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죠.” 정형수 작가는 시원스레 말했다. 전남 고흥에서 나고 자란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광주로 이사를 하며 야구를 시작했다. 이종범의 옆 학교 선수였던 중학교 시절에는 시속 120km의 공을 던지는 투수였지만 혹독한 연습으로 팔꿈치가 망가지며 야구를 포기했다. 결국 “공부라곤 해본 적이 없으니” 재수 끝에 “공부 안 시킨다는 얘기를 듣고” 중앙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여섯 살 터울 누나로부터 <삼국지>며 <파우스트> 같은 고전은 물론 온갖 대중소설과 실용서를 망라하는 잡식성 독서 습관을 물려받았고, <사람의 아들>과 <만다라>를 읽던 날 충격으로 포장마차에서 소주 네 병을 들이켰던 스무 살의 선택이었다. 대학에서는 “게을러서 긴 글은 못 쓰고” 시를 썼다. 주위 친구들처럼 신춘문예를 준비하다 몇 번은 본선에서 아깝게 미끄러지며 ‘문청’으로 살던 그에게 드라마를 써보길 권한 것은 다큐멘터리 작가로 활동하던 여자 친구이자 지금의 부인인 유승희 작가였다. 그리고 1999년 5월 30일, 결혼식을 올린 지 이틀 만에 그는 MBC 베스트 극장 극본 공모전 당선 통보를 받았다. 서류 정리를 위해 경주에서의 신혼여행도 중단하고 올라왔지만 그 때는 “마치 고시 패스한 것처럼 인생이 달라질 줄 알았”다. 비록 그 이후로 4년이나 어두운 터널 같은 시절을 더 보내야 했지만 그의 말대로 ‘팔자’가 아니고서야 야구소년이 문학청년으로, 첫 미니 시리즈에서 ‘대박’을 낸 드라마 작가로 변신한 과정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2003년 MBC <다모>는 원래 납량특집 8부작 드라마로 기획된 작품이었다. 누구도 대단한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한 살 터울의 입봉 감독과 신입 작가는 “우리 애들이 스무 살이 됐을 때 봐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만들자”며 의기투합했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치고 넘쳐 14부로 연장하는 우여곡절 끝에 대형 사고를 쳤다. 공모전 당선 후에도 “너무 문학성이 강하다”며 외면 받았던 정형수 작가의 대본이었지만 첫 회부터 시청자들의 마음을 뒤흔든 대사 “아프냐? 나도 아프다”는 그에게 오랫동안 숨어 있었던 문학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황지우 시인의 <게눈 속의 연꽃>이라는 시집을 보면 사모님과 연애 시절 문병을 가서 두 손을 꼭 잡고 ‘너와 똑같은 병을 앓고 싶다’고 말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 표현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아서 쓰게 된 거죠. 사실 사람들에게 그 대사가 회자될 줄은 상상 못했어요.” 지금도 <다모>의 팬들이 잊지 못하는 마지막 글귀 “먼 산…눈이 시리도록 짙푸른 산…그 심연을 짐작할 수 없는 인연…가늠할 수 없는 사랑…내 심장을 뚫어버린 사랑…” 역시 최종회 대본 집필을 마친 뒤 ‘End’라고 쓰기가 아쉬워 ‘less’를 덧붙였을 만큼 작품에 대한 애정이 컸던 그가 무심결에 적어 넣은 소회를 이재규 감독이 영상에 담은 것이었다.
이후 최완규 작가와 공동집필한 MBC <주몽>이 시청률 50%를 넘나들며 단숨에 대박 작가로 올라서기도 했고, 최근 SBS <드림>의 흥행 부진으로 고전하기도 했지만 정형수 작가의 ‘기본’은 기복에 흔들리지 않는다. “구라에도 ‘개구라’가 있고 ‘참구라’가 있대요. 그런데 진정한 이야기꾼들은 똑같은 얘기를 하면서도 사람을 웃다가 울리고, 눈물 쏙 빠지게 하고 가슴이 먹먹하게 만드는 ‘참구라’를 한다는 거죠. 그건 문학을 공부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나 인간에 대한 통찰에서 나오는 거예요.” ‘팔자’에 떠밀려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지만 언제나 성실하고 우직했던, 그리고 아직 미처 꺼내지도 못한 수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그가 인정하는 ‘참구라’의 드라마는 어떤 것들일지 궁금했다.
