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는 아름답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서 연인들은 운명이나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사랑을 한다. 다림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는 정원(<8월의 크리스마스>)의 손과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한 달음에 달려온 상우의 굽은 어깨는(<봄날은 간다>) 판타지와 현실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설렘을 품고 있다. 그는 나와 너 그리고 길을 걷는 수많은 연인들이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연애의 조각들을 모아 사랑이라는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하지만 허진호는 잔인하다. 그는 보는 이의 두 볼을 붉게 물들일 만큼 예뻤던 남녀가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는 파열음을 집요하게 채집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 남자에게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헤어지자고 답하는 여자의 야무진 입술(<봄날은 간다>), 연인이 밥 먹는 모습조차 지겨워진 남자의 빈정거림(<행복>)은 관계의 종식을 예고한다. 그리고 수순처럼 달뜬 사랑의 열기가 식은 후의 두 남녀를 고개를 돌리지 않고 똑바로 쳐다본다.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그들의 연금술을 고스란히 담아냈던 것처럼. 그래서 종종 영화에서나마 영원한 사랑의 환상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관객에게 허진호 감독은 환영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 어떤 뜨거운 충고보다 때로는 가만히 등을 두드려주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위로이듯, 그의 영화는 늘 사랑에 다치거나 사랑 앞에서 머뭇거리는 이들에게 좋은 치료제가 된다. 사랑의 생로병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의사처럼, 그의 차분한 사랑의 임상 기록들은 지금 사랑 그 자체를, 사랑이 빚어내는 두 사람의 관계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기꺼이 마음 한 켠을 내어주도록 만든다.
그래서, 1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누구도 정답을 모르는 사랑을 묻고 또 물었던 허진호 감독에게 로맨스 영화에 대해 물었다. 스스로 “연애는 많이 해 보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연애는 시작하기 전이 가장 예쁘다”는 핵심을 잘 알고 있는 그를 설레게 한 남과 여는 어떤 모습일까?
1. <첨밀밀> (甛蜜蜜)
1996년 │ 진가신
“<첨밀밀>의 진가신 감독은 개인적으로도 친구고, <봄날은 간다> 때 제작자이기도 했는데 이 영화는 데뷔하기 전에 명보극장에서 우연찮게 혼자 봤어요. 그 전에 많이 보아왔던 홍콩의 멜로 영화들과는 분명 달랐어요. 그냥 보기만 해도 설레던데요. (웃음) 둘이 좁은 공간에서 옷을 벗겨주다가 갑자기 베드신으로 흐르던 장면이나 마지막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쇼윈도 앞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엔딩도 좋았구요.”
친절하지 않은 홍콩이라는 대도시에 꿈을 찾아온 가난한 소군(여명)과 이요(장만옥)는 닮았다. 등려군의 노래를 좋아하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10여 년간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도 온전히 사랑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그들은 결국 달콤하다는 뜻의 제목처럼 달콤한 엔딩을 맞을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상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추억을 만들어가는 소군과 이요 같은 연인들 덕택에 건조한 도시도 조금은 물기를 머금는다는 것이다.
2. <남과 여> (Un Homme Et Une Femme)
1966년 │ 끌로드 를르슈
“<남과 여>는 굉장히 오래 전에 본 영화네요. DVD를 가지고 있어서 지금도 가끔 꺼내 보는데, 역시 볼 때마다 설레요. 굉장히 짧은 기간 동안 찍은 영화인데, 상처도 있고 나이도 어느 정도 있는 두 남녀가 만나는 과정을 담았어요. 영화는 남자와 여자를 비추는데 클로즈업을 많이 썼어요. 무성영화처럼 소리도 거의 없는데 둘의 감정이 그런 클로즈업 장면들에서 잘 드러납니다.”
