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후반의 여자다. 그리고 결혼을 안 하고 있다. KBS <결혼 못하는 남자>의 장문정은 이 두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드라마에서 이 간단한 설정이 가지는 의미는 만만찮다. 원작인 일본 드라마를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장문정은 지금까지 한국 드라마가 발견하지 ‘않’았던 유형의 캐릭터다. 그는 재벌 2세를 기다리지도 않고, 결혼에 목메지도 않으며, 결혼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화려한 싱글’도 아니다. 장문정은 보기 드물게 한국 드라마에서 결혼을 ‘선택’할 수 있는 여자다. 장문정에게 결혼은 거부감도 없지만, 급하지도 않은 것이다. 사회에 30대 커리어 우먼이 급증하고, 그들에게 ‘노처녀’가 아닌 ‘골드미스’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할 때 쯤 장문정도 드라마에 등장할 수 있었다.

이 땅에서 가장 희귀한 엔터테이너

그래서 엄정화다. 엄정화는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연애와 결혼을 따로 선택하는 여자였고, 영화 <싱글즈>에서는 아이만을 원하는 비혼모였으며, SBS <칼잡이 오수정>에서는 철저하게 조건을 따지며 결혼 상대를 고르는 노처녀였다. 신문 문화면에 새로운 유형의 여성에 대한 기사가 나오고, 영화와 드라마가 그 모습을 반영할 때면 제작자와 감독들은 늘 엄정화를 선택했다. 그가 “우정출연 정도로 생각했다”는 영화 <해운대>에서마저, 엄정화는 이혼 뒤 혼자 딸을 키우며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는 커리어 우먼이다. 장문정은 엄정화가 이 모든 ‘시대의 여성상’을 거쳐 얻은 또 다른 현대 여성의 모습이다. TV가 화려한 싱글족과 노처녀에 이어 결혼 안하는 여자를 받아들이는 그 순간, 엄정화는 장문정을 연기했다.

‘초대’부터 ‘디스코’에 이르기까지, 가수 엄정화가 비주얼과 퍼포먼스를 통해 파격을 보여주는 사이, 배우 엄정화는 자기 또래의 여성들이 경험하는 새로운 유형의 삶을 연기하며 TV안에 조용한 파격을 가져온다. 외형적인 이미지는 전혀 다르지만, 결국 파격으로 합쳐지는 엄정화의 디스코그래피와 필모그래피의 합은 엄정화를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가장 독특한 위치를 갖도록 만든다. 엄정화는 가수와 배우 양쪽에서 성공한 동시에, 가수와 배우로서의 변화 폭이 가장 큰 희귀한 존재다. ‘초대’와 ‘배반의 장미’의 섹시한 팜므파탈 뒤에는 KBS <아내>의 지고지순한 여성이 있었고, SBS <칼잡이 오수정>의 주책 맞은 노처녀 뒤에는 다시 댄스 가수로 돌아간 ‘디스코’가 있었다.

엄정화는 시대의 여자로 산다

하지만 엄정화의 대체하기 힘든 이미지는 단지 섹시함과 청순함, 혹은 도도함과 털털함 사이의 도식적인 변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몰라’의 뮤직비디오에서 러닝 타임 내내 변화하는 엄정화의 모습처럼, 엄정화에게 중요한 건 끊임없는 변화 그 자체다. 팜므파탈과 조강지처를 오가는 사이, 엄정화는 자신의 모습을 그 시대의 문화적, 사회적 변화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바꿔 나간다. <아내>에서의 엄정화는 단지 지고지순한 여성일 뿐이지만, 몇 년 뒤 MBC <12월의 열대야>의 엄정화는 부유한 시댁 식구들의 정신적인 폭력에 시달리다 남편과의 결별을 선택한다. 그가 속옷을 겉에 입는 패션을 시도한 것 역시 섹시함의 과시 보다는 파격적인 변신에 방점이 찍힌다. 엄정화는 섹시함을 과시하지만 섹시함만으로 살지는 않고, 노처녀를 연기하지만 노처녀의 이미지에만 함몰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극단적인 이미지들 사이에서 자기 또래의 여성들의 변화들을 가장 빠르게 보여준다.

그래서 엄정화는 당대의 아이콘이다. 시대의 트렌드를 따라 그가 보여준 모습들은 그 시대의 단면을 보여준 아이콘들이었고, 어느덧 엄정화는 그 모든 것들이 한 몸에 모인 아이콘 그 자체가 됐다. 10여년 전에는 섹시 콘셉트의 여가수가 지고지순한 아내를 연기하는 것이 새로운 여성상이 될 수 있었고, 때로는 속옷을 겉에 입는 가수나 <칼잡이 오수정>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노처녀가 대중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설 때도 있었다. 엄정화는 그 모든 것들을 거치며 그 자신이 지난 20여년 동안 현대 여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상이 됐다.

‘디스코’와 <결혼 못하는 남자>는 그런 엄정화가 도착한 새로운 기착지다. ‘디스코’에 이르러 엄정화는 더 이상 속옷을 겉에 입는 파격적인 시도를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한껏 대중적인 멜로디를 노래하면서, 수많은 누나들의 사랑을 받는 빅뱅의 탑과 함께 무대에서 즐겁게 논다. 또한 <결혼 못하는 남자>의 장문정은 비혼모도, 연애와 결혼을 따로 생각하는 도발적인 여자도 아니다. 대신 그는 하루하루를 때론 즐겁게, 때론 외롭게 살아간다. 파격이 더 이상 파격처럼 보이지 않는 시대에, 엄정화는 또래 여성의 감성과 라이프 스타일 속으로 들어가서 또다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여성으로 변신했다. 물론, 엄정화는 앞으로 점점 더 나이들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엄정화에게 상관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 당대의 아이콘은 할머니가 된다 해도, ‘당대의 가장 파격적인 할머니’가 될 테니.

글. 강명석 (two@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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