MBC <아들과 딸>
1992년 극본 박진숙, 연출 장수봉
“대학 때 김주영, 김원일의 소설 같은 3세대 문학을 중심으로 공부했는데 <아들과 딸>은 바로 우리나라 3세대 문학을 그대로 TV에 옮겨놓은 것 같은 드라마였어요. 시대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그 때의 모습이 너무나 잘 묘사되어 있었고, 캐릭터도 참 좋았죠. 한량 같은 아버지, 아들만 끔찍하게 위하는 어머니, 후남이한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철없고 자기만 대접 받는 걸 당연히 여기는 귀남이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박진숙 선생님의 문학성이 드라마에 너무 잘 살아 있었기 때문에 <아들과 딸>이 끝났을 때는 ‘이제 뭘 보며 살아야 하나’ 싶은 기분이 들었는데 혹시 사람들도 <다모>가 끝났을 때 그랬으려나? (웃음)”
SBS <모래시계>
1995년 극본 송지나, 연출 김종학
“캐릭터가 강한 작품을 좋아해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고전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야기는 잊히지만 스칼렛이라는 캐릭터는 남는 것처럼, 그 캐릭터가 갖는 힘이 마지막까지 가슴에 기억되는 것 같아요. <모래시계>에서도 혜린, 태수, 우석을 비롯해 모든 캐릭터가 다 좋았고 박근형 선생님이 연기한 혜린의 아버지이자 카지노 재벌 역시 이후 그런 캐릭터에 있어 거의 원형이 되었을 만큼 독보적이었어요. 게다가 제 고향이 광주이다 보니 역사에 대한 아픔이 있어서 그런지 감정이입이 많이 된 작품이죠.”
SBS <옥이 이모>
1995년 극본 김운경, 연출 성준기
“김운경 선생님은 우리 방송가에서도 최고의 ‘구라꾼’, 이야기꾼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에요. <서울의 달>도 기가 막히게 좋은 작품이었지만, <주몽>을 준비하면서 좀 답답하고 일이 안 풀릴 때마다 옛날에 어디서 얻었던 <옥이 이모> 전편이 담긴 테이프를 아무 거나 틀어서 봤어요. 주현 선생님, 송경철 씨, ‘쌔앰’ 역할의 정종준 씨, 내레이터 상구, 술집 아들 경태까지 이 사람들의 구라가 좌악 펼쳐지기 시작하면 몇 번을 다시 봐도 그냥 기분이 좋아졌어요. 지금은 그 테이프를 아깝게 유실했는데 다시 사려니 백만 원이 넘는다고 하더라구요. DVD로도 나와 주면 좋겠어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선택을 한 사람들을 그려보고 싶다”
단 세 편의 장편 드라마를 통해 화제작도 히트작도 다 집필해 본 정형수 작가지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아이디어로 출발해 기획한 작품을 쓰지 못했던 데 대한 아쉬움이 있다. 1920년대 미국 암흑가의 거물 제이슨 리 스토리를 비롯해 그동안 준비하다 중단된 적지 않은 작품들의 시놉시스와 함께 그가 마음에 담아 둔 소재는 ‘우리들 주변에 있는 영웅들의 이야기’다.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고 사망한 故 이수현 씨나, 이천 참사 때의 소방관들, 서해 교전 때 전사한 장병들의 행동이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분들은 그 순간 자기 목숨과 인생을 걸었던 거거든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선택을 한 사람들, 그런데 그들의 인생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럴 만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드라마로 그려내 보고 싶어요.” 뚝심과 내공을 함께 갖춘 정형수 작가의 이 독특한 영웅담은 빠르면 내년 가을쯤 우리를 만나러 올 수도 있다고 한다.
사진제공_SBS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2003년 MBC <다모>는 원래 납량특집 8부작 드라마로 기획된 작품이었다. 누구도 대단한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한 살 터울의 입봉 감독과 신입 작가는 “우리 애들이 스무 살이 됐을 때 봐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만들자”며 의기투합했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치고 넘쳐 14부로 연장하는 우여곡절 끝에 대형 사고를 쳤다. 공모전 당선 후에도 “너무 문학성이 강하다”며 외면 받았던 정형수 작가의 대본이었지만 첫 회부터 시청자들의 마음을 뒤흔든 대사 “아프냐? 나도 아프다”는 그에게 오랫동안 숨어 있었던 문학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황지우 시인의 <게눈 속의 연꽃>이라는 시집을 보면 사모님과 연애 시절 문병을 가서 두 손을 꼭 잡고 ‘너와 똑같은 병을 앓고 싶다’고 말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 표현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아서 쓰게 된 거죠. 사실 사람들에게 그 대사가 회자될 줄은 상상 못했어요.” 지금도 <다모>의 팬들이 잊지 못하는 마지막 글귀 “먼 산…눈이 시리도록 짙푸른 산…그 심연을 짐작할 수 없는 인연…가늠할 수 없는 사랑…내 심장을 뚫어버린 사랑…” 역시 최종회 대본 집필을 마친 뒤 ‘End’라고 쓰기가 아쉬워 ‘less’를 덧붙였을 만큼 작품에 대한 애정이 컸던 그가 무심결에 적어 넣은 소회를 이재규 감독이 영상에 담은 것이었다.
