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배우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동그란 얼굴에 언제나 장난스러운 웃음이 떠나지 않는 봉태규는 데뷔 이후로 지난 10여 년간 늘 비슷한 모습이었다. 덕분에 그가 이십대 중반의 나이로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 <썬데이 서울>, <방과후 옥상> 등의 영화에서 고등학생을 연기할 때도 관객들은 그의 모습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 부족하고, 조금은 주눅이 들어 있는 그의 캐릭터는 청춘스타가 되는 대신 가장 현실감 있는 청춘의 기록으로써 수많은 감독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지가 고정되는 것은 때로 배우에게 위험한 일이다. <품행 제로>부터 <바람난 가족>, <광식이 동생 광태>로 이어지는 은근히 불량하고, 적당히 유쾌한 봉태규 특유의 연기는 <가족의 발견>에서처럼 놀랍도록 생생한 인물로 재단되기도 했지만 어떤 영화 속에서는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를 소모해야 하기도 했다. 모처럼 출연한 드라마 <워킹맘>에서는 평범한 가장을 연기 했지만, 그 역시 그의 디테일한 연기를 포착하기보다는 우악스러운 상황 안에서 그의 희극적인 재능을 부각하기에 바쁜 순간이 더 많았다.
그런 봉태규가 올해는 제법 긴 휴식을 가졌다. 그리고 그동안 심사숙고해서 고른 다음 작품은 그가 최초로 도전하는 연극 <웃음의 대학>이다. “연극은 첫 도전이지만 무대가 두렵지는 않았어요. 워낙 대본이 완벽한 좋은 작품이기도 했고, 캐릭터가 희극적이라서 편안하게 다가온 부분이 있었거든요”라고 말하는 그는 잘하는 것을 외면하기보다는 그 깊이를 더함으로써 성장을 도모한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이 이제는 제법 제 나이를 찾아간다. 어느새 훌쩍, 서른을 앞두고 있는, 언젠가는 희극의 거장이 될 이 남자에게 ‘성장을 함께 한 노래들’을 물었다. “무조건 서태지와 아이들이죠! 아직도 그 노래를 처음 듣던 순간, 그리고 그 당시의 제가 생생하게 떠올라요!”라고 추억 속으로 다이빙하는 이 남자의 궤적을 소개한다. 그동안 봉태규식 연기에 가려져 있던, 진짜 봉태규의 이야기다.
1. Nirvana의
“너무 좋아하면 나쁜 점조차도 전부 닮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지금까지 제가 그런지 패션을 좋아하고 담배를 좋아하는 것도 다 커트 코베인의 영향인 것 같아요”라며 봉태규가 진지하게 추억해낸 첫 번째 노래는 질주하는 청춘의 테마송으로 일컬어지는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이다. 얼터너티브의 시대를 열었던 너바나의 명반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곡으로, 수많은 뮤지션들이 애창곡으로 손꼽기도 한 시대의 명곡이다. “십대 시절에는 커트 코베인의 자유로움이 정말로 좋았어요. 그래서 그의 아내와 딸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괜히 나도 행복해지고는 했죠. 반대로 그가 라이브 공연을 하다가 기타를 무릎에 놓고 잔뜩 인상을 찌푸리면서 담배를 피우면 덩달아 마음이 아프기도 했구요. 이렇게 말하니까 첫사랑을 추억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하하하.”
2. 듀스의
90년대 젊은이들의 상징이 미국에서는 너바나로 요약된다면, 한국에서는 듀스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낸 봉태규 역시 시대의 한정품처럼 짧지만 강렬하게 활약했던 두 뮤지션을 모두 생생하게 기억한다. 특히 듀스의 1, 2집을 리믹스한 넘버들로 구성된은 그들의 음악적 성취가 압축된 중요한 앨범으로, 정규앨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록곡인 ‘여름 안에서’가 큰 사랑을 받았다. “여름은 시원하고, 젊음은 눈부시죠. 그 간단한 이야기를 가장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곡입니다. ‘하늘은 우릴 향해 열려있어’라는 가사는 들을 때마다 가슴에 벅차게 와 닿아요. 그냥 이 노래는 푸른색이에요. 멜로디도, 가사도. 아직도 여름만 되면 이 노래를 듣거든요. 올여름에도 이 노래를 듣는 순간만큼은 이상하게 덥지가 않더라구요.”
