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결혼 못하는 남자>의 시작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명의 원작 일본 드라마에서 주인공 구와노 신스케 자체였던 아베 히로시 덕분에 지진희가 연기할 조재희는 시청자들의 호감을 사기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한 회, 한 회 조재희의 에피소드가 쌓여갈수록 결혼 안 하는 남자들은 조재희의 우아한 싱글 라이프를 부러워하고, 전국의 건어물녀들은 쉽사리 연애 못하는 장문정 선생(엄정화)에게 공감했다. 게다가 옆집 개 상구와 친구가 될 정도로 은근히 귀여운 구석까지 있는 조재희가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며 변하는 모습은 흐뭇하기까지 하다. 결혼을 안 하든, 못 하든 사랑스러운 캐릭터들로 가득한 <결혼 못하는 남자>의 솔로 생활 백서를 <10 아시아> 위근우 기자와 정진아 TV평론가가 탐독했다. /편집자주
글. 정진아 (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양갱을 항상 입에 물고 다닌다. 자기 물건에 손대는 걸 싫어한다. 병원에서 도망쳐 나온다. 여자에게 시비 거는 걸 좋아하고 말싸움이 붙으면 지려 하지 않는다. 이건 우리 아이 생활 태도 평가 항목이 아니다. 올해 마흔이 된 남자, KBS <결혼 못하는 남자>(이하 <결못남>) 조재희(지진희)에 대한 얘기다. 물론 그는 순간 떠오른 거실과 주방 풍경을 순식간에 스케치하는 건축계의 능력자이고, 스파게티 면과 폭죽의 종류에 통달한 상식 박사다. 대신 노처녀를 녹슨 자동차로 비유해 화나게 만들어 놓고선 “나이보단 젊어 보인다”는 말을 사과랍시고 던지고, 어른에게 받은 선물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그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려 하는 사회화가 덜 된 어른이기도 하다.
조재희 씨, 진짜 혼자 살고 싶은 거 맞아요?
종종 재희는 독신의 특권에 대해, 인간관계의 귀찮음에 대해, 결혼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나름의 철학을 늘어놓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과시하지만 사실 그 세계는 생각만큼 공고하지 않다. 그는 자식을 혼자 두고 죽을까봐 걱정하는 어머니 앞에서 “내가 언제 혼자가 아닌 적이 있었나”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는 한 번도 제대로 혼자인 적이 없다. 그는 성역이라 칭하는 자신의 집을 자신만이 사는 섬처럼 고립시키려고 하고 실제로 그렇게 믿지만 그 섬에서의 풍족한 생활은 기란(양정아)이 재희 대신 클라이언트와 현장 감독의 비위를 맞춰주고 복통에 쓰러졌을 때 옆집 유진(김소은)이 병원에 데려다 줬을 때 가능하다.
물론 그 누구도 어떤 일관된 룰 안에서 논리적 오류 없이 수미일관한 생활을 할 수는 없다. 재희가 유치한 건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해서가 아니라 실제로는 허점투성이인 규칙을 붙잡고서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고 우기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관계 따위 귀찮지 않느냐고 혼잣말처럼 말하지만 “귀찮으면 관계를 끊으면 되지 않느냐”는 문정(엄정화)의 되물음에는 아무 말 하지 못한다. 실제로 그는 다들 유진의 집에 모여 밥 먹는 걸 부럽게 바라보고, 불꽃놀이를 보러 문정이 온 것에 반가워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렇지 않은 척 하고 자신의 개똥철학을 굽히지 않으려 할 뿐이다. 앞서 말했듯 그것은 허세고 좀 더 정확히 말해 잘못된 걸 어머니가 지적하면 심통을 부리는 유아기 남자아이의 고집에 가깝다. 인간관계 귀찮다는 재희에게 문정은 “말하기 전에 생각하라”고 분노하는데, 뚜렷한 대상 없는 혼잣말이야말로 유아기의 대표적 특징이다. 시도 때도 없는 재희의 상식 과시 역시 어제 읽은 백과사전 내용을 암기하며 뽐내는 초등학생 남자아이를 연상케 한다.
