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황금어장> ‘무릎 팍 도사’ 안철수 편에서 올밴은 “선생님에 비하면 우리는 망나니”라고 말했다. 약 한 시간 정도 김명민과 대화하며 느낀 감정 역시 이와 비슷하다.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루게릭병 환자 백종우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엄청난 감량을 한 그는 아직 야위고 피곤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인물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이겨내야 한다고, 그것이 배우의 몫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리고 그 연기 철학과 그동안 그가 그동안 보여준 실제 연기 과정은 한 치 오차 없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가 그저 연기를 잘하는 직업인으로서의 배우가 아닌 ‘명민좌’로 추앙받는 것은 아마도 그런 수도승 같은 아우라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실, 이 인터뷰는 감화의 기록에 가깝다.

요리할 재료가 많은 시나리오를 좋아한다고 알고 있다. 이번 <내 사랑 내 곁에> 역시 그랬던 건가.
김명민
: 그런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요리고, 재료고 이런 걸 떠나서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시나리오를 보면 알겠지만 내 역할은 그냥 죽는 거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확연하게 수척해진 몸, 몰라보게 수척해진 몸, 이런 식으로 서서히 인물이 죽어가고 그 순서대로 배우 역시 똑같이 죽어가는 거다. 제대로 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받았을 때 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할 거다. 시나리오 읽고 나서부터 매일 죽는 악몽을 꿨다. 아무리 영화가 좋고 연기에 대한 도전의식이 있고 감독에 대한 신뢰가 있을지언정 누가 그런 작품을 하겠나.

“<내 사랑 내 곁에>는 주변의 소중한 이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영화”

그럼 대체 왜 고른 건가.
김명민
: 운명의 끈? 그런 식의 어떤 이끌리는 힘에 의해 한 거다. 거부하려고 해도 거부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반대로 잡으려고 해도 손에 안 잡히는 작품이 있는 것처럼. 정말 자신 없어서 못하겠다고 했는데 감독님께서 계속 기다리셨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 아닌가. 2개월 동안 고민했다. 작품 선택에 있어 그렇게 오래 고민한 적은 처음이다. 물론 최종 선택은 결국 내가 한 것이겠지만.

힘든 결정이었고 그만큼 힘든 연기였겠지만 자칫 신파라는 틀 안에서 정형화의 함정에 빠질 위험도 있었을 거 같다.
김명민
: 억지로 눈물을 빼는 게 신파라면 우리 작품은 신파가 아니다. 눈물을 자아내기 위한 작위적인 설정과 도구는 하나도 없다. 박진표 감독님의 전작인 <너는 내 운명>도 그렇지 않나. 다들 ‘눈물 짜는 신파구나’라고 극장에 들어갔겠지만 그 생각 그대로 극장을 나선 사람은 없었을 거다. 우리 영화도 그렇다. 오히려 일종의 다큐멘터리처럼 볼 수도 있을 거다. 내 가족, 혹은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일들, 그리고 떠나간 사람과 남아있는 자의 슬픔을 보여주는, 그래서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일 거다. 아마 그 인물들의 감정에 동화돼서 눈물을 흘리지, 신파극 때문에 눈물 흘리진 않을 거다. 인간의 원초적 감성을 뚝심 있게 몰아붙이는 감독님의 연출 스타일을 믿었으니까 그렇게 도망가다가 결국 작품에 합류하게 된 거다.

현장에서의 박진표 감독 스타일은 어땠나. 언젠가 배우를 괴롭혀서 그 안에서 최대한 끌어내는 감독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김명민
: 촬영하기 전부터 얘기는 굉장히 많이 들었다. 절대 안 봐준다고. 원하는 게 나올 때까지 테이크를 계속 간다고. 그래서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갔는데 내가 들은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어떻게 저런 분이 독사 같다는 얘기를 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웃음) 스태프를 통솔하기 위해 일부러 권위적인 액션을 취할 때가 한 번도 없었다. 그냥 친형 같았다. 내가 그렇게 무리하게 감량할 수 있었던 건 감독님 때문이다. 내가 죽을 각오로 살을 빼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라고 고민할 때 의미를 부여해 준 게 감독님이다

굉장한 신뢰감이다.
김명민
: 감독님이 내게 몸소 신뢰를 보여준 거다. 그분은 첫 번째가 배우들이다. 배우의 감정, 몸 상태를 제일 먼저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호받는 느낌, 촬영장에 나가면 날 간호해줄 사람들이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대중을 신경쓰다보면 오히려 대중을 위한 게 아닌 게 된다”

말하자면 몰아붙이기보다 오히려 스스로 열게 해줬다는 건데 이제는 김명민이라는 배우 자체가 연출자가 부담을 느낄 정도의 준비를 스스로 하는 느낌도 있다.
김명민
: 무언의 압력이 무섭다고 하지 않나. 누구 하나 내게 몇 킬로그램까지 빼라고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알아서 빼겠지’라고 믿는 사람들의 눈빛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촬영 스케줄을 보며 압박감을 느꼈다. 1부터 108 정도까지의 신이 있는데 그 순서 그대로 촬영했다. 그렇게 찍으려면 돈도 많이 든다. 보통 세트 들어가면 그 안에서 찍을 내용은 다 찍고 나오는데 순서대로 찍다보니 세트 들어갔다가 야외 갔다가 또 다른 데 가고, 그런 식인 거다. 그건 알아서 빼라는 얘기지. 오늘보다 내일 더 빠져야 하고 내일보단 모레 더 빠져야 하고. 촬영 스케줄만 봐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가 딱 보였다. 그건 나만의 숙제였던 거고.

대중의 기대 역시 압박이 되진 않았나. 강마에 캐릭터 이후 대중들도 당신의 루게릭병 환자 연기에 강한 기대감을 품은 것 같다.
김명민
: 압박감을 안 느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생각보다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다. 나 자신을 위해 연기한다는 건 아니다. 연기를 통해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적 메시지도 주고 꿈도 주는, 조금은 먼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남들 너무 신경 쓰면 그런 목표와 멀어진다. 즉 그분들을 위해 신경을 쓰면 오히려 그분들을 위한 게 아니게 되는 거다. 작품이 흥행하든 안 하든 그걸 먼저 따지면 아무 것도 못한다.

그렇다면 대중적 반응과는 별개로 스스로의 연기에 만족해하는 기준이 있을 텐데.
김명민
: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거다. 그러면 많은 분들이 같이 느껴주시고 공감해주는 거 같다. 철저하게 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인격을 집어넣었을 때 뭔가가 계속 올라온다. 누구나 자의식이 있으니까. 그걸 누르고 다른 사람의 인물을 살게 될 때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거다. 그럴 때 많은 분들이 진정성을 느끼고 공감을 느끼는 거다. 그런 작품은 당장 시청률이 5%, 관객이 10만 명 들더라도 1, 2년 지난 후에는 많은 분들이 다시 봐 주신다. 그에 반해 싸움에서 졌는데 흥행에 성공하면 순간 반짝하고 CF도 많이 찍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겠지만 1, 2개월 안에 사그라질 거다.

당신에게도 스로에게 지는 순간, 실패한 작품이 있는 건가.
김명민
: 많다. 가령 영화 <무방비도시>. 그땐 그냥 김명민 그대로 찍었다. 미친 거지.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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