3. 김광석의 <클래식 O.S.T>
마냥 활기차게 달음박질치던 청춘의 시간이 주춤하는 순간, 그 자리에는 항상 가슴 아픈 사랑의 추억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아련한 마음을 실감할 수 있는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들을 때 봉태규는 언제나 청춘의 열병 같은 통증을 실감한다고 한다. “옆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을 때나 있지 않을 때나 마찬가지에요. 그냥 이 노래를 듣는 순간은 항상 가슴이 아파요.” 그리고 그 반복되는 경험의 원인을 그는 김광석의 목소리에서 찾는다. “듣는 사람의 목소리를 대신 불러주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잔잔하지만 뜨거운 무엇이 있잖아요. 노래도 좋지만 김광석의 목소리 자체를 듣기만 해도 슬프고, 그래서 위로가 되고, 그 덕분에 행복하고 그렇네요.”
4. Rage Against The Machine의
세대적으로 힙합을 먼저 받아들인 봉태규는 락앤롤의 그루브를 보여주거나 샤우팅한 창법으로 내지르는 밴드가 아닌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음악을 통해 록의 매력에 처음으로 눈을 떴다고 고백한다. 그 중에서도 이들의 동명 데뷔 앨범의 마지막 트랙인 ‘Freedom’은 펑크와 힙합, 그리고 메탈이 뒤섞인 하드코어의 세계로 소년 봉태규를 인도한 결정적인 곡이다. “듣고 나면 후련한 에너지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곡의 가사에 대해 생각하면서 점점 더 빠져들게 되었어요. FBI 요원을 살해하고 감옥에 갇힌 인디언 인권 운동가의 자유를 노래하는 곡이거든요. 때로는 가사가 연설보다 더 큰 힘을 갖는 것 같아요.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도 참 좋아하는데, 두 곡다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듣는 사람에게 용기를 준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것 같아요.”
5. 강요환의
“아, 가을이네요.” 그래서 결국 지금 봉태규에게 가장 의미 있는 노래를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추억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대신 지금을 뚜렷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듯 요즘 즐겨 듣는 노래들을 주섬주섬 나열하던 그가 마침내 생각났다는 듯 마지막 추천 곡을 결정 했다. “강요환이라는 신인 가수의 ‘한 사람’이라는 노래에요. 요즘 가수들처럼 대단히 화려하게 기교를 부리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그 감성이 더 마음에 와 닿는 것 같더라구요. 나중에 몇 년 지나서 이 무렵을 떠올리면 다른 노래가 생각날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계절에 어울리는 노래를 듣고 싶은 마음이에요. 가을하면 역시 발라드 아니겠습니까. 따끈따끈한 발라드 신곡 하나 소개해 드리고 싶네요.”
“지금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즐겁다”
아무리 <웃음의 대학>이 희극적인 부분이 많은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실수를 수정할 수 없이 실시간으로 연기를 보여줘야 하는 연극이라는 형식은 분명 그에게도 낯선 경험이다. 그러나 연기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한 그는 그 긴장감에서 오히려 희열을 찾는다. “매일매일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재미난 수업을 듣는 기분입니다. 연습을 할 때마다 더 새로워지고 있어요. 그 기분을 말로 표현해 드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죄송할 지경입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아이처럼 들떠 있다. 그리고 “연극을 보시는 100분 동안은 정말 재미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전 지금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즐겁거든요”라고 각오를 밝히는 그는 “새로운, 그리고 발전된 봉태규”를 선보이겠다는 희망으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새로운, 그리고 발전된 희극 연기에 대한 기대감으로 연결 지어진다. 한 우물을 파는 남자. 언젠가는 꼭 샘솟는 물로 보상받으리라.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그러나 이미지가 고정되는 것은 때로 배우에게 위험한 일이다. <품행 제로>부터 <바람난 가족>, <광식이 동생 광태>로 이어지는 은근히 불량하고, 적당히 유쾌한 봉태규 특유의 연기는 <가족의 발견>에서처럼 놀랍도록 생생한 인물로 재단되기도 했지만 어떤 영화 속에서는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를 소모해야 하기도 했다. 모처럼 출연한 드라마 <워킹맘>에서는 평범한 가장을 연기 했지만, 그 역시 그의 디테일한 연기를 포착하기보다는 우악스러운 상황 안에서 그의 희극적인 재능을 부각하기에 바쁜 순간이 더 많았다.
