웃음) 내가 왜 연기를 시작했고, 어떤 열정이 있는지를. 그렇게 안 하면 누구도 절 배우로 생각을 안 해줬으니까요. 가수하다 잠깐 연기하는 거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게 너무 싫었어요.” 윤계상은 god라는 최고의 아이돌로 6년의 시간을 보낸 뒤 연기자로 데뷔했고, 로 보여준 가능성이 여물기도 전에 갑작스레 군 입대를 했다. 세상과 단절된 채 20대를 마무리한 것처럼 보인 동안 그는 “매일 책을 읽고, 발음과 발성 연습을 하고 진지한 눈빛을 가지려고 3일 동안 잠도 안 자보는 실험”을 거듭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나온 윤계상의 선택은 결코 가벼울 수 없었다.

으로 멋진 연인의 모습이 아닌 오랜 연애에 지친 찌질한 남자친구의 전형을 보여주더니 로는 청담동 호스트바의 에이스로 무너져가는 청춘을 보여줬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해요. 니가 연기파도 아닌데 왜 이런 영화만 찍냐. 좀 달달한 거 해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솔직히 흔들리죠. 그런데 연기로 행복해지려고 마음먹은 이상 타협을 못하겠어요.” 덕분에 를 끝내고는 주변에서 우울증을 걱정할 만큼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어떤 작품에서보다 편하고 즐거워보였던 의 현태를 통해 윤계상은 다시 처음의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자신의 얘기를 하기보다 장점을 사람들에게 먼저 보여줄 수 있는” 로 연기의 재미를 깨달았고, 지금은 한결 여유로워졌다며 웃는다. 그리고 그 여유로움은 그대로 에서 박인환, 조재현 등의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 했지만 결국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추로서 무게를 잃지 않은 신입 교도관 재경을 만들어냈다.

혼자 있을 때에도 이야기를 만들어보거나 좋다는 영화의 DVD를 구해보는 그는 그렇게 수많은 영화들과 함께 하며 자라났다. 유난히 공상에 빠지는 적이 많았던 초등학생은 을 보고 생애 처음으로 감동이라는 것을 느꼈고, 배우가 된 이후에는 연기파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질투심에 잠 못 이루기도 했다. 그리고 이별에 아파할 때는 아름다운 사랑 영화를 보고 다시 사랑을 긍정할 수 있었다. 다음은 배우가 되기 이전에도 배우 이후에도 그를 채워주고 있는 영화들이다.
윤계상│나를 채워준 영화들
윤계상│나를 채워준 영화들
1. (A Better Tomorrow)
1986년 | 오우삼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감동받았던 영화예요. 초등학교 때 보고 나서 엄마한테 선글라스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고. (웃음) 거기 나오는 사람들이 너무 멋있어서 존재하지 않는 신처럼 느껴졌어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고 현실세계에서 불가능한 명분으로 움직이잖아요. 어린 마음에 ‘나도 저렇게 의리에 죽고 살아야지. 우정이 최고야!’ 라고 생각했죠. (웃음)”

1980년대 극장가와 비디오 가게에 홍콩영화가 끊이지 않게 한 출발점이 된 . 영화를 본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따라하고 싶게 만든 선글라스, 성냥개비 등 한 편의 흥행작을 넘어 시대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목숨을 걸면서까지 지켜낸 의리는 주윤발이라는 영웅을 만들어냈고, 무수한 명장면을 탄생시켰다. 지폐로 담뱃불을 붙이는 주윤발은 돈 따위로 살 수 없는 우정을 지상 최대의 가치로 여겼던 남자들이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윤계상│나를 채워준 영화들
윤계상│나를 채워준 영화들
2. (Revolutionary Road)
2008년 | 샘 멘데스
“마지막 장면 직전에 케이트 윈슬렛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아침 식탁에서 한 연기는 정말 최고였어요. 케이트 윈슬렛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이기도 해요. 그 때 그 둘의 연기는 정말이지… 진정성 그 자체죠, 가짜가 아니라는 게 느껴지잖아요. 아마 그 정서는 30대가 넘어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결혼을 앞둔 커플이 절대 봐서는 안 되는 영화죠. (웃음)”

서로를 닮은 모양새의 집들이 늘어선 레볼루셔너리 로드. 그곳에는 그 집들처럼 비슷비슷한 부부들이 산다. 적당한 직장에 다니고, 간간히 가벼운 외도를 저지르고, 자주 서로 다투는 이 부부들은 크게 다르지 않은 서로의 모습에서 위안을 찾는다. 그러나 이 위안의 틀을 깨려는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과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둘러싸고 작지만 치명적인 균열이 일어난다. 출중한 연기력과는 별개로 유난히 상복이 없었던 케이트 윈슬렛에게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안겨 주었다.
윤계상│나를 채워준 영화들
윤계상│나를 채워준 영화들
3. (Good Will Hunting)
1997년 | 구스 반 산트
“맷 데이먼을 좋아해요. 아직도 기억이 나는 장면은 역시 로빈 윌리엄스가 맷 데이먼에게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괜찮은 거야”라고 말할 때죠. 소름이 돋으면서 울컥 눈물이 났어요. 아마 영화 보면서 처음 울었을 거예요. 상처받은 사람들은 그렇거든요, 거짓말하고, 아니라고 자신에게 얘기하고 그러지만, 결국 그 상처 때문에 힘들었고 아팠는데, 그 아픈 것 때문에 강해지려고 하는 거잖아요. 아닌 척 하고. 그런 걸 잘 표현한 것 같아요.”

