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스포츠에 빗대 얘기한다면 아마도 고동선 감독에게 어울리는 별명은 ‘올라운드 플레이어’일 것이다. 올 상반기의 손꼽을 만한 히트작 MBC <내조의 여왕>으로 알려지기 전, 그는 이미 이 시대 한심한 청춘들을 위한 연가 <메리 대구 공방전>으로 2007년 여름을 잊지 못할 시간으로 만들었고, 그의 미니시리즈 데뷔작은 그동안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정서와 관계를 그린 <달콤한 스파이>였다. 그래서 옴니버스 드라마 <떨리는 가슴>의 ‘기쁨’ 편을 포함하더라도 <내조의 여왕>을 제외한 고동선 감독의 작품들이 모두 ‘대박 드라마’는 아니었지만 그가 소재와 장르를 불문하고 드라마에서 연출력이 갖는 힘을 120% 발휘하는 연출가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코미디와 멜로를 이야기 안에 섬세하게 녹이는, 가히 타고난 감각의 소유자인 고동선 감독이 실제로는 연출가보다 오히려 학자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는 것은 그래서 퍽 재미있는 사실이다. 신화와 역사, 고전, 철학, 각종 사상을 넘나들며 이어지는 대화의 폭도 그렇거니와 90년대 초반에 쓴 그의 석사 논문 주제가 ‘탈규제정책과 방송 이데올로기의 변화’였다는 회상 역시 흥미롭다. “요즘 미디어 법에서 말하는 소유 규제의 문제 같은 정책에 대한 분석인데, 사실 정책의 배경이 되는 건 철학이거든요. 디레귤레이션(deregulation), 탈규제정책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왜 추구되는 것이며 어떻게 방향지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아주 중요한데 시장이 뭔가를 다양하게 만들어 줄 거라는 건 좀 맹목적인 기대이기도 해요. 이미 유럽에서는 1990년대 초반에 ‘시장은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보여줄 뿐, 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거든요. 지금 우리는 20년 가까이 지나서야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석사를 마친 뒤 “현장에서 박사 과정을 한다 치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일하겠다”며 93년 방송사에 입사한 고동선 감독은 황인뢰, 장수봉, 최종수, 김종학 등 쟁쟁한 선배들이 모여 있던 MBC 드라마국에서 “드라마를 진지하게 만드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선배들의 치열한 장인정신이 사람들 사이의 이해와 소통의 폭과 깊이를 더해줬고 휴머니즘의 수준을 높여주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작품들을 제가 비슷하게 만들거나 흉내 낼 수는 없지만 각각의 좋은 점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거죠.” 그리고 이제는 그 자신이 선배가 되어 “드라마는 실제가 아니지만 그로 인해 담론이 오가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그것이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교육만큼이나 중요한 백년지대계”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고동선 감독이 마음 속 지표처럼 남아 있는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MBC <베스트셀러 극장> ‘소나기’
1987년. 극본 장선우, 연출 최종수
“황순원 선생의 <소나기>를 드라마화한 작품이에요. ‘줄거리를 그대로 옮기는 게 뭐 그리 재미있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는 건 스토리만이 아니에요. 어떤 소설을 원작에 충실하게 영상화했을 때 텍스트가 그대로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걸로도 충분하거든요. 당시 최종수 선배는 문학성이 있는 드라마를 주로 만드는 편이었는데 특히 ‘소나기’ 같은 경우는 ‘아, 그 소년과 소녀가 정말 저렇게 생겼겠구나, 저런 행동을 했겠구나’ 하면서 상상하던 것들을 눈으로 확인할 때의 기쁨이 느껴졌던 것 같아요. 심지어 내 상상과 좀 다른 점이 있더라도 ‘저게 더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잘 만들어진 작품이었죠.”
MBC <땅>
1991년. 극본 김기팔, 연출 고석만
“옛날에는 ‘땅’이었고, 농부들은 ‘논’이라 부르고 요즘은 ‘부동산’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독점되는 현실을 담은 작품이었어요. 주인공을 맡았던 박규채 선생이 굉장히 독특하게 현실적이면서도 모순적인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그가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대사 “민나 도로보데스!(다 도둑놈들이야!)”가 아주 유명했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정치권의 압력으로 조기 종영되는 바람에 제대로 된 끝은 보지 못했고, 당시 고석만 선배와 스태프들이 목 놓아 울었다고 해요. 그리고 김기팔 작가가 그 해에 사망하는 바람에 <땅>이 그의 유작이 되었어요. 슬픈 드라마죠.”
