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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나이 서른일곱. “외롭다, 외로워”라며 혼자 밥을 먹을 먹고 옆의 친구는 궁상맞다고 놀린다. 누가 봐도 안쓰럽고 주위의 관심이 필요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사실 “누구 좀 (만나게) 해주던가”라는 푸념은 명백한 엄살이다. 물론 그 남자가 이정재일 경우에만 그렇겠지만.

최근 CF 속에서 친구 부인에게 밥 한 그릇을 더 청하는 이정재의 모습은 두 가지를 일깨워준다. ‘아, 이정재도 어느새 집에서 해주는 따뜻한 밥 한 그릇이 필요한 나이가 됐구나.’ 그리고 ‘그런데 별로 안 그래 보이는구나.’ 물론 이정재가 오랜 시간 유지해온 신체적 매력을 증명하기 위해 배창호 감독의 <젊은 남자> 이후의 필모그래피를 열거하는 것은 무척이나 식상한 일이다. 하지만 또래의 정우성과 장동건이 그러하듯 어떤 이미지가 삼십 대 중반까지 이어질 때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그는 단순한 미남이라기보다는 빌딩숲과 네온사인, 대형 쇼핑몰 사이의 길 위에 존재해야만 할 것 같은 도시적 미남의 어떤 전형이었고 현재도 마찬가지다.

가령 최근작 <트리플>에서 그가 광고 기획자를 연기한 것이 전형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오히려 산업화와 도시화의 총아라 할 수 있는 그 직업이 그와 너무 잘 어울려서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1990년대 서울이라는 공간을 모태로 세상에 등장해 도시와 함께 자라고 나이 먹은 세대가 가진 여러 요소 중 세련됨을 대표한다. 남보다 앞서 나갈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근 유행하는 곡들은 놓치지 않고 듣고, “한창 클럽 음악에 빠져 살았지만 이젠 한물가서 별로”라고 말하는 이 천상 도시남자가 아이팟에서 즐겨듣는 곡 이름을 찾는 모습은 그래서 어디서 본 장면처럼 자연스러운 기시감이 든다. 다음은 이정재가 자신의 아이팟에서 골라준 구성이 치밀한 음악들이다. 동시에 내 여자에게만큼은 따뜻한 도시남자가 되고 싶은 이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봐야 할 음악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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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ldplay의
그는 최근 접한 뮤지션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밴드로 주저 없이 콜드플레이를 꼽았다. 아마 라디오 헤드가 세계 음악 트렌드를 지배한 이후 등장한 밴드 중 뮤즈와 함께 원조의 색채에 묻히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낸 몇 안 되는 밴드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보컬의 목소리가 눈에 띄는 음악을 좋아하는데 ‘Violet Hill’ 같은 곡을 들으면 조금은 ‘왕왕’ 울리는 보컬이 인상적이에요. 곡 자체는 서정적 건반 연주와 거친 기타가 오가는데 목소리의 톤은 변화가 없죠. 좀 묘한 시크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데뷔 당시 U2의 보노와 종종 비교되던 크리스 마틴의 감성적이지만 유약하지 않은 보컬 색채는 콜드플레이와 다른 그룹을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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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에픽하이의 <魂: Map The Soul>
“힙합이고, 댄스고, 좋으면 가리지 않고 듣는다”는 이정재가 고른 힙합 넘버는 에픽하이의 ‘Map The Soul (Feat. MYK)’이다. “앨범이 나왔을 땐 여기저기 오가면서 정말 많이 들었어요. 막 내쏟지 않고 상당히 절제된 랩과 후렴구가 굉장히 귀에 감기더라고요.” 힙합의 대중화라는 명제에 있어 에픽하이만큼 자주 언급되는 그룹도 없다. 사실 그 때문에 종종 그들의 실력 역시 저평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라임이나 플로우 같은 개념을 모르더라도 ‘Map The Soul (Feat. MYK)’을 듣는다면 딱딱 맞는 모음의 조합과 자연스러우면서도 맛깔스런 호흡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No reason to live without you’라는 몽환적 후렴구의 중독성은 치명적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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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윤미래)의 <떠나지마…>
“보컬이 좋은 노래를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정말 윤미래 씨만큼 노래를 잘하는 여자 가수는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랩을 할 때도 정말 멋있고 ‘떠나지마…’ 같은 곡 같은 발라드를 부를 때도 정말 감성적이면서 자신만의 느낌을 잘 살리죠.” 윤미래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노래를 잘 부르는 여자가수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윤미래처럼 부를 수 있는 가수는 윤미래밖에 없다는 것엔 아마 대부분 수긍할 수 있으리라. 올여름 최고의 히트 힙합 넘버라고 할 수 있는 퓨처라이거의 ‘Let`s Dance’에서도 탁월한 리듬감각과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여줬던 슈퍼 래퍼인 그녀는 ‘떠나지마…’를 통해 멜로디 스페셜리스트로서의 면모 역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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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James Morrison의
이정재는 구성이 치밀한 곡을 추천해주겠다고 했다. 그것이 빽빽하게 구성된 음악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제임스 모리슨의 ‘You Make It Real’ 추천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사실 이 사람 음악은 어쿠스틱 기타 하나 치면서 부르는 굉장히 단출한 구성이잖아요. 하지만 그 안에서 자기만의 어떤 흐름과 짜임새가 분명해요. 어딘가 비어 있는 부분도 딱 필요한 여백으로 느껴지고요.” 요 몇 년 사이에 조용히 해외 음악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일련의 싱어송라이터 중 한 명인 제임스 모리슨의 음악은 이정재의 정의대로 “무심한 듯 있어 보이는” 브릿팝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조금은 거친 목소리로 ‘넌 내가 살아있는 걸 느끼게 한다’고 고백하는 ‘You Make It Real’ 류의 러브송에서 그의 진가는 잘 발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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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Damien Rice의
“음악 듣는 건 좋아하지만 곡을 잘 외우지 못하는” 그는 데미안 라이스의 ‘The Blower`s Daughter’를 영화 <클로저>의 ‘그 음악’으로 먼저 떠올렸다. 그만큼 영화의 그 어떤 화면보다 강렬하게 관객을 사로잡았던 그의 음악에 대해 이정재는 “솔직히 하루에 딱 두 곡만 듣는다”고 고백했다. 너무 우울하기 때문이다. 종이에 번지는 느낌의, 그것도 잉크가 아닌 물처럼 희미하지만 어느새 감성을 적시는 데미안 라이스의 음악에 대한 칭찬 아닌 칭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대표적인 곡이라 조금은 소개하기 식상하기도 하지만 ‘The Blower`s Daughter’에서 간결한 기타를 타고 흐르는 그의 목소리는 서정적 우울함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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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종영한 드라마 <트리플>을 통해 이정재는 자신이 ‘왕년의 스타’가 아닌 2009년 현재에도 자신만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라는 것을 보여줬다. 그것은 부활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한 환기에 가깝다. 물론 그는 앞으로 영화 처럼 자신의 이미지를 배반하는 작품을 고를 수도 있고, 내면 연기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 잘 다듬어진 몸을 의상 안에 꼭꼭 숨길 수도 있다. 그 모든 길은 온전한 그의 것이지만, 그래도 한 번쯤 수트가 가장 잘 어울리는 도시남자 이정재를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을 통해 보고 싶은 건 괜한 욕심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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