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현빈의 웃는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에서 그가 출구 없는 가난과 괴로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과대망상증에 걸려 정신병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남자를 연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2004년 MBC <아일랜드>로부터 시작해 KBS <눈의 여왕>, <그들이 사는 세상>, MBC <친구, 우리들의 전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 대부분은 무언가에 짓눌려 있거나 어딘가에 막혀 있었다. 심지어 로맨틱 코미디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조차 가슴 한켠에 깊은 아픔을 지니고 있는 남자를 보여주었던 현빈은 그래서 불과 스물여덟이라는 나이에도 보기 드물게 무게감 있는 배우로 손꼽히게 되었고, 그와 대화를 나눈 시간 역시 그 묘한 깊이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실제의 현빈은 자주 웃었다.

작년 이맘 때 <그들이 사는 세상> 촬영 현장에서 만났는데 벌써 1년이 지났다.
현빈:
요즘 너무 정신없다. 난 원래 이렇게 바쁘게 일하는 사람이 아닌데 좋은 작품을 선택하고, 또 그 다음 작품을 만나다보니 1,2년 동안 계속 풀로 달리고 있다.

“<나는 행복합니다>는 한마디로 밤에 술 먹고 싶어지는 기분”

사실 <나는 행복합니다>는 <그들이 사는 세상> 이전에 촬영을 마친 작품이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발표된 이후 1년이 지나서 다시 보니 어떤가.
현빈:
답답한 건 똑같았다. (웃음) 대신 부산 영화제 때는 집중해서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못 봤던 부분들을 더 보게 돼서 새롭긴 했다.

답답하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현빈:
영화 자체가 푹 가라앉아 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괜히 밤에 술 먹고 싶어지는 기분? (웃음)

그런데 그 가라앉은 이야기를 선택한 게 본인이다. (웃음) 일단 故 이청준의 원작 소설인 <조만득 씨>의 주인공은 30대 중후반의 남자고, 그가 처해 있는 상황 또한 굉장히 고통스럽다.
현빈:
원작보다 영화 시나리오를 먼저 봤는데, 사실 시나리오 자체도 지금 완성된 영화에 비해 주인공의 나이대가 높고 상황도 좀 달랐다. 그런데 어두운 이야기지만 웃으면서 읽었다. 웃겨서가 아니라 실소를 머금고 본 건데 그렇다면 그게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 묘한 매력 때문에 감독님께 꼭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행복합니다>의 만수는 미치기 전에도 눈빛이 무기력하다. 끝이 보이지 않게 고통스럽고 가난한 삶이고, 심지어 드라마틱한 사연의 소유자도 아니다. 대중성이 강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작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도 명확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이유가 뭔가.
현빈:
기존의 다른 작품들과 시나리오의 느낌이 달랐다. 사실 내가 만수를 잘할지 못할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굉장히 무책임한 얘기이긴 한데 ‘저 잘할 수 있어요. 시켜주세요’가 아니었다. 잘할 자신이 없다고 감독님께 솔직히 말씀드렸고, 대신 열심히는 하겠다고 했다. 연기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생각이 틀리진 않았던 것 같다.

배웠다는 건 이를테면 어떤 건가.
현빈:
그런 게 있다. 어느 순간 한번쯤 나를 돌이켜봐야 하는 시점, 그게 이 작품을 통해 제 때 맞춰서 온 거다. <나는 행복합니다>를 찍으며 스스로에게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봤다. 행복, 나 자신, 내 직업 같은 것들에 대해. 물론 결론은 나지 않았다. (웃음) 파도 파도 끝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 2, 3개월의 시간이 나에게는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 보는 분들이 내 연기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지는 모르지만 그걸 떠나 개인적으로는 더 많은 걸 얻은 시간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모두 미쳐 있다”

그동안 <아일랜드>의 강국이나 <눈의 여왕>의 태웅처럼 보통 사람이라면 미쳐버릴 법한 상황에서도 거의 강박적으로 이성을 통해 감정을 억누르는 캐릭터들을 주로 연기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아예 미친 사람을 연기했다. 맨 정신으로 ‘정신 줄을 놓아 버린’ 연기를 하는 경험은 어땠나.
현빈:
괴로웠다. 감독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촬영하는 내내 너무 힘들고 괴로웠다. 그런데 신기한 게, 그 고통과 괴로움 안에서 점점 재미를 찾아가게 됐다는 거다. 사실 그동안 연기했던 캐릭터들은 내 안에 있는 어떤 면을 끌어내거나 좀 더 과장해서 만들어낸 경우가 많았지만 만수라는 캐릭터는 실제의 나와 접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상황이나 성격 등 모든 면에서. 그래서 눈빛과 동작 하나, 손가락을 까딱 움직이는 타이밍까지 감독님과 상의하며 만들어갔다. 힘든 시간을 버티게 해준 건 오히려 그런 작업이었다.

만수가 전기충격 치료를 받는 장면 같은 경우는 보는 사람에게도 그 고통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소리를 내지 못하는 채로 목에 핏대가 서고 얼굴이 점점 벌개지는 순간이 인상적이었다.
현빈:
정신병과 관련된 영화와 책을 보고, 실제로 병이 있는 환자를 만나고 감독님으로부터 들은 정보까지 종합해 여러 가지 상상을 한 뒤 침대 위에 묶여있을 때는 온 몸에 전해지는 그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까 생각했다. 얼굴이 점점 빨개지는 건 진짜로 숨을 참아서인데, 도중에 한 번 마우스피스를 뱉어낸 것도 숨이 멈춰서 그렇다.

그렇게 공부를 해본 결과, 소위 말하는 ‘정상인’과 정신병자를 나누는 기준은 뭐라고 생각하나.
현빈:
그냥 좀 더 심한 것과 덜한 것의 차이인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모두 미쳐 있다. 무엇에 얼마나 미쳐있느냐의 차이고, 그걸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눠지는 거다.

그렇다면 본인이 남보다 좀 ‘많이 간다’ 싶은 면은 없나. (웃음)
현빈:
그 정도까지 가는 건 특별히 없는 것 같다. (웃음)

일중독이란 말을 들을 법도 한데.
현빈:
아니다. 요즘이 특별한 케이스다. 나는 신인 때도 믿을 구석 하나 없으면서 한 작품 끝나면 6개월씩 쉬었다. (웃음)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정리. 장경진 (thre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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