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이자 교사인 아버지와 역시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시험에서 하나라도 틀리면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이라 남들 아무도 안 하는 혼자만의 경쟁을 하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에게 네 살 때부터 배운 그림 실력으로 사생대회도 휩쓸었다. “비록 친구는 없지만 상 받으러 나갈 때마다 등 뒤의 따가운 시선들을 만끽하는 게 삶의 낙인” 초등학생이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가자 “해 보니까 부질없는 것이 공부”라는 깨달음을 얻은 그는 곧 <단>이라는 소설을 읽고 ‘도인이 되자’며 친구들을 불러 모아 절에 묵으며 단전호흡 수련을 했다.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갔을 땐 갑자기 연극반을 결성해 연출은 물론 직접 디자인한 팜플렛을 가지고 스폰서도 받으러 다녔다. 한 영화직배사로부터 포스터를 뒤편에 넣어주는 조건으로 꽤 큰 액수의 후원을 따냈을 만큼 사업가로서의 자질도 보였지만 공연 전 날, 옆 학교 여학생을 주연 배우로 쓰려던 계획을 선생님에게 들켜 아이스하키 채가 부러지도록 맞았다. 그래도 공연을 무산시킬 수는 없다며 매달리는 후배들을 위해 그는 빡빡머리에 긴 머리 가발을 쓰고 무대에 올랐다. 연출과 연기 데뷔를 동시에 하던 그 날 그는 생각했다. 아, 내가 은근히 무대 체질이구나.
그랬던 소년은 훗날 서울대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두 살 터울의 예능 PD인 형의 뒤를 이어 SBS에 입사했다. <불량주부>와 <101번째 프로포즈>에 이어 <쩐의 전쟁>으로 ‘대박’을 터뜨린 뒤 <바람의 화원>에서 ‘예술’을 했던 장태유 감독의 종횡무진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비상하면서도 엉뚱한 소년의 성장기를 한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나이키를 신고 싶은데 월드컵만 사 주는”, 어렵지는 않지만 풍족하지도 않았던 가정에서 그가 늘 찾아낸 길은 “하고 싶은 것도 중요하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찾아내는 것”이었다. “연출이라는 건 나를, 사람들을 자극하는 코드를 발견해 나가는 일인 것 같아요. 누가 먼저 생각해낸 이야기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에 어떤 메시지를 담고, 감동을 전하고, 형식적인 실험을 보여주느냐가 중요한 거죠”
그리고 스스로도 흥행을 예상하지 못했던 <쩐의 전쟁>을 통해 “인생은 인간이 계산할 수 있는 요소보다 계산할 수 없는 많은 것들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배운 장태유 감독은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린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을 드라마로 표현하고 싶어” <바람의 화원>을 선택했다. 사극에 대한 새로운 접근, 예술에 대한 드라마적 해석, 팩션 소설의 성공적인 드라마화 등과 더불어 시청률 하락과 제작비 초과, 후반 내러티브에 대한 아쉬움 등 <바람의 화원>은 다양한 쟁점을 남긴 작품이지만 언제나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물에 대한 논쟁이라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日 <101번째 프로포즈>
1991년 후지TV
“키 작고 나이 많고 직업도 변변치 않은 남자가 아름답고 우아하고 백조같이 고결하고 한 점 흠도 없어 보이는 여자를 동경하고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에요. 저도 학생 때 소개팅을 하면 매번 잘 안 됐던 아픔이 있어서 그런지 꼭 제 이야기처럼 느끼면서 극도로 감정이입을 해서 봤죠. (웃음) 모든 사랑의 첫 걸음이 시작될 때의 감정, 사랑이 아름답게만 보이는 지극히 짧은 순간,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를 정확하게 포착했던 것 같아요. 90년대 초반의 기술로 만든 드라마인데 전혀 촌스럽지 않고 연기, 대본, 연출의 삼박자가 너무 잘 맞아떨어져서 부끄러워졌을 정도에요. 투박하지 않고 세련된 코미디를 전개하는 방식이나 그 정서, 디테일이 정말 좋았어요.”
