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재밌는 TV 롤러코스터>의 ‘남녀탐구생활’은 같은 상황에서 전혀 다르게 반응하는 남녀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잡아내며 공감과 웃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코미디다. 정형돈과 정가은의 연기도 발군이지만 이 코너의 가장 큰 웃음 포인트는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출출할 땐 라면이 와따에요” 같은 말을 내뱉는 내레이션이다. 너무 정색해서 웃긴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십 수 년 간 지적인 목소리의 대명사였던 <엑스파일> 스컬리의 주인공 서혜정이다. 25년이 넘는 시간동안 다양한 활동을 해온 이 중년 성우는 어쩌다 자신의 이미지를 배반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을지 궁금해진 건 그래서다. 다음은 볕 좋은 가을날 진행된 그 호기심 가득한 대화의 기록이다. 궁금해 할 독자들에 미리 말하자면 눈앞에서 스컬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재밌는 TV 롤러코스터> ‘남녀탐구생활’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실감하나.
서혜정
: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아들이 엄마 덕에 유명해졌다고 하더라. 우리 딸도 “엄마, 내 친구들이 대박이래.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고”라며 밖에서의 인기를 전해준다. 간단히 한 마디씩 쳐주는 대사가 웃긴가 보더라.

“처음에 합성한 듯한 기계 목소리를 들려줬다”

“개념을 밥 말아 먹었어요” 같은 대사들이 그런 느낌인데 젊은 친구들이 쓰는 말투라 좀 생소했을 거 같다.
서혜정
: 내가 모르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녹음할 때 물어본다. 이게 뭐냐고. 그러면 PD나 누군가가 가르쳐주고 그때서야 ‘아하’ 이러면서 녹음한다. 한 글자라도 이해하지 못하고 작업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렇게 녹음한 뒤의 결과물을 보면 스스로도 시청자처럼 웃기고 공감이 가나?
서혜정
: 정말 재밌다. ‘화장실 편’과 ‘목욕탕 편’을 보며 공감도 많이 했다. 여자들은 정말 그런다. 하지만 정말 재밌게 보는 건 남자의 모습이다. 여자 건 그냥 보면서 공감 되는데, 남자 건 진짜 웃기다. 특히 ‘형제자매 편’에서 본 형제의 모습이 최고였다. 자기 동생이 맞고 들어오니까 싸우러 나갔다가 잔뜩 맞고 들어와서 괜히 동생 때리는 거 보면서 많이 웃었다. ‘남녀탐구생활’은 독특하게 내가 먼저 녹음을 하고 정형돈 씨와 정가은 씨가 그걸 들으며 연기를 한다. 일반적인 작업과는 반대인 거지. 그래서 녹음할 때 연기자들이 어떤 연기를 보여줄 지 상상하면서 하는데, 결과물을 모니터해보면 그 둘은 항상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더라. (웃음)

오랜 경력에 비해 예능 경험도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심지어 낯선 어휘까지 쓰는 작업을 선택하기 쉽지 않았겠다.
서혜정
: 두려움이 있었다. 예전에도 어쩌다 한 번 예능 프로그램을 하면 내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캐주얼한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귀여운 레이스 달린 옷을 입은 듯한, 그런 불편한 느낌이었다. 한두 번 정도 기회가 있어서 해봤지만 하고 나서 영 불편해서 안 한다고 그랬다. 아마 시리즈물이었을 텐데 내가 바꿔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시 녹음하고 내 건 방송되지 않았을 거다. 이번에는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 ‘남녀탐구생활’의 이성수 PD가 내레이션을 요청했다. 나름대로 내 목소리를 가지고 어찌어찌 하면 될 거라는 계산을 하고서 부른 거지.

