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신기한 배우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어떨 땐 1등도 하고 어떨 땐 꼴찌도 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말 같은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MBC ‘무릎 팍 도사’에 나와 밝힌 조재현의 꿈은, 그래서 ‘이뤘다’는 완료시제로 서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악어>, <야생동물보호구역> 같은 김기덕 감독의 초기작부터 출연해 <나쁜 남자>에서 방점을 찍으며 김기덕의 페르소나로 불리던 그는 가장 대중적 연출자인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에 출연하고, 시청률 30%의 대박 드라마 <뉴하트>의 최강국 역할을 소화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측할 수 없는 갈지자 행보이긴 하지만, 그의 꿈은 그 지점에서 다시 새로운 발걸음을 옮기는 현재진행형의 시점에서만 온전히 ‘이루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극 시장의 파이를 키우기 위해 기획된 <연극열전>의 프로듀서이자 프로그래머로 활동하던 그가 역시 비주류 장르라고 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시장을 위해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게 된 것은 그 현재진행형의 움직임이다. “<연극열전>도 그렇지만 이번 영화제를 통해 다큐멘터리 영화를 찾아보는 인구가 확 늘어날 거라고 기대하진 않아요. 하지만 이렇게 자극을 주고 꾸준히 영화제를 이어가면 언젠가 큰 이익은 남기지 않더라도 선순환이 가능한 시장이 만들어지겠죠.” 그래서 ‘삶의 결이 숨 쉬는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이번 테마는 정확히 말해 <나쁜 남자>, <뉴하트>의 배우 조재현보다는 다큐멘터리 영화제 집행위원장 조재현의 추천작에 가깝다. 그는 항상 ‘지금, 이곳’이라는 현재진행형의 지점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에게 기대한 그 어떤 주제보다 의외인 이번 테마는 그래서 더 조재현과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1. <작별> (Farewell)
2001년 │ 황윤

“제가 직접 예고편 내레이션을 맡았던 영화이기도 해요. 평소에도 워낙 <동물의 왕국> 같은 동물 관련 다큐멘터리를 좋아해서 내레이션 제의를 선뜻 수락했죠. 몸이 약한 새끼 호랑이를 비롯해 동물원에 갇힌 야생동물들의 모습을 그냥 담담하게 담아내는 시선이 굉장히 신선했어요. 어떤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갇혀 있는 동물의 답답함이 더 잘 느껴졌던 것 같아요. 같이 개봉했던 <어느 날 그 길에서> 역시 같이 보면 좋은 동물 다큐멘터리에요.”

어린 시절 동심의 장소라고 할 수 있는 동물원은 과연 우리의 생각만큼 순수하고 맑은 곳일까. 적어도 <작별>의 황윤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근친교배로 태어나 날 때부터 백태가 끼는 증상을 가지고 있는 새끼 호랑이 크레인은 귀여운 강아지에 가까운 성격이지만 위풍당당한 호랑이를 필요로 하는 동물원 입장에선 사람이 좋다고 달라붙는 크레인을 못마땅해 한다. 즉 우리가 동물원에서 확인하는 야생동물의 야성이라는 것은 순수하다기보다는 소비를 위해 강요되고 있다는 것을, 동물원이란 결코 동물과 인간의 사이좋은 교류의 장이 아닌 인간의 구경을 위한 장소라는 것을 <작별>은 보여준다.

2. <우리 학교> (Our School)
2006년 │ 김명준

“저는 개인적으로 다큐멘터리가 뭔가 어떤 시각을 정해놓고 사건을 담아내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물론 재미나 감동을 위해 어느 정도 작가의 시각이라는 게 필요하겠지만요. 그런 면에서 <우리 학교>는 일본 땅에서 살아가는 재일 조선인 학생들의 명랑한 일상을 잡아내서 참 좋았어요. 재일 조선인 3세의 정체성에 대한 고뇌와 차별, 뭐 이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딱 그 나이 아이들다운 모습을 보여주잖아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다큐멘터리의 미덕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학교>는 홋카이도에 있는 조선초중고급학교에서 벌어지는 교원과 학생들의 일상을 담아낸다. 그들에게 조선학교는 ‘우리 학교’이고, 한글은 ‘우리 말’이다. 혹자는 영화 에서 “왜 나를 자이니치(在日)이라 부르느냐”고 외친 스기하라를 떠올리며 ‘우리’라는 민족 개념에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학교>에서 중요한 건 민족이라는 개념이 아니다. 일본에 귀화하지도, 그렇다고 북한이나 한국 국적을 가진 것도 아닌 <우리 학교> 속 학생들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우리’라는 정체성을 필요로 한다. 즉 이 영화는 민족에 대한 영화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영화도 아닌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주변부의 삶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청춘들에 대한 기록에 가깝다.