연애에 필요한 건 적절한 우연과 만남을 이어갈 알찬 핑계거리다. 일요일마다 기숙학교에 있는 아이들을 보러 가는 안(아누크 에메)과 장(장 루이 트랭티낭)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켰다. 영화는 드라마틱한 사건 없이 대화를 나누는 남녀의 모습과 손을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작은 동작만으로도 사랑의 떨림을 고스란히 포착해냈다. 흑백과 컬러, 교차편집과 플래시백을 넘나드는 새로운 화면은 ‘남과 여의 일요일의 만남’을 한 장면, 한 장면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고 싶을 만큼 멋지게 만들었다. 그 결과 그 해의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골든 글로브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며 멜로 영화를 넘어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3.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
1953년 │ 윌리엄 와일러
“<행복>의 시나리오를 쓸 때 케이블 TV에서 하는 <로마의 휴일>을 보고 ‘와, 저렇게 재밌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좌절도 하고. (웃음) <로마의 휴일>은 정말 많이 봤는데도 계속 또 보게 되더라구요. 사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저 주인공이 되어보는 상상을 하기가 쉽지는 않은데, 그레고리 펙이 되는 상상도 해봤어요. (웃음) 서로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 감정을 끝까지 가지고 가는 게 좋았어요. 특히 마지막 기자회견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보고나면 정말 연애하고 싶어지는 영화죠.”
따분한 왕실 생활에 싫증을 느낀 앤 공주(오드리 햅번)는 로마 거리로 잠깐의 일탈을 나선다. 우연히 만난 조(그레고리 펙)와 하루를 함께 보내고, 묘한 감정도 느끼지만 모든 것을 가진 듯 보이는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많지 않다. 시종일관 경쾌하고 산뜻한 로맨스를 보여주지만 마지막 기자회견장의 앤 공주와 조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은 지켜보는 이를 찡하게 한다. 아름답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에서 제일 첫 예로 제시될 오드리 햅번과 로맨스 영화의 페이지에서 제일 첫 줄에 올라도 손색이 없을 <로마의 휴일>.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4. <셜록 2세> (Sherlock Jr.)
1924년 │ 버스터 키튼
“<셜록 2세>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개막작으로 봤는데, 꼭 다시 보고 싶은 영화예요. 보면서 너무 행복했거든요. 탐정을 꿈꾸는 영사기사가 부잣집 딸을 짝사랑하는데 경쟁자인 다른 남자가 질투를 해서 그를 도둑으로 몰죠. 다행히도 결국엔 진실이 밝혀져서 남자와 여자는 해피엔딩을 맞아요. 아기자기하고 정말 재밌어요. 근래에 본 영화중에 가장 재밌었던 영화예요.”
찰리 채플린과 비견되는 무성 코미디 영화의 작가, 버스터 키튼의 전성기 시절 만들어진 특별한 사랑 이야기다. 탐정을 꿈꾸는 영사 기사가 꾸는 꿈에서의 공상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키튼의 스턴트 기술과 특수효과들은 현재의 컴퓨터 그래픽이 부럽지 않다. 특히 박진감 넘치다가도 이내 키튼 특유의 익살스러움으로 마무리되는 후반부의 자동차 추격신이 백미다.
5. <첫사랑> (First Love)
1993년 │ 이명세
“이것도 명보극장에서 본 영화네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는 한 여자의 설렘이 너무 예쁘게 잘 표현되어 있어요. 누군가를 좋아하면 하늘을 나는 듯한 느낌을 받잖아요, 실제로 하늘을 나는 판타지적인 장면도 있었고. 그런 첫사랑을 느끼는 (김)혜수 씨가 참 예뻤어요. 영화를 보는 내내 ‘아 저런 게 첫사랑이지’하면서 감탄했어요.”
열아홉 영신(김혜수)은 묻는다. “머릿속에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이 느낌은 대체 뭐냐고. 대학생이 되어 어른들의 사랑을 동경하는 영신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하늘을 날거나 그 남자의 방으로 찾아가는 소녀의 상상은 그대로 화면에 옮겨져 두근두근한 첫사랑의 감정을 되살린다. 당시 35세의 남자였던 감독이 열아홉 소녀의 풋풋한 감정을 놀라울 정도로 발랄하게 스타일링했다. 이후 첫사랑의 기억으로 방황하는 남자의 이야기과 비교해보면 새로운 영화적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연애하고 싶어지는 순간”들로 가득찬 <호우시절>
“어떨 때는 ‘아, 나도 이제 사랑 얘기 지겨워’ 할 때가 있는데, 또 만들 때는 재밌어요. 남녀가 만나서 만들어지는 감정들이 굉장히 다양하고 조금씩 다 다르니까요.” 여전히 사랑하는 두 남녀의 짧은 순간을 담은 <호우시절>로 돌아온 허진호 감독. 늘 상대방이 죽거나 누군가의 마음이 먼저 변해버려 해피엔딩을 맞은 적이 없는 허진호 영화의 연인들과 다르게 이번에는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까? “밝은 영화를 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동하(정우성)와 메이(고원원)는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나저나 영화는 “연애하고 싶어지는 순간”들로 가득하다는데 감독님, 영화를 보고 나서 남아나지 않을 전국 솔로들의 허벅지는 어떻게 책임지실 건가요?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하지만 허진호는 잔인하다. 