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설사 불행과 좌절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좋았던 시절’은 있는 법이다. 누군가를 사랑했거나, 누군가에게 사랑받았던 한 시절. <호우시절>은 그 시절의 찬란함, 그 순간 느낀 감정의 떨림을 담고 있는 영화다. 제 14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PIFF) 폐막을 하루 앞둔 10월 15일, 부산의 일몰 시간은 오후 5시 14분이었다. <호우시절> 감독과 주연배우의 오픈토크는 PIFF 마지막 오픈 토크이자, 마지막 야외 이벤트였다. 폐막 직전 마지막으로 해운대 바닷가를 찾은 관객들을 불러 모아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 있을 때부터 해가 저물고도 한참이 지나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올 때까지, 관객들은 <호우시절>의 허진호 감독과 두 주연배우 정우성, 고원원을 기다리며 꿋꿋하게 PIFF 빌리지 야외무대를 지켰다. 다음은 영화 <호우시절>과 ‘내 인생의 호우시절’에 대해 허진호 감독과 배우 정우성, 고원원이 들려준 이야기다.일단 첫 질문은 정우성에게 묻겠다. 영화 작업 하면서 이런 점에 집중 하면서 봐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점이 있다면 어떤 부분일까?
정우성 : <호우시절>은 사랑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 하면서 두 사람의 감정을 통해 관객이 제 3의 감정을 만들어내는 영화다. 그런 방향으로 둘의 사랑에 감정 이입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 자리에 있는 어린 관객들은, 어떤 사랑의 추억으로 <호우시절>을 봤는지도 궁금하다.
“<호우시절>은 스토리보다는 감정표현에 집중하는 영화”
중국배우인 고원원은 한국 관객들과 만난 느낌이 어떤지?
고원원 : 한국의 관객들이 중국영화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겠지만, <호우시절>을 통해 사랑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내가 한국을 찾은 것으로 인해, 더 많은 중국영화를 알릴 수 있는 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한국의 대표적 배우인 정우성과, 중국의 주목받는 배우 고원원을 캐스팅하던 당시부터 화제가 되었는데, 그 과정과 선정의 이유가 궁금하다.
허진호 : 정우성과는 사실 <8월의 크리스마스> 때부터 작업하고 싶었기 때문에, 많이 늦기는 했지만 좋은 기회에 만나서 좋은 영화를 함께 하게 되서 기뻤다. 고원원은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었지만 중국에서 매우 유명한 배우인 것은 잘 알고 있었는데, 영화 작업을 함께 하면서 감정 표현을 잘하는 점이 좋았다. 캐스팅의 이유라면, 무엇보다 둘이 정말 잘 어울린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우성은 한국의 많은 여배우들과 호흡을 맞춰 왔는데, 중국 여배우와의 호흡을 맞춘 것은 <호우시절>이 처음이다. 새로운 점이나 어려웠던 점이 있었다면?
정우성 : 아무래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서 쉽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한국 여배우들과 작업할 때는 일단 의사소통이 원활하니까 더 많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호우시절>이라는 영화의 내용이 변한 옛 사랑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영화 속에서도 서로의 변한 모습들을 살피는 시간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영화 바깥에서 인간 정우성도 인간 고원원을 살피고,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고 하는 과정에서 겪은 감정들, 실제의 모습이 영화 속 인물들과도 동화되고 더 깊은 몰입이 가능했다. 한국 여배우와의 호흡, 중국 여배우와의 호흡 중 어떤 한 쪽을 더 수월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고, 어떤 것이든 사랑은 좋은 것 같다.
고원원은 정우성과의 연기 호흡이 어땠는가?
고원원 : 예전에도 정우성이 출연한 영화를 많이 봐왔기 때문에 낯설지는 않았다. 걱정했던 것은 영화 속에서 했던 역할들이 대체로 진지하고 멋진 것이어서 실제 성격이 냉정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을 것 같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정우성이라는 배우는 사람과 금방 친해지는 친화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정우성과 나, 둘 다 사람의 감정을 믿는 연기자이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잘 표현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호우시절>은 스토리보다는 감정표현에 집중하는 영화인데, 두 사람 다 그런 표현의 방식이이 강점이었기 때문에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고원원이 봤던 정우성의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았던 영화는 무엇인가?