그런 봉태규가 올해는 제법 긴 휴식을 가졌다. 그리고 그동안 심사숙고해서 고른 다음 작품은 그가 최초로 도전하는 연극 <웃음의 대학>이다. “연극은 첫 도전이지만 무대가 두렵지는 않았어요. 워낙 대본이 완벽한 좋은 작품이기도 했고, 캐릭터가 희극적이라서 편안하게 다가온 부분이 있었거든요”라고 말하는 그는 잘하는 것을 외면하기보다는 그 깊이를 더함으로써 성장을 도모한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이 이제는 제법 제 나이를 찾아간다. 어느새 훌쩍, 서른을 앞두고 있는, 언젠가는 희극의 거장이 될 이 남자에게 ‘성장을 함께 한 노래들’을 물었다. “무조건 서태지와 아이들이죠! 아직도 그 노래를 처음 듣던 순간, 그리고 그 당시의 제가 생생하게 떠올라요!”라고 추억 속으로 다이빙하는 이 남자의 궤적을 소개한다. 그동안 봉태규식 연기에 가려져 있던, 진짜 봉태규의 이야기다.
1. Nirvana의
“너무 좋아하면 나쁜 점조차도 전부 닮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지금까지 제가 그런지 패션을 좋아하고 담배를 좋아하는 것도 다 커트 코베인의 영향인 것 같아요”라며 봉태규가 진지하게 추억해낸 첫 번째 노래는 질주하는 청춘의 테마송으로 일컬어지는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이다. 얼터너티브의 시대를 열었던 너바나의 명반
2. 듀스의
90년대 젊은이들의 상징이 미국에서는 너바나로 요약된다면, 한국에서는 듀스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낸 봉태규 역시 시대의 한정품처럼 짧지만 강렬하게 활약했던 두 뮤지션을 모두 생생하게 기억한다. 특히 듀스의 1, 2집을 리믹스한 넘버들로 구성된
3. 김광석의 <클래식 O.S.T>
마냥 활기차게 달음박질치던 청춘의 시간이 주춤하는 순간, 그 자리에는 항상 가슴 아픈 사랑의 추억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아련한 마음을 실감할 수 있는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들을 때 봉태규는 언제나 청춘의 열병 같은 통증을 실감한다고 한다. “옆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을 때나 있지 않을 때나 마찬가지에요. 그냥 이 노래를 듣는 순간은 항상 가슴이 아파요.” 그리고 그 반복되는 경험의 원인을 그는 김광석의 목소리에서 찾는다. “듣는 사람의 목소리를 대신 불러주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잔잔하지만 뜨거운 무엇이 있잖아요. 노래도 좋지만 김광석의 목소리 자체를 듣기만 해도 슬프고, 그래서 위로가 되고, 그 덕분에 행복하고 그렇네요.”
4. Rage Against The Machine의
세대적으로 힙합을 먼저 받아들인 봉태규는 락앤롤의 그루브를 보여주거나 샤우팅한 창법으로 내지르는 밴드가 아닌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음악을 통해 록의 매력에 처음으로 눈을 떴다고 고백한다. 그 중에서도 이들의 동명 데뷔 앨범
5. 강요환의
“아, 가을이네요.” 그래서 결국 지금 봉태규에게 가장 의미 있는 노래를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추억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대신 지금을 뚜렷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듯 요즘 즐겨 듣는 노래들을 주섬주섬 나열하던 그가 마침내 생각났다는 듯 마지막 추천 곡을 결정 했다. “강요환이라는 신인 가수의 ‘한 사람’이라는 노래에요. 요즘 가수들처럼 대단히 화려하게 기교를 부리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그 감성이 더 마음에 와 닿는 것 같더라구요. 나중에 몇 년 지나서 이 무렵을 떠올리면 다른 노래가 생각날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계절에 어울리는 노래를 듣고 싶은 마음이에요. 가을하면 역시 발라드 아니겠습니까. 따끈따끈한 발라드 신곡 하나 소개해 드리고 싶네요.”
“지금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즐겁다”
아무리 <웃음의 대학>이 희극적인 부분이 많은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실수를 수정할 수 없이 실시간으로 연기를 보여줘야 하는 연극이라는 형식은 분명 그에게도 낯선 경험이다. 그러나 연기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한 그는 그 긴장감에서 오히려 희열을 찾는다. “매일매일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재미난 수업을 듣는 기분입니다. 연습을 할 때마다 더 새로워지고 있어요. 그 기분을 말로 표현해 드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죄송할 지경입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아이처럼 들떠 있다. 그리고 “연극을 보시는 100분 동안은 정말 재미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전 지금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즐겁거든요”라고 각오를 밝히는 그는 “새로운, 그리고 발전된 봉태규”를 선보이겠다는 희망으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새로운, 그리고 발전된 희극 연기에 대한 기대감으로 연결 지어진다. 한 우물을 파는 남자. 언젠가는 꼭 샘솟는 물로 보상받으리라.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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