과거엔 한 번도 들려준 적이 없는 목소리 톤인데 PD의 요구는 어떤 거였나. 혹 참고할만한 선례가 있었나.
서혜정
: 아니다. 순전히 PD 머릿속에서 나왔던 거다. 처음에는 스컬리처럼 하면 된다고 해서 그 톤을 바탕으로 녹음했더니 인터넷을 뒤져서 합성한 듯한 기계 같은 목소리를 들려줬다. 또 거기에 시니컬한 감정까지 넣어달라고 해서 다시 녹음했더니 거기서 모든 감정을 빼달라고 했다. 너무 어려웠다. 첫 회는 그나마 잘 됐는데 두 번째부터 막 혼란이 왔다. 톤을 잡느라고. 전혀 없던 걸 하려니 이게 산으로 가는지 바다로 가는지도 모르겠고. 밤 12시에 불러서 다시 녹음할 때도 있었다. 5, 6회까지 그렇게 헤매다가 이제 8회부턴 한 호흡에 갈 정도가 됐다.

가장 포인트라고 생각하는 건 어떤 건가.
서혜정
: ‘남녀탐구생활’의 키포인트는 발음이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발음이 굉장히 정확하다. 일반적인 말은 장단음과 억양이 있어서 운율이 생긴다. 그래서 대충 발음해도 전달이 되는데 한 톤으로 운율 없이 읽을 때는 발음이 정확하지 않으면 전달이 안 된다. 한 글자 한 글자 닭이 모이 쪼듯 하나하나 쪼아줘야 한다.

“가끔 사석에서 스컬리 목소리를 내달라는데 딱 더빙할 때만 나오는거다”

이번 추석 때 채널 CGV 추석 특집 영화 스팟 광고에서 그 톤과 말투를 사용하는 걸 듣고 이제 하나의 캐릭터가 완성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혜정
: 전에는 스컬리를 많이 우려먹었는데 (웃음) 거의 15년 만에 새롭게 태어난 거다. 요즘은 ‘남녀탐구생활’ 목소리로 광고도 몇 개 들어온다.

사실 최근 이 코너가 뜨기 전엔 역시 서혜정 하면 스컬리였다. 다른 작업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서혜정
: 사실 <엑스파일>을 수입하면서 KBS 미디어 사장님이 우리나라 정서에 맞을지 확신을 못했다더라. 방송 할 때도 큰 기대를 안 하고. 지금이야 월요일 11시가 황금시간대지만 당시에는 버리는 시간이었는데 거기에 편성을 받았다. 그 때 멀더 역에는 이규화 씨가 바로 캐스팅됐지만 스컬리 역은 데스크에서도 정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PD가 이규화 씨에게 같이 작업하기 편한 사람을 고르라고 했고, 그가 동기인 나를 뽑았다. 그런데 대박이 난 거지. (웃음)

스컬리 역을 할 때는 정장 입고 단발머리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일종의 메소드 연기 같은 건가.
서혜정
: 그렇다. 성우는 목소리 좋은 사람이 아닌, 목소리 배우다. 외화 더빙을 할 땐 메소드 연기를 한다고 보면 된다. 완전 그 사람이 되는 거지. 가끔 사석에서 스컬리 목소리를 내달라고 하는데 그 목소리는 딱 그 때만 나오는 거다. 메소드 됐을 때.

흥미로운 게 당신의 스컬리 목소리는 질리언 앤더슨의 허스키한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르다.
서혜정
: 더빙은 우리나라 정서를 살려야 하니까. 즉 서양 배우의 얼굴 이미지와 어울리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듣기에 어색하지 않은 톤을 디자인해야 한다. 가령 스컬리 같은 경우엔 좀 푸른빛이 도는 톤을 베이직으로 유지하면서 상황에 따라 다른 색의 톤을 섞는 거다. 일종의 창조 작업이지.

그런데 연기자가 그렇듯 하나의 배역으로만 기억되는 건 강점이자 약점일 수 있다.
서혜정
: 물론이다. 그러니 변신할 필요가 있지. 사실 다른 작업도 많이 했다. KBS <생로병사의 비밀>도 꾸준히 하고 있고, TBN <음악살롱>에서 DJ도 하고. 애니메이션의 경우 강수진 씨나 정미숙 씨 같은 스타들만큼 많이 하진 않았지만 신기하게 하면 다 반응이 좋았다. <세일러문>이나 <란마 1/2>, <이누야샤> 같은 작품들. 그리고 최근에는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 오디오북 작업의 보이스 디렉터 작업도 했다.

