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이름은 만수다. 지방 소읍의 정비소에서, 월세 대신 보증금을 까먹으며 밀린 청구서와 고지서에 치어 살고 있다. 도박에 미친 형이 몇 푼 되지도 않는 생활비를 뜯어가고, 오랫동안 치매를 앓아온 어머니가 잠든 밤에는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오토바이로 한산한 국도를 달려가 심야 극장에서 멍한 눈으로 액션 영화에 빠져든다. 남자가 구부정한 어깨로 오물이 묻은 빨랫감들을 물에 헹궈낸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먼지 낀 세탁기에 집어넣고 느릿하게 작동 버튼을 누르는 긴 침묵의 시간 동안 그가 지고 있는 지독한 일상의 무게는 보는 이의 가슴을 짓누른다. 그 고통스럽고 가난하며 비루한 삶, 로맨틱함의 부스러기조차 찾을 길 없는 남자의 일상으로 무심히 걸어 들어간 이는 이름부터 만수와는 백만 광년쯤 떨어져 있는 듯한 현빈이다. 반쯤 풀었다고 생각했던 수학 문제가 어느 순간 갑자기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 그래서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의 현빈은 또다시 알다가도 모를 배우가 되어 저만치 가버린다.

언제나 0에서 다시 시작하는 배우

현빈은 예측하기 어려운 배우다.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은 단지 그가 KBS <그들이 사는 세상>보다 먼저 촬영했던 <나는 행복합니다>가 MBC <친구, 우리들의 전설>보다도 늦게 세상에 공개되었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다. 현빈은 언제나 0에서 다시 시작하는 배우였다. MBC <논스톱 4>의 모범생 청춘스타는 <아일랜드>에서 아픈 이들에게 헌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강국이 되었고,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는 세상 모든 로맨스 소설 남자 주인공의 매력은 다 모아놓은 것 같은 남자 현진헌으로 변신했다. 배우가 평생 한 번 만나기도 쉽지 않은 강렬한 캐릭터를 둘이나 얻으며 세상 모든 여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었을 때 그는 고작 스물넷이었지만 이 화사한 얼굴의 미청년은 스타라는 무게에 짓눌리지도, 인기에 들뜨지도 않고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타고난 비범함 때문에 평범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남의 이름으로 세상을 떠돌던 KBS <눈의 여왕>의 태웅을 통해 절대적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남자의 눈빛이 얼마나 처연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던 현빈이 뒤이어 <나는 행복합니다>를 선택한 것은 “나를 돌이켜봐야 하는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앞서 쌓아둔 것을 계단삼아 위로 오르기 보다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쪽에 가까운 현빈의 행보는 <나는 행복합니다>를 통해 적절한 쉼표를 찍는다. 어느 순간부터 너무나 배우 같거나 스타 같아져서 오히려 일상의 풍경을 어색하게 만드는 이들과 달리 현빈은 <나는 행복합니다>에 이어 KBS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도 지극히 일상적인 어떤 남자의 삶을 산다. 그래서 만수가 허름하고 구겨진 잠바로 훤칠한 체격을 가린 채 시골 노래방에서 등을 보이고 눈물짓는 순간,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과대망상증으로 도피한 그가 초점 없는 눈빛으로 수려한 이목구비를 흐려 놓는 순간, <그들이 사는 세상>의 지오가 사소한 일로 연인에게 짜증을 내고 녹내장 때문에 휘청이는 순간마다 앞서는 것은 미남 배우의 변신에 대한 위화감보다는 애처로움이다.

예측하기 어려운 행보 뒤 찾아온 또다른 길

그러나 그런 일상을 살아내고 난 뒤 현빈이 마초의 인생을 향해 발길을 옮기리라는 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지점이었을 것이다. 사실 장동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영화 <친구>를 리메이크한 <친구, 우리들의 전설>은 그에게 얻을 것이 없는 게임으로 보였다. 하지만 모든 이의 만류를 뒤로 하고 고집스레 동수가 되기를 자처했던 그는 타고난 착한 눈빛과 또렷한 말씨를 버리고 장동건과는 또 다른 비극의 주인공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죽지도 못하는 삶의 고통스러움(<나는 행복합니다>), 사랑을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상의 무게(<그들이 사는 세상>), 죽음으로써 겨우 끝이 나는 고단한 운명(<친구, 우리들의 전설>)을 차례로 그려내며 현빈은 동년배 사이에서는 물론 지금 한국의 남자 배우를 통틀어서도 자신의 영역을 눈에 띄게 확장해 나가는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故 이만희 감독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감독이 리메이크하는 영화 <만추>의 남자 주인공으로 현빈이 선택된 것은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 앞에 훨씬 넓은 또다른 길이 열리고 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행복합니다>의 원작 소설 <조만득 씨>가 그가 태어나기도 전인 80년에 발표되었던 것처럼 <만추> 역시 66년에 처음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지금 현빈에게는 고전에 어울리는 깊이와 함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독특한 현실감이 있다. 기사도 왕자님도 연인의 얼굴도 미련 없이 버리고 또다시 0에서 시작할 이 배우의 다음 걸음에 대한 기대는 그래서 무엇보다 뚜렷한 믿음에 더 가깝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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