불안해 보이는 삼각관계의 함정
그래서 <결못남>은 결혼을 못해서 문제인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결혼 적령기를 지나서도 아직 사춘기 과정에도 이르지 못해 문제인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재희의 나이 마흔은 노총각의 상징적 숫자기도 하지만 배려 없는 말로 동년배 여자에게 상처를 주고, 꾀피우느냐는 말로 열심히 철야 근무한 부하 직원에게 배신감을 줄 수 있는 실질적 위치기도 하다. 그래서 나이에 맞는 성장이 필요하고, 실제로 문정과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그녀의 아버지를 위해 자기가 지독히 싫어하는 현장 감독에게 맛있는 순댓국집을 물어보는 재희의 변화는 성장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항상 원점이 되는 것에 지친다는 문정의 말처럼 멜로 라인의 발전은 더디지만 이 드라마가 흥미로울 수 있는 건 이 완만한 성장기가 결국 사람과 사람을 보듬는 보편적 가치를 무리 없이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상냥해지고 주위를 볼 수 있게 된 것만으로 문정과 유진의 마음을 빼앗은 최근 2회의 급진전은 그래서 조금 불안하다. <결못남>에서 결혼이 갖는 의미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함이라 할 때, 재희가 결혼할 수 있는 남자가 되기 위해 증명해야 할 건 주인공으로서 부여받은 이성적 매력이 아니라 여러 인원이 작업하는 햇살마을 이전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는 포용력일 것이다.
글 위근우
KBS <결혼 못하는 남자(이하 결못남)>의 시공간은 대체로 평일/주말, 직장/집/단골가게 식으로 단조롭게 반복되는데, 그 방식이 드라마적이라기보단 시트콤적이다. 예를 들어 이 드라마에서의 병원은 MBC <하얀거탑>처럼 권력 싸움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라 문정(엄정화)이 아침이면 출근하는 생활공간이란 거다. 때 되면 밥 먹고, 일 많으면 야근하고, 주말이면 DVD 6편을 빌려보는 <결못남>의 반복된 생활 패턴은 이 드라마의 관심이 굵직하고 극적인 사건에 있지 않단 걸 반증한다. <결못남>이 주목하는 건 일상이라는 토대 위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과 ‘인간들’이다.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는 타인들
<결못남>은 ‘인간’이 어떻게 ‘인간들’로 관계 맺으며 사는지 보여주기 위해, 인물들 대부분을 ‘누군가의 친구’라는 식으로 한정 짓지 않고 저마다의 삶을 구축하며 사는 개체로 설정했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동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각자 체감하는 세상은 동질하지 않다. 자기 이름을 내건 사무실이 현규(유아인)에겐 미래의 꿈이고 재희(지진희)에겐 현재의 삶이며 문정의 아버지에겐 과거의 기억이듯, 또 500만원이 유진에겐 몇 달을 고생해야 마련할 수 있는 큰돈인데 반해 문정에겐 ‘그 정도는 충분히 빌려줄 수 있는’ 돈이듯, 그들의 세상은 저마다 다르다. <결못남>은 그 차이를 중요하게 다룬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타인을 필요로 하게 하는 이유이고, 삶을 다채롭게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오는 말을 참기가 죽기보다 힘든 재희에게 기란(양정아)의 사교성과 배려가 없었다면 사회생활은 불가능이었을 것이다. 결혼에 대한 생각 차이로 문정은 틈만 나면 아버지와 싸우지만 그 투덕거림은 어찌됐든 그들이 가족으로서 서로를 사랑한다는 증거다. <결못남>은 이런 장면들을 통해 서로 다른 이들이 만나 결핍을 채워가는 일이야말로, 소박하되 다채로운 관계망을 만들어가는 일이야말로 인간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일이라고 전하고자 한다.
드라마가 반드시 드라마틱할 필요는 없다
<결못남>의 그런 가치관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재희와 문정의 관계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건 상대방이 자신의 부족함을 누구보다 충실하게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퇴근시간에 저녁 같이 먹을 사람 없나 두리번대는’ 문정은, 단순화시키면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고 싶어 하는 여자이고, 꺼림칙한 일이 생길 때마다 신체적인 증상을 호소하며 문정을 찾는 재희는 누군가와 같이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남자이다. 즉 그들에게 사랑은 ‘너밖에 없어!’ 식의 열정적인 게 아니라, 함께 밥을 먹어주고 서로의 얘기를 들어주는 일인 것이다.
<결못남>에는 극적 사건도 열정적 사랑도 존재하지 않기에 심심하게 느껴지기 쉬운 드라마이다. 하지만 모든 드라마가 늘 특별한 이들의 특별한 얘기를 드라마틱하게 그려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못남>은 드라마틱한 구조의 부재를 일상적인 인간관계들이 지닌 다양한 층위들을 세심하게 바라보는 걸로 대체하며 제법 깊이 있는 소품으로 그려내고 있다.
글 정진아
글. 정진아 (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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