SBS <내 마음을 뺏어봐>
1998년 극본 배유미, 연출 오종록
“제가 해볼 수 없는, 해보지 못한, 해보고 싶은 사랑에 대한 드라마에요. 대학 시절에 봤던 거라 주인공들에게 공감도 많이 됐고 세련된 연출이 인상적이었어요. (오)종록이 형은 머리가 천재적인 감독인데 형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서도 <내 마음을 뺏어봐>를 가장 좋아해요. 이복 남매의 사랑 사이에 끼어 있는 위험한 남자, 삼각관계 같은 것들에 대한 종록이 형 특유의 예리함이 보는 사람을 쫙 빨아들이는 힘을 가졌거든요. 극 중에서 감정의 폭발이 압도적이던 박신양 씨의 연기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이후에 작품을 통해 만났을 때는 박신양 씨 덕분에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론까지 공부하게 됐죠.”
日 <하늘에서 내리는 1억 개의 별>
2002년 후지TV
“사람이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으며 자라게 되는가를 다루는 스토리에 흥미가 있어요. 미스터리 멜로를 그린 작품이 상당히 많은데 이 작품에 유독 끌렸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그 미스터리의 뿌리에 주인공이 불행한 어린 시절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어릴 때 누구인지 알 것 같은 상대에 의해 부모가 죽은 뒤에 아무도 믿거나 사랑하지 않고 오로지 분노의 정서만 가지고 살아가던 남자가 누군가를 만나 사람을 믿게 되고 사랑을 배워가는 성장의 과정도 좋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멜로와 미스터리 사이의 긴장의 교집합을 기가 막히게 잘 찾아서 끌고 간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내년 여름, 미국으로 떠날 IQ 152의 사나이
장태유 감독은 요즘 오랜만에 토플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입사 10년을 맞는 내년 여름, 미국으로 연수를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링, 내러티브를 만드는 법에 대한 공부를 좀 더 하려고 해요. 돌아온 뒤에는 SF나 미스터리 멜로 같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서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요.” 드라마 시장이 ‘작가주의’ 혹은 ‘막장’으로 점점 양극화되는 조짐을 보이는 요즘 예술과 비즈니스의 경계, 비즈니스와 재미의 경계 사이를 오가는 장태유 감독의 행보는 유독 흥미롭다. 그래서 어지간한 토크쇼에 출연해도 밀리지 않을 만큼 독특한 유머가 넘치는 이야기의 끝 무렵에는 문득 그의 IQ가 궁금해졌다. 152라고 했다. 그럼 그렇지.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그랬던 소년은 훗날 서울대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두 살 터울의 예능 PD인 형의 뒤를 이어 SBS에 입사했다. <불량주부>와 <101번째 프로포즈>에 이어 <쩐의 전쟁>으로 ‘대박’을 터뜨린 뒤 <바람의 화원>에서 ‘예술’을 했던 장태유 감독의 종횡무진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비상하면서도 엉뚱한 소년의 성장기를 한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나이키를 신고 싶은데 월드컵만 사 주는”, 어렵지는 않지만 풍족하지도 않았던 가정에서 그가 늘 찾아낸 길은 “하고 싶은 것도 중요하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찾아내는 것”이었다. “연출이라는 건 나를, 사람들을 자극하는 코드를 발견해 나가는 일인 것 같아요. 누가 먼저 생각해낸 이야기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에 어떤 메시지를 담고, 감동을 전하고, 형식적인 실험을 보여주느냐가 중요한 거죠”