그는 보는 이의 두 볼을 붉게 물들일 만큼 예뻤던 남녀가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는 파열음을 집요하게 채집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 남자에게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헤어지자고 답하는 여자의 야무진 입술(<봄날은 간다>), 연인이 밥 먹는 모습조차 지겨워진 남자의 빈정거림(<행복>)은 관계의 종식을 예고한다. 그리고 수순처럼 달뜬 사랑의 열기가 식은 후의 두 남녀를 고개를 돌리지 않고 똑바로 쳐다본다.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그들의 연금술을 고스란히 담아냈던 것처럼. 그래서 종종 영화에서나마 영원한 사랑의 환상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관객에게 허진호 감독은 환영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 어떤 뜨거운 충고보다 때로는 가만히 등을 두드려주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위로이듯, 그의 영화는 늘 사랑에 다치거나 사랑 앞에서 머뭇거리는 이들에게 좋은 치료제가 된다. 사랑의 생로병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의사처럼, 그의 차분한 사랑의 임상 기록들은 지금 사랑 그 자체를, 사랑이 빚어내는 두 사람의 관계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기꺼이 마음 한 켠을 내어주도록 만든다.
그래서, 1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누구도 정답을 모르는 사랑을 묻고 또 물었던 허진호 감독에게 로맨스 영화에 대해 물었다. 스스로 “연애는 많이 해 보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연애는 시작하기 전이 가장 예쁘다”는 핵심을 잘 알고 있는 그를 설레게 한 남과 여는 어떤 모습일까?
1. <첨밀밀> (甛蜜蜜)
1996년 │ 진가신
“<첨밀밀>의 진가신 감독은 개인적으로도 친구고, <봄날은 간다> 때 제작자이기도 했는데 이 영화는 데뷔하기 전에 명보극장에서 우연찮게 혼자 봤어요. 그 전에 많이 보아왔던 홍콩의 멜로 영화들과는 분명 달랐어요. 그냥 보기만 해도 설레던데요. (웃음) 둘이 좁은 공간에서 옷을 벗겨주다가 갑자기 베드신으로 흐르던 장면이나 마지막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쇼윈도 앞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엔딩도 좋았구요.”
친절하지 않은 홍콩이라는 대도시에 꿈을 찾아온 가난한 소군(여명)과 이요(장만옥)는 닮았다. 등려군의 노래를 좋아하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10여 년간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도 온전히 사랑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그들은 결국 달콤하다는 뜻의 제목처럼 달콤한 엔딩을 맞을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상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추억을 만들어가는 소군과 이요 같은 연인들 덕택에 건조한 도시도 조금은 물기를 머금는다는 것이다.
2. <남과 여> (Un Homme Et Une Femme)
1966년 │ 끌로드 를르슈
“<남과 여>는 굉장히 오래 전에 본 영화네요. DVD를 가지고 있어서 지금도 가끔 꺼내 보는데, 역시 볼 때마다 설레요. 굉장히 짧은 기간 동안 찍은 영화인데, 상처도 있고 나이도 어느 정도 있는 두 남녀가 만나는 과정을 담았어요. 영화는 남자와 여자를 비추는데 클로즈업을 많이 썼어요. 무성영화처럼 소리도 거의 없는데 둘의 감정이 그런 클로즈업 장면들에서 잘 드러납니다.”
연애에 필요한 건 적절한 우연과 만남을 이어갈 알찬 핑계거리다. 일요일마다 기숙학교에 있는 아이들을 보러 가는 안(아누크 에메)과 장(장 루이 트랭티낭)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켰다. 영화는 드라마틱한 사건 없이 대화를 나누는 남녀의 모습과 손을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작은 동작만으로도 사랑의 떨림을 고스란히 포착해냈다. 흑백과 컬러, 교차편집과 플래시백을 넘나드는 새로운 화면은 ‘남과 여의 일요일의 만남’을 한 장면, 한 장면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고 싶을 만큼 멋지게 만들었다. 그 결과 그 해의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골든 글로브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며 멜로 영화를 넘어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3.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
1953년 │ 윌리엄 와일러
“<행복>의 시나리오를 쓸 때 케이블 TV에서 하는 <로마의 휴일>을 보고 ‘와, 저렇게 재밌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좌절도 하고. (웃음) <로마의 휴일>은 정말 많이 봤는데도 계속 또 보게 되더라구요. 사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저 주인공이 되어보는 상상을 하기가 쉽지는 않은데, 그레고리 펙이 되는 상상도 해봤어요. (웃음) 서로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 감정을 끝까지 가지고 가는 게 좋았어요. 특히 마지막 기자회견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보고나면 정말 연애하고 싶어지는 영화죠.”