정우성 : (작게 고원원에게)<호우시절>.(일동 웃음)
고원원 : 맞다. <호우시절> 이다.
“감정만은 절대적으로 온전한 사랑일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호우시절> 속에서는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영어로 교감한다. 실제로는 어떤 언어로 대화 했나?
정우성 : 영화 속에서처럼 영어로 하기도 했고, 내가 중국어를 조금 할 줄 알기 때문에 중국어로도 이야기했다. 그런데 고원원이 내가 좀 알아듣는 거 같으니까 갑자기 빠르게 말해서, 사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 채로 넋 놓고 들을 때도 있었다.
고원원 : 정우성이 중국어를 정말 빨리 배워서, 나도 덩달아 빨리 말하게 됐다. 정우성이 자기가 외국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웃음)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호텔에서의 러브신이다. 찍기 쉽지 않은 장면이었을텐데, 이 장면을 찍으면서 허진호 감독이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은 무엇인가?
허진호 : <호우시절>은 유학시절에 같이 공부를 했던 두 사람이, 우연히 중국 청두에서 다시 만나서 3박 4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연애를 하는 내용이다. 그렇게 다시 만난 두 사람 사이에 강렬하면서도 떨림이 있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번 영화는 빨리 찍은 편인데, 그 키스신은 오래 걸렸다. 3~4시간 정도는 찍은 것 같다.
정우성 : 내가 키스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관중 괴성)
허진호 : 진짜로 나도 떨릴 정도였다. 옛 사랑을 다시 만나서 같이 자려고 할 때의 느낌들이 그 순간에 잘 표현되어 있다. 영화를 보시면 둘이 잤는지 안 잤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웃음)
고원원 : 메이라는 캐릭터가 평소에는 활동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 부분에서는 진짜 메이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 같다. 어제도 감독님과 감독님의 지인들이 키스신을 찍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어봤는데, 아무래도 그 장면이 영화에서 워낙 중요한 장면이기 때문에 정말 긴장해서 아무 생각도 못했다. 키스만 몇 시간을 했는지 모르겠다.
이어지는 18금 질문이다. 고원원 씨가 그 장면을 찍어보니, 정우성이 키스에 천부적 재능이 있는지 확인이 되던가.
고원원 : (난감해 하면서 대답 못하고)
정우성 : (진행자에게) 해드릴까요? (관중 괴성)
진행자 : 나중에 따로 부탁드리겠다.
세 사람 각자가 생각하는 특별한 사랑의 기억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허진호 : 사랑의 기억이라는 것은 사실 매일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어딘가 먼 곳에 숨어 있다가, 비가 온다든가 계절이 변할 때, 함께 듣던 음악을 들을 때, 문득 ‘아, 맞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났었지’ 하면서 떠오르는 것이다.
고원원 : 5~6년 전에 <봄날은 간다>를 처음 봤을 때는 이영애가 맡은 캐릭터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행복을 버리고 불행을 선택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다시 그 영화를 봤는데, 이제 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성장하면 사랑에 대한 기억이 달라지는 것 같다.
정우성 :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가끔 상대가 바뀔 때도 있고, 상대가 없을 때도 있지만 상대가 없어도 사랑을 갈구한다는 건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의 추억처럼 미래를 기대하게 하고 현실을 행복하게 하는 건 없기 때문에, 실패한 사랑 역시 없다고 생각한다. 감정만은 절대적으로 온전한 사랑일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상황 속으로 들어가 자신만의 사랑을 찾아냈으면 좋겠다.”
외국의 청두라는 낯선 공간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공간들을 표현함에 있어서 염두에 둔 것이 있다면?