보이스 디렉터라면?
서혜정
: 성우들의 캐스팅도 직접 하고 읽을 때의 맛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거다. 물론 연출은 아니지만 이걸 해설로 갈지, 대화체로 갈지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들에 내가 깊이 관여했다. 헐리웃에서는 배우들의 목소리를 디렉팅하는 보이스 디렉터가 있다고 하는데 나도 비슷한 역할을 했으니 보이스 디렉터로 올려달라고 그랬다. (웃음) 낙제점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한 번 더 한다면 정말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감각을 잃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계속해서 성우가 할 수 있는 작업이 늘어나는 것일 수 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더빙 일 같은 건 과거보다 줄어들진 않았나.
서혜정
: 많이 변했다. 내가 82년부터 시작했는데 그 때는 라디오 드라마가 많았다. 또 방송국 외부 작업으로는 아이들 동화 제작이 많았고. 그러다가 TV 매체가 점점 부각되면서 외화와 애니메이션 더빙이 아주 많아졌다. 그런데 이제 외화 같은 경우는 자막을 선호하는 분들이 많아졌다. 사실 더빙을 하면 성우 입장에서 일터가 생기는 거니까 좋기는 한데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자막을 본다. 공중파에선 더빙을 해야 한다고 보지만. 애니메이션이야 투니버스나 이런 곳에서 꾸준히 더빙하긴 하는데 내 딸아이는 오리지널을 보는 걸 좋아한다. 일본 성우들이 훨씬 잘한다며. 가끔 투니버스 보면서도 더빙에 대한 평을 한다. 주로 저 성우는 아니라는 평을 많이 하더라. (웃음)

실제로 일본은 스타급 성우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서혜정
: 작업 환경의 차이다. 거기는 성우가 캐스팅 되면 영화배우들이 개런티 받듯 사례금을 받는다. 작업도 오랜 시간을 들여 연습도 많이 하며 한다. 그런데 우리는 캐스팅 되면 대본만 미리 받고 당일에 가서 슈팅 한 번 들어가면 끝이다. 그래서 딸에게도 그렇게 설명을 해줬다. 우리도 일본 같은 환경이면 더 잘 할 수 있다고. 이런 환경에서도 성우에 관심을 가지는 마니아들이 생기는 게 신기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성우를 하는 게 쉽지 않은가 보다.
서혜정
: 연예인하고 똑같다. 톱클래스에 들지 않으면 생활 자체가 힘들다. 방송국 전속 기간에는 월급이 나오니까 괜찮다. 그러다 3년이 지나면 프리가 되는데 이 때 정말 잘해야 한다. ‘얘는 아니다’라는 평가가 나오면 일이 없어진다. 보통 성우 생활 10년이 넘으면 급수가 올라가고 개런티도 높아지는데 이때부턴 정말 냉정한 평가를 받는다. 개런티가 높으니까 정말 실력이 좋아야만 뽑히는 거다. 대한민국 성우가 600명 정도인 걸로 아는데 그 중 활발히 활동하는 게 100명 정도고, 그나마 성우 직업만으로 어느 정도 생활 가능한 게 200명 정도다. 그 외의 사람은 투잡도 하고 그런다.

이런 환경에서 당신은 20년 이상 스타 성우였고, 가장 최신 트렌드의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활동한다. 그 비결이 뭔가.
서혜정
: 감각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가장 안타까운 후배들이 감각 놓치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어느 정도 됐다 싶을 때 거기서부터 더 파고들어야 한다. 목소리만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 경험 자체를 풍부하게 해야 한다. 가령 나 같은 경우 쉴 땐 여행도 자주 가고 화랑에서 그림 보는 것도 즐긴다. 끊임없이 감각의 안테나를 세우고 느껴야 한다. 나는 20년차 나는 후배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트렌드를 배우는 거지. 걔들 밥 사주고 술 사주는 게 다 내 공부다. (웃음)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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