3. <예닌의 심장> (The Heart of Jenin)
2008년 │ 레온 겔러, 마르쿠스 베터

“이 작품은 제가 집행위원장을 맡은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 개막작이에요. 꼭 저희 영화제에 소개되어서가 아니라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그만큼 좋은 영화에요. 이스라엘 군 총에 맞아 죽은 아이의 장기를 12시간 만에 6명의 이스라엘 아이들에게 기증한다니, 딱 이 정도만 들어도 전율이 오지 않나요. 가끔은 이렇게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이 그 어떤 각본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것 같아요.”

아마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가 아니었다면 많은 관객들은 억지스러운 각본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스라엘 군의 총격 때문에 죽은 팔레스타인 소년의 아버지가 장기 기증이 필요한 이스라엘 아이들을 위해 아이의 장기를 기증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극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토록 극적인 소재를 이용해 쉽게 화해와 용서를 말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서로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과정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며 이토록 피폐한 관계 안에서 선택 가능한 길은 무엇이 있는지 담담히 질문한다.

4. <맨 온 와이어> (Man on Wire)
2003년 │ 제임스 마쉬

“이것도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작품인데 <예닌의 심장>처럼 슬프고 심각한 영화는 아니에요. <맨 온 와이어>라는 제목 그대로 이 영화는 외줄을 타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에요.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 외줄타기요. 지금은 무너져버린 뉴욕 쌍둥이 빌딩이 만들어지기 전, 그런 건축물이 들어설 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 외줄타기 예술가가 두 빌딩 사이에 외줄을 놓고 건널 계획을 세우고, 실제로 실현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아낸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이죠. 건축물과 공간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 국내 건축가들이 상당히 기대하는 작품이란 얘기도 들었어요.”

<맨 온 와이어>의 실제 주인공 필리페 페팃에게 어째서 목숨을 걸고 고층 빌딩 사이에서 외줄을 타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에게 외줄 타기는 목숨을 건, 언제나 마지막일 수 있는 예술 활동이다. 때문에 그에게 중요한 건 어째서 하느냐가 아닌, 어떻게 건너느냐다. 그것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 행동에 수반한 이익을 계산하는 현대인들에겐 굉장히 낯선 정서다. 하지만 페팃의 도전은 바로 그 경제적인 효율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걸 한다는 점에서 보는 이에게도 자유로운 감정을 선사한다.

5. <경계도시> (The Border City)
2002년 │ 홍형숙

“얼마 전 폐막한 제 1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소개된 <경계도시 2>의 전편이라고 할 수 있죠. 독일에서 세계적 석학으로 성장한 송두율 교수와 그의 부인이 유학 32년만에 귀국을 시도하지만 간첩 혐의 때문에 좌절되는 과정을 담았는데 오히려 교수님이 굉장히 담담한 태도를 보이셔서 좀 놀랐어요. 굉장히 부조리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그에 대해 분노하고 반박하기보다는 그냥 그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네요.”

세계적 석학 위르겐 하버마스의 제자이자 학문적 동료인 송두율 교수지만 아마 국내에선 37년만에 금의환향했다가 1주일 만에 구속 수사를 받은 어떤 기구한 학자로 더 잘 알려졌을 것이다. <경계도시 2>가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구속 사건을 다뤘다면 <경계도시>는 그 이전, 통일상 수상자로 결정되어 남한 귀국에 대한 모든 것을 약속받았던 송두율 교수 내외가 결국 모든 것이 취소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망연자실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송두율 교수가 살던 베를린은 한 때 분단의 상징인 경계도시로 불렸다. 하지만 이제 진정한 경계도시는 서울이 아닌지 묻는 이 영화의 문제제기는 <경계도시 2>에서 볼 수 있듯 아직 유효하다.

예측은 어려워도 결코 설렁설렁하지 않은 행보

“<연극열전>이나 이번 영화제처럼 제가 뭔가를 책임진 것들에 대해선 계획적으로 움직여야겠지만 연기에 있어서는 저도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 우선은 이번에 연출을 맡아 무대에 올리는 <에쿠우스>가 끝나면 영화를 하고 싶은데 만약 절 자극하는 드라마가 있으면 드라마를 할 수도 있고요.”

사형에 대한 이야기를 사형수가 아닌 사형집행자의 시각에서 그린 <집행자>가 개봉했지만 조재현은 그 이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계획과는 거리가 멀지만 결국 새로운 무언가를 하겠다는 다짐이자 신발을 고쳐 매는 준비 동작이다. 그래서 그 때 그 때 끌리는 것을 찾아 움직이는 조재현의 걸음걸이는 마치 한량의 그것처럼 휘적휘적 예측하기 어렵지만 결코 설렁설렁하진 않다. 그는 걷기 무섭게 새롭게 발 디딜 땅을 찾지만 그 뒤편에는 언제나 깊숙이 파인 발자국이 남겨져있다. 그 갈지자의 궤적과 이제 또 새롭게 디딜 지점 사이에서 그는 언제나 힘 있는 한 발을 내디딜 현재진형형의 신기한 배우로 살고 있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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