그리고 스스로도 흥행을 예상하지 못했던 <쩐의 전쟁>을 통해 “인생은 인간이 계산할 수 있는 요소보다 계산할 수 없는 많은 것들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배운 장태유 감독은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린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을 드라마로 표현하고 싶어” <바람의 화원>을 선택했다. 사극에 대한 새로운 접근, 예술에 대한 드라마적 해석, 팩션 소설의 성공적인 드라마화 등과 더불어 시청률 하락과 제작비 초과, 후반 내러티브에 대한 아쉬움 등 <바람의 화원>은 다양한 쟁점을 남긴 작품이지만 언제나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물에 대한 논쟁이라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日 <101번째 프로포즈>
1991년 후지TV
“키 작고 나이 많고 직업도 변변치 않은 남자가 아름답고 우아하고 백조같이 고결하고 한 점 흠도 없어 보이는 여자를 동경하고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에요. 저도 학생 때 소개팅을 하면 매번 잘 안 됐던 아픔이 있어서 그런지 꼭 제 이야기처럼 느끼면서 극도로 감정이입을 해서 봤죠. (웃음) 모든 사랑의 첫 걸음이 시작될 때의 감정, 사랑이 아름답게만 보이는 지극히 짧은 순간,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를 정확하게 포착했던 것 같아요. 90년대 초반의 기술로 만든 드라마인데 전혀 촌스럽지 않고 연기, 대본, 연출의 삼박자가 너무 잘 맞아떨어져서 부끄러워졌을 정도에요. 투박하지 않고 세련된 코미디를 전개하는 방식이나 그 정서, 디테일이 정말 좋았어요.”
SBS <내 마음을 뺏어봐>
1998년 극본 배유미, 연출 오종록
“제가 해볼 수 없는, 해보지 못한, 해보고 싶은 사랑에 대한 드라마에요. 대학 시절에 봤던 거라 주인공들에게 공감도 많이 됐고 세련된 연출이 인상적이었어요. (오)종록이 형은 머리가 천재적인 감독인데 형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서도 <내 마음을 뺏어봐>를 가장 좋아해요. 이복 남매의 사랑 사이에 끼어 있는 위험한 남자, 삼각관계 같은 것들에 대한 종록이 형 특유의 예리함이 보는 사람을 쫙 빨아들이는 힘을 가졌거든요. 극 중에서 감정의 폭발이 압도적이던 박신양 씨의 연기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이후에 작품을 통해 만났을 때는 박신양 씨 덕분에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론까지 공부하게 됐죠.”
日 <하늘에서 내리는 1억 개의 별>
2002년 후지TV
“사람이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으며 자라게 되는가를 다루는 스토리에 흥미가 있어요. 미스터리 멜로를 그린 작품이 상당히 많은데 이 작품에 유독 끌렸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그 미스터리의 뿌리에 주인공이 불행한 어린 시절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어릴 때 누구인지 알 것 같은 상대에 의해 부모가 죽은 뒤에 아무도 믿거나 사랑하지 않고 오로지 분노의 정서만 가지고 살아가던 남자가 누군가를 만나 사람을 믿게 되고 사랑을 배워가는 성장의 과정도 좋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멜로와 미스터리 사이의 긴장의 교집합을 기가 막히게 잘 찾아서 끌고 간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내년 여름, 미국으로 떠날 IQ 152의 사나이
장태유 감독은 요즘 오랜만에 토플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입사 10년을 맞는 내년 여름, 미국으로 연수를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링, 내러티브를 만드는 법에 대한 공부를 좀 더 하려고 해요. 돌아온 뒤에는 SF나 미스터리 멜로 같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서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요.” 드라마 시장이 ‘작가주의’ 혹은 ‘막장’으로 점점 양극화되는 조짐을 보이는 요즘 예술과 비즈니스의 경계, 비즈니스와 재미의 경계 사이를 오가는 장태유 감독의 행보는 유독 흥미롭다. 그래서 어지간한 토크쇼에 출연해도 밀리지 않을 만큼 독특한 유머가 넘치는 이야기의 끝 무렵에는 문득 그의 IQ가 궁금해졌다. 152라고 했다. 그럼 그렇지.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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