허진호 : PIFF 때문에 자주 찾게 되는 부산에서 영화를 찍는다면, 부산을 찍는 것과 청두를 찍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일 것이다. 완전히 낯선 공간이기 때문에 둘의 감정이 살아날 만 한 공간을 찾는 것이 어려웠다. 그 지방에서 제일 유명한 게 팬더인데, 팬더가 나오는 장면을 찍을 때의 러브신이 아름답게 표현되는 것을 보면서, 배우에게 좋은 배경을 줬을 때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연기자가 연기를 잘 할 수 있는 공간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고원원이 연기한 메이는 청두가 원래 고향이고, 유학을 갔다가 다시 청두로 돌아온 온 역할이다. 고원원은 지금 중국에 살고 있는데, 청두라는 곳이 익숙한지, 그렇지 않고 낯설다면 어떤 느낌을 받았었는지?
고원원 : 실제로 청두에 간 경험은 2~3회 정도이다. 촬영을 하면서 느낀 것은 청두 사람들이 여유롭고 자유롭게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영화 촬영을 할 때도 여유롭게 보고, 즐기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정우성은 청두라는 도시가 어땠는가?
정우성 : 사실 작은 도시인 줄 알고 갔는데 인구 1,300만의 큰 도시라서 놀랐다. 공간이 주는 낯섦은 배우에게는 매우 중요한 느낌인 것 같다. 그 외로움은 배우를 넘어 그 캐릭터에게까지 전달된다. <무사>나 <놈놈놈>, <중천>같은 이전 작품들은 중국에서도 사막 같은 곳에서 주로 촬영했었기 때문에 <호우시절>을 촬영한 청두와 비교를 하게 되는데, 그래도 인공구조물들은 확실히 도시를 갑갑하게 만드는 면이 있기는 한 것 같다.
세 사람 모두 관객들에게 <호우시절>을 꼭 봐야하는 이유와 관전 포인트를 알려주자면?
허진호 : 영화를 본 지인들이 대개 ‘연애를 하고 싶다는 기분을 주는 영화’라고 말했다. 연인이 있든 없든, 연인이 있다면 더 관계가 좋아지고, 연인이 없다면 연애를 하고 싶은 느낌을 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결국 연애의 ‘시기’에 대한 이야기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좋은 시기가 있다는 걸 알게 해주는 영화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고원원 : 결국 연애를 하는 사람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이기 때문에 연애를 하는 느낌으로 즐겨주었으면 좋겠다.
정우성 : 많은 영화들이 어떤 감정을 느낄 것을 강요한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하지만 <호우시절은>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이입하게 하는 영화다. 스스로 상상하고, 영화가 감춰놓은 감정을 끌어내면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사실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서 큰 재미를 느낄 수는 없었지만, 이들의 감정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바람에 어떤 향기가 실려 왔을 때, 그 향기를 찾아내고 싶은 욕구가 이는 영화인 <호우시절>을 통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 자신만의 사랑을 찾아냈으면 좋겠다.
마지막 질문이다. 세 사람 각각,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호우시절은?
허진호 : 살아오면서 좋았던 시절을 찾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호우시절>을 찍는 시간은 정말 좋았다. 정우성과 고원원 두 배우를 한 화면에 담는다는 것은 영화감독으로서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영화 <호우시절>을 찍던 날들이 내게 진짜 ‘호우시절’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고원원 : <난징! 난징!> 이후 1년 동안 연기가 정말 힘들다고 느꼈기 때문에 영화를 찍지 않았다. 하지만 <호우시절>을 찍으면서 연기가 행복한 거구나, 연기를 하는 나는 행복하구나 생각할 수 있었다. 배역처럼 영화를 찍으면서 행복해졌으니 나의 <호우시절>은 바로 그 시기일 것이다.
정우성 : 나의 <호우시절>은 관객들 앞에서 영화를 이야기 할 수 있는 바로 이 시간, 지금이다.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언젠가는 추억이 될 테고, 이 시간이 더 나은 나를 만들 수 있는 시간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도 모두 다 지금을 가장 소중한 ‘호우시절’로 생각해주길 바란다.
글. 부산=윤이나 (TV평론가)
사진. 부산=이진혁 (eleven@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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