따분한 왕실 생활에 싫증을 느낀 앤 공주(오드리 햅번)는 로마 거리로 잠깐의 일탈을 나선다. 우연히 만난 조(그레고리 펙)와 하루를 함께 보내고, 묘한 감정도 느끼지만 모든 것을 가진 듯 보이는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많지 않다. 시종일관 경쾌하고 산뜻한 로맨스를 보여주지만 마지막 기자회견장의 앤 공주와 조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은 지켜보는 이를 찡하게 한다. 아름답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에서 제일 첫 예로 제시될 오드리 햅번과 로맨스 영화의 페이지에서 제일 첫 줄에 올라도 손색이 없을 <로마의 휴일>.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4. <셜록 2세> (Sherlock Jr.)
1924년 │ 버스터 키튼
“<셜록 2세>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개막작으로 봤는데, 꼭 다시 보고 싶은 영화예요. 보면서 너무 행복했거든요. 탐정을 꿈꾸는 영사기사가 부잣집 딸을 짝사랑하는데 경쟁자인 다른 남자가 질투를 해서 그를 도둑으로 몰죠. 다행히도 결국엔 진실이 밝혀져서 남자와 여자는 해피엔딩을 맞아요. 아기자기하고 정말 재밌어요. 근래에 본 영화중에 가장 재밌었던 영화예요.”
찰리 채플린과 비견되는 무성 코미디 영화의 작가, 버스터 키튼의 전성기 시절 만들어진 특별한 사랑 이야기다. 탐정을 꿈꾸는 영사 기사가 꾸는 꿈에서의 공상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키튼의 스턴트 기술과 특수효과들은 현재의 컴퓨터 그래픽이 부럽지 않다. 특히 박진감 넘치다가도 이내 키튼 특유의 익살스러움으로 마무리되는 후반부의 자동차 추격신이 백미다.
5. <첫사랑> (First Love)
1993년 │ 이명세
“이것도 명보극장에서 본 영화네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는 한 여자의 설렘이 너무 예쁘게 잘 표현되어 있어요. 누군가를 좋아하면 하늘을 나는 듯한 느낌을 받잖아요, 실제로 하늘을 나는 판타지적인 장면도 있었고. 그런 첫사랑을 느끼는 (김)혜수 씨가 참 예뻤어요. 영화를 보는 내내 ‘아 저런 게 첫사랑이지’하면서 감탄했어요.”
열아홉 영신(김혜수)은 묻는다. “머릿속에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이 느낌은 대체 뭐냐고. 대학생이 되어 어른들의 사랑을 동경하는 영신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하늘을 날거나 그 남자의 방으로 찾아가는 소녀의 상상은 그대로 화면에 옮겨져 두근두근한 첫사랑의 감정을 되살린다. 당시 35세의 남자였던 감독이 열아홉 소녀의 풋풋한 감정을 놀라울 정도로 발랄하게 스타일링했다. 이후 첫사랑의 기억으로 방황하는 남자의 이야기
“연애하고 싶어지는 순간”들로 가득찬 <호우시절>
“어떨 때는 ‘아, 나도 이제 사랑 얘기 지겨워’ 할 때가 있는데, 또 만들 때는 재밌어요. 남녀가 만나서 만들어지는 감정들이 굉장히 다양하고 조금씩 다 다르니까요.” 여전히 사랑하는 두 남녀의 짧은 순간을 담은 <호우시절>로 돌아온 허진호 감독. 늘 상대방이 죽거나 누군가의 마음이 먼저 변해버려 해피엔딩을 맞은 적이 없는 허진호 영화의 연인들과 다르게 이번에는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까? “밝은 영화를 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동하(정우성)와 메이(고원원)는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나저나 영화는 “연애하고 싶어지는 순간”들로 가득하다는데 감독님, 영화를 보고 나서 남아나지 않을 전국 솔로들의 허벅지는 어떻게 책임지실 건가요?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