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예술가에겐 평생을 두고 단 한번만 만들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지앙 웬리 감독의 <안녕 할아버지>는 그런 영화다. 감독의 실재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존재했던 사람에 대한 명징한 기억들이 때론 그 어떤 영화적 기교도 다다를 수 없는 땅으로 관객들을 이끄는 진심의 풍경을 목도하게 만든다. 추운 겨울 어린 손녀의 등교를 준비하는 늙은 할아버지의 분주한 움직임, 칫솔 위에 치약을 짜주고, 차가운 빵을 화로 위에 굽고, 손녀의 머리를 직접 땋아 내리는 주름진 손을 보며 의연하기란 쉽지 않다. 할아버지에 대한 개인적 기억이 있고 없고는 중요치 않다. 그것이 여름 밤 곤히 잠든 손녀의 모기를 좆기 위해 부채를 놓지 못하고 선잠을 자는 풍경이든, 체조복을 갖고 싶어하는 손녀를 위해 노안의 할아버지가 늦은 밤 수영복에 바느질로 팔을 다는 풍경이든. 누군가로부터 계산하지 않는 절대적인 사랑을 일생에 단 한번만이라도 받아본 자들은 이 영화 앞에서 건조한 눈으로 버티는 것은 불가능 하다.

제 14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PIFF) 뉴커런츠 부문 경쟁작인 <안녕 할아버지> 마지막 상영이자 첫 번째 관객과의 대화에는 감독 지앙 웬리와 할아버지 역을 연기한 중국의 대 배우 주욱이 함께 했다. 불이 켜진 후 미처 영화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시종일관 고개를 떨구고 울고 있는 관객들이 여기 저기 눈에 띄었다. 특히 “할아버지 손에 자랐던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한 남자 관객은 질문 중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바람에 다른 질문과 답이 몇 차례 더 오간 후 다시 질문을 이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이날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 허문영 부산시네마테크 원장 역시 “보통의 작품의 경우 진행자가 포괄적인 연출 의도를 물어 보는 게 순서일 테지만 이 영화는 바로 관객들에게 마이크를 넘기는 게 낫겠다”는 말로 섣부른 정의나 분석을 뛰어넘는 <안녕 할아버지>의 미덕을 설명했다.

주욱: 반가워요. 여러분! 영화 재미있게 보셨나요?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앙 웬리 감독의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기억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얼마 전에 그 할아버지 산소를 가서 많이 도와주십사 빌고 왔어요.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재 할아버지의 친구들이에요.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고 마을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했던 어른이었다고들 해요.
지앙 웬리: 올해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3년 전 시나리오 작업을 끝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렸던 배우가 바로 여기 계신 주욱 선생님이에요. 영화 <변검>의 주인공이셨던 중국의 대표적인 배우죠. 올해로 80세가 되었는데 너무 정정하시죠? 다시 한번 힘든 작업 함께 해주신걸 감사 드립니다.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완성 될 수 없었을 거예요.

“할아버지와 손녀의 사랑이기도 하지만, 생명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속 소녀는 비가 오는데도 늘 우산을 쓰고 다니는데 어떤 의미일까요?
지앙 웬리
: 원래 제목이 ‘우산’이기도 했어요. 제가 컸던 그 지방은 비가 참 많이 오는 곳이었는데 날씨나 환경이 사람들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요. 그 비 때문에 어떻게 보면 좀 슬퍼 보이기도 하고 몽환적이기도 이 아이의 성격이 완성이 된 것 같아요. 우산은 이렇게 비를 가려주는 것이기도 하고 소녀에게 있어 할아버지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한 편으로는 할아버지와 손녀의 사랑에 대한 것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생명에 대한 영화기도 해요. 할아버지가 큰 나무라 한다면 손녀는 작은 나무라고 할 수 있죠. 처음에는 큰 나무가 작은 나무 옆에서 비와 바람을 피하게 도와주지만 나중에 큰 나무가 쓰러졌을 때 그 사이 자라난 작은 나무가 그 역할을 대신해주죠. 한 생명이 사라진 자리에 다른 생명이 성장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영화입니다.

<패왕별희> 같은 영화나 여러 드라마의 출연한 배우로 유명하신 분인데 자신의 영화에 직접 출연할 생각은 없으셨나요?
지앙 웬리
: 7, 8살에서 12살 정도 소녀의 성장 이야기라 제가 다시 어려질 수 없는 한 출연은 어려웠고요. (웃음) 대신 동네 의사역할로 잠시 등장하긴 합니다. 못 찾으셨나요?

지앙 웬리는 어떤 감독이었나요?
주욱
: 3년 전에 시나리오 작업할 때부터 자기 외할아버지 역할은 내가 해야 한다고 부탁을 했고 같은 배우로 작업을 많이 해본 사람이기도 해서 흔쾌히 출연하겠다고 했죠. 그런데 지앙 웬리는 정말 선배라고 봐주거나 어려워하지도 않는 정말 엄격한 감독님이에요. 내가 사투리를 조금 못했더니 현장에서 얼마나 야단을 치던지요. 허허허.

결국 소녀의 부모님은 돌아오게 되는 걸까요?
주욱
: 할아버지가 거동을 못하게 된 후로부터는 손녀를 위해 가짜 편지를 써줄 수 없었는데, 영화 마지막에 “정치적 상황이 좋아져서 고향에 돌아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편지가 한 통 오잖아요. 그 편지의 내용을 듣고 나서야 할아버지는 이제 손녀를 떠나도 되겠구나 생각하는 겁니다. 아, 그리고 지앙 웬리 감독은 현재 부모님과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 (웃음)
지앙 웬리: 영화 속에서 나오는 사진이 저희 부모님 사진이고 영화에서 새해 인사 오는 동네사람으로 출연도 하세요. (웃음)

글. 부산=백은하 (one@10asia.co.kr)
사진. 부산=이진혁 (eleven@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