이후 최완규 작가와 공동집필한 MBC <주몽>이 시청률 50%를 넘나들며 단숨에 대박 작가로 올라서기도 했고, 최근 SBS <드림>의 흥행 부진으로 고전하기도 했지만 정형수 작가의 ‘기본’은 기복에 흔들리지 않는다. “구라에도 ‘개구라’가 있고 ‘참구라’가 있대요. 그런데 진정한 이야기꾼들은 똑같은 얘기를 하면서도 사람을 웃다가 울리고, 눈물 쏙 빠지게 하고 가슴이 먹먹하게 만드는 ‘참구라’를 한다는 거죠. 그건 문학을 공부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나 인간에 대한 통찰에서 나오는 거예요.” ‘팔자’에 떠밀려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지만 언제나 성실하고 우직했던, 그리고 아직 미처 꺼내지도 못한 수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그가 인정하는 ‘참구라’의 드라마는 어떤 것들일지 궁금했다.
MBC <아들과 딸>
1992년 극본 박진숙, 연출 장수봉
“대학 때 김주영, 김원일의 소설 같은 3세대 문학을 중심으로 공부했는데 <아들과 딸>은 바로 우리나라 3세대 문학을 그대로 TV에 옮겨놓은 것 같은 드라마였어요. 시대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그 때의 모습이 너무나 잘 묘사되어 있었고, 캐릭터도 참 좋았죠. 한량 같은 아버지, 아들만 끔찍하게 위하는 어머니, 후남이한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철없고 자기만 대접 받는 걸 당연히 여기는 귀남이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박진숙 선생님의 문학성이 드라마에 너무 잘 살아 있었기 때문에 <아들과 딸>이 끝났을 때는 ‘이제 뭘 보며 살아야 하나’ 싶은 기분이 들었는데 혹시 사람들도 <다모>가 끝났을 때 그랬으려나? (웃음)”
SBS <모래시계>
1995년 극본 송지나, 연출 김종학
“캐릭터가 강한 작품을 좋아해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고전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야기는 잊히지만 스칼렛이라는 캐릭터는 남는 것처럼, 그 캐릭터가 갖는 힘이 마지막까지 가슴에 기억되는 것 같아요. <모래시계>에서도 혜린, 태수, 우석을 비롯해 모든 캐릭터가 다 좋았고 박근형 선생님이 연기한 혜린의 아버지이자 카지노 재벌 역시 이후 그런 캐릭터에 있어 거의 원형이 되었을 만큼 독보적이었어요. 게다가 제 고향이 광주이다 보니 역사에 대한 아픔이 있어서 그런지 감정이입이 많이 된 작품이죠.”
SBS <옥이 이모>
1995년 극본 김운경, 연출 성준기
“김운경 선생님은 우리 방송가에서도 최고의 ‘구라꾼’, 이야기꾼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에요. <서울의 달>도 기가 막히게 좋은 작품이었지만, <주몽>을 준비하면서 좀 답답하고 일이 안 풀릴 때마다 옛날에 어디서 얻었던 <옥이 이모> 전편이 담긴 테이프를 아무 거나 틀어서 봤어요. 주현 선생님, 송경철 씨, ‘쌔앰’ 역할의 정종준 씨, 내레이터 상구, 술집 아들 경태까지 이 사람들의 구라가 좌악 펼쳐지기 시작하면 몇 번을 다시 봐도 그냥 기분이 좋아졌어요. 지금은 그 테이프를 아깝게 유실했는데 다시 사려니 백만 원이 넘는다고 하더라구요. DVD로도 나와 주면 좋겠어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선택을 한 사람들을 그려보고 싶다”
단 세 편의 장편 드라마를 통해 화제작도 히트작도 다 집필해 본 정형수 작가지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아이디어로 출발해 기획한 작품을 쓰지 못했던 데 대한 아쉬움이 있다. 1920년대 미국 암흑가의 거물 제이슨 리 스토리를 비롯해 그동안 준비하다 중단된 적지 않은 작품들의 시놉시스와 함께 그가 마음에 담아 둔 소재는 ‘우리들 주변에 있는 영웅들의 이야기’다.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고 사망한 故 이수현 씨나, 이천 참사 때의 소방관들, 서해 교전 때 전사한 장병들의 행동이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분들은 그 순간 자기 목숨과 인생을 걸었던 거거든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선택을 한 사람들, 그런데 그들의 인생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럴 만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드라마로 그려내 보고 싶어요.” 뚝심과 내공을 함께 갖춘 정형수 작가의 이 독특한 영웅담은 빠르면 내년 가을쯤 우리를 만나러 올 수도 있다고 한다.
사진제공_SBS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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