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민 감독의 드라마는 아름답다. 그를 대중에게 처음으로 널리 알렸던 2003년 KBS <상두야 학교 가자>는 비루한 제비의 삶 속에서,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처절하도록 슬픈 러브 스토리에서, <눈의 여왕>은 세상의 궤도에서 이탈한 외로운 주인공들의 성장에서 아슬아슬한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최근 극장 개봉한 한일 합작 프로젝트 텔레시네마 <천국의 우편배달부>에서도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판타지에 독특한 아름다움을 부여했다.

하지만 이형민 감독의 작품이 아름다운 그림들로만 이루어진 영상집은 아니다. <닥터 지바고>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서사가 있는 멜로에 푹 빠진 십대 소년이었던 그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대학원에서도 찰스 디킨즈의 작품 세계에 파고들던 도중 “가세가 갑자기 기우는 바람에” 직장을 찾다가 방송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소리와 그림으로 이루어지는 영화와 달리 대부분 대사로 이루어져 있는 드라마의 문법에서 조금 벗어나, 될 수 있으면 일반적인 촬영 기법과 엇박으로 뭔가를 해보고 싶다”던 이형민 감독의 바람은 그의 작품이 남다른 영상미와 흡인력 있는 이야기를 갖추는 밑바탕이 되었다. “저는 사실 비주얼보다 내러티브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리얼한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방송이다 보니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기는 좀 어렵지요.” 그래서 청주 여자 교도소를 찾아가 재소자들 사이에 섞여 촬영했던 그의 데뷔작 <드라마시티> ‘여자 교도소 이야기’처럼 이형민 감독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화면 사이에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힌트처럼 숨어 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무혁(소지섭)이 노래방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신이 있어요. 대본에는 록음악이라고 되어 있는데 제 나이가 나이다 보니 입양아, 혹은 한국에 살면서도 세상에 불만 있는 사람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약간 ‘개기는’ 느낌으로 해본 거지요. 나중에 편집하는 분이 ‘이제 음악 바뀌고 키스신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땐 시청률이 잘 나올 때라 ‘그냥 갑시다’ 했어요. (웃음)”

그래서 스스로를 가리켜 ‘장사 안 하는 듯 하며 장사하는 사람’이라며 웃는 이형민 감독은 연출이라는 직책에 대해서는 ‘멍석 까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작품의 어머니는 작가고 연출은 이야기를 잘 표현하는 사람이어야 해요. 좋은 스태프와 좋은 배우들이 잘 놀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거지요.” 그리고 <상두야 학교 가자>, <미안하다 사랑한다>, <눈의 여왕>이 모두 다른 감독의 작품처럼 보이길 원했을 만큼 계속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그가 소개한 다양한 색깔을 지닌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美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The incredible Hulk) 1978~1982년 CBS
“초능력 개발 실험을 하다 감마선을 쬐는 바람에 분노하면 헐크로 변신하는 과학자 데이빗 배너 박사가 살인자로 몰려 쫓겨 다니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주인공이 떠돌며 접시닦이나 웨이터 같은 허드렛일을 할 때마다 미국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과 마주치게 돼요. 그래서 그 문제와 맞서 싸우던 주인공이 위기에 몰렸을 때 헐크로 변신하면서 상황은 해결되지만 그 자신은 또 쫓겨 도망가게 되지요. 헐크가 싸우는 것도 신이 났지만 그보다 그가 헐크로 변신하기까지의 과정이 인상적이었어요. 엔딩에서는 늘 몸이 다시 왜소해진 데이빗 배너 박사가 옷을 추스르며 추운 새벽 국도 주변에 나와 히치하이킹을 해서 도시를 떠나는데, 그 순간 흐르던 쓸쓸한 피아노곡이 아직도 기억나요.”

MBC <네 멋대로 해라>
2002년 극본 인정옥, 연출 박성수

“제가 조연출을 거쳐 단막극을 만들던 시절 미니 시리즈는 미남 미녀 스타들이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사랑하는 이야기의 전성시대였어요. 그런 걸 보며 ‘아무래도 난 미니 시리즈는 못 하겠다, 단막극만 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랬던 저에게 힘을 줬던 게 SBS <피아노>와 MBC <네 멋대로 해라>였는데, 특히 <네 멋대로 해라>에는 속 시원한 자유로움이 있었어요. 뻔한 스토리나 겉멋이 아니라 일상적이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캐릭터들에 공감이 갔고 대사와 정서도 참 좋았어요. 미래와 전경, 복수와 복수 엄마의 관계에서도 기존의 드라마와 다른 느낌이 드러나던 순간들이 생생하게 떠올라요. 저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품이지요.”

日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름> (愛なんていらねえよ、夏) 2002년 TBS
“좋은 연극 대본이나 소설 같은 깊이가 있는 드라마에요. 호스트 출신의 레이지(와타베 아츠로)가 장님이 되어 가는 재벌가 상속녀 아코(히로스에 료코)의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가짜 오빠로 행세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인데, 감정의 디테일을 강하게 밀고 들어가는 느낌들이 참 좋았어요. 2회 엔딩에서 레이지가 자기를 오빠로 인정하지 않는 아코를 죽이려고 하는데 마침 그 때부터 오빠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아코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에게 ‘나 좀 죽여줘’라고 말하는 순간의 감정. 그리고 후반으로 가면서 드러나는 반전까지 아주 힘이 있고 연출, 극본, 연기 모두 탁월해서 보는 내내 ‘야, 대단하다. 내가 저 정도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요. (웃음)”

“우리 이야기가 거짓말이라 해도 유익한 거짓말이면 좋겠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후 KBS를 나와 프리랜서로 일하던 이형민 감독은 얼마 전 자신의 회사인 ‘굿 스토리’를 만들었다. 일견 평범한 이름처럼 보이지만 그 배경은 흥미롭다. “영화 <스모크>에서 매일 가게에 담배 두 갑을 사러 오는 작가 폴이 가게 주인 오기 렌에게 뉴욕 타임즈에 쓸 만한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있느냐고 물어 봐요. 그러자 오기 렌은 그 전에 언뜻 봤던 신문 기사를 떠올리며 거짓말을 만들어내는데, 그게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요. 그 얘기를 다 듣고 나서 폴이 ‘잇츠 굿 스토리’라고 말하지요. 제가 만들고 싶은 드라마도 그런 거예요. 우리의 이야기가 팩트는 아니라 거짓말이라 해도 세상 사람들에게 유익한 거짓말이면 좋겠다는 거지요”

그런 굿 스토리의 첫 번째 작품이자 그의 차기작은 내년 상반기 무렵 방송될 예정이다. “색깔 있는 멜로에요. 양파 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새로운 면들을 보여 줄 거예요.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 같은 역할을 젊은 남자가 맡는다고 하면 되려나? (웃음) 장르나 소재를 넘어 인간의 욕망에 대해 깊이 들어갈 생각이에요. 지금 한국 사회의 사람들이 많이 고민하는 지점도 건드리고 싶구요.” 들을수록 점점 흥미로워지는, 좋은 이야기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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