학대받았던 어린 시절을 극복하지 못한 윌(맷 데이먼)은 툭하면 싸움을 일삼고, 대학의 청소부 말고는 주어진 일도 없다. 그러나 MIT의 수재들도 못 푸는 수학문제를 손쉽게 풀고, 교수조차 기죽게 하는 그의 천재성은 눈에 띌 수 밖에 없다. 역시나 아내를 잃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심리학 교수 숀(로빈 윌리엄스)과의 대화로 조금씩 세상과 화해해나가는 윌이 마침내 낡은 집을 떠나는 순간, 우리는 생의 희망을 볼 수 있다. 할리우드의 소문난 단짝 맷 데이먼과 밴 애플렉이 함께 시나리오를 썼고 아카데미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윤계상│나를 채워준 영화들
윤계상│나를 채워준 영화들
4. (Raging Bull)
1980년 | 마틴 스콜세지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영화예요. 물론 로버트 드니로의 연기 때문이죠. 배우가 온 힘을 다해서 연기하고 있다고 할 만한 연기는 평생 연기를 해도 몇 편 없는 것 같아요. 근데 에서 로버트 드니로는 그게 보였어요. 저 같은 배우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모를 정도로요. (웃음) 고민이 되는 영화였죠. 배우를 관둬야하나 생각할 정도로. 게다가 제가 하고 싶은 연기를 이미 로버트 드니로 같은 배우가 몇 십 년도 전에 다 했으니 기력이 빠졌죠, 어떡하지? 다시 가수를 해야 되나? 할 정도로요. (웃음) 그만큼 너무 훌륭한 연기였죠.”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이 흐르며 링 위에서 섀도우 복싱을 하는 복서의 모습은 아름답고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후 펼쳐지는 ‘성난 황소’라 불렸던 사나이의 삶은 오프닝 신을 철저히 배신한다. 영화는 실제 40년대 미들급 챔피언이었던 권투선수 제이크 라 모타가 성공하고 무너지기까지의 20여년을 담았다. 그는 정상의 자리에 오르지만 의처증과 가족마저 괴롭히는 폭력문제로 은퇴 후 디너쇼를 전전하는 외로운 신세가 된다. 실제 20여킬로를 찌웠다 빼며 한계점이 없는 연기를 보여준 로버트 드니로에게는 아카데미가 남우주연상의 챔피언 벨트를 선사했다.
윤계상│나를 채워준 영화들
윤계상│나를 채워준 영화들
5. (Be With You)
2004년 | 도이 노부히로
“에는 사랑에 대한 저의 판타지가 담겨 있어요. 원래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은 ‘삶이라는 게 그렇게 꿈으로 이루어져있지 않아. 굉장히 현실적이고, 깨끗하지 않아’ 이렇게 말하고 있죠. 근데 이 영화는 ‘아니야, 그래도 세상은 좋을 수도 있어’라고 말하고 있어요. 보는 사람을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긍정적인 이야기에 화면도 예쁘고 등장인물들의 마음도 너무 예뻤고. 제가 사랑에 약간 힘든 때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굉장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사랑을 한다면 미오와 타쿠미 같은 사랑을 하고 싶은 로망이 있죠.”

모든 일에 서툰 남편과 귀여운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난 미오(다케우치 유코)는 비의 계절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후 1년 뒤, 장마가 시작된다. 분명 죽었던 아내가 살아 돌아와 다시 사랑에 빠진 후 떠난다는 이야기는 판타지이지만 사랑에 있어 이보다 더 현실적일 수 없는 교훈을 준다. 사랑은 ‘당신을 영원히 행복하게 해줄게’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만이라도 행복하게 지내야겠구나’라는 것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만나러 가야한다는 것을.
윤계상│나를 채워준 영화들
윤계상│나를 채워준 영화들
“의 재경이는 지금의 저와 비슷해요. 요즘은 연기를 우연찮게 시작한 처음의 판타지가 많이 깨진 상태고, 열정만으로는 불가능하단 걸 느끼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연기를 하게 되거든요. 재경이도 어쩌다보니 교도관이 된 건데, 사건에 휘말리면서 정말 극한 상태까지 가잖아요. 30년을 해도 사형집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도 재경이는 한 달 만에 겪으니까. 그럼에도 재경이도 다시 추스르고 살아가요.” 그렇게 좌절하고 부딪혔던 자신을 추스르며 윤계상은 청춘의 여러 얼굴들을 만들어왔다. 그렇게 윤계상이 만들어낸 청춘들은 불완전하기에 멋진 성공을 이루거나 해피엔딩을 맞지는 못했다. 그러나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할 강박에 시달리지 않고, 실패해도 그저 또 다음 작품을 위해 살아가는 윤계상에겐 그 때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세차게 흔들어댄 콜라병의 뚜껑을 열어 시원한 청량감을 느낄 때가. 진정성 있는 연기에 대한 그의 갈증이 해갈되는 순간 관객들도 또 한 명의 진짜 배우를 갖게 될 것이다.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