MBC <창 밖에는 태양이 빛났다>
1992년. 극본 박정화, 연출 황인뢰
“황인뢰 선배 작품을 보고 연출을 하겠다고 뛰어든 사람이 많아요. 그 분이 많은 사람들을 꼬셨고 저도 그 중 하나인 셈이죠. (웃음) <창 밖에는 태양이 빛났다>는 대학원생일 때 봤던 작품인데, 멜로이면서 묘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가 있고 스토리나 캐릭터가 전형적으로 흐르지 않는 걸 보면서 ‘이런 게 드라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하나의 공간 안에서 주인공 네 사람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분위기도 판타스틱 했고, 영상 자체가 매혹적이었어요. 황인뢰 선배의 작품 중에는 <고개 숙인 남자>도 좋아하는데, 언론인을 연기했던 최불암 선생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게 정권 비판적이라고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어요. 제가 사회과학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으로 얘기하기 힘든 진실을 드라마를 통해 그렇게 풍부하고 깊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나요.”
“‘사람’을 단순화시키고 싶지 않아요”
<내조의 여왕>을 마친 뒤 요즘 잠시 한숨 돌리며 사람들을 만나거나 읽지 못했던 책을 읽고 있다는 고동선 감독은 그동안 그래왔듯 앞으로도 사람에 대한 해석을 깊이 있게 하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 한다. “A는 좋은 사람, B는 나쁜 사람, 하는 식으로 ‘사람’을 단순화시키고 싶지 않아요. 저 자신도 누군가 나를 좀 더 이해하고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으니까 제가 다루는 캐릭터 역시 깊이 있고 중층적으로 보고 싶은 거죠.” <007> 시리즈와 같은 첩보, 액션, 멜로 같은 소재를 늘 좋아했기 때문에 <달콤한 스파이>를 만들기도 했다는 그는 다음 작품에서 “좀 더 스케일이 있는” 걸 해 보고 싶은 욕심도 있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기획에서 방송까지 훨씬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하나의 이야기만을 생각할 수는 없지만 결국 “어떤 그릇에든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라는 그의 말은 액면 그대로의 믿음을 준다. 그동안 어떤 모양새의 그릇에든 재미와 진정성을 담아냈던 그의 작품들을 떠올려 보면 당연한 일이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코미디와 멜로를 이야기 안에 섬세하게 녹이는, 가히 타고난 감각의 소유자인 고동선 감독이 실제로는 연출가보다 오히려 학자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는 것은 그래서 퍽 재미있는 사실이다. 신화와 역사, 고전, 철학, 각종 사상을 넘나들며 이어지는 대화의 폭도 그렇거니와 90년대 초반에 쓴 그의 석사 논문 주제가 ‘탈규제정책과 방송 이데올로기의 변화’였다는 회상 역시 흥미롭다. “요즘 미디어 법에서 말하는 소유 규제의 문제 같은 정책에 대한 분석인데, 사실 정책의 배경이 되는 건 철학이거든요. 디레귤레이션(deregulation), 탈규제정책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왜 추구되는 것이며 어떻게 방향지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아주 중요한데 시장이 뭔가를 다양하게 만들어 줄 거라는 건 좀 맹목적인 기대이기도 해요. 이미 유럽에서는 1990년대 초반에 ‘시장은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보여줄 뿐, 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거든요. 지금 우리는 20년 가까이 지나서야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석사를 마친 뒤 “현장에서 박사 과정을 한다 치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일하겠다”며 93년 방송사에 입사한 고동선 감독은 황인뢰, 장수봉, 최종수, 김종학 등 쟁쟁한 선배들이 모여 있던 MBC 드라마국에서 “드라마를 진지하게 만드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선배들의 치열한 장인정신이 사람들 사이의 이해와 소통의 폭과 깊이를 더해줬고 휴머니즘의 수준을 높여주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작품들을 제가 비슷하게 만들거나 흉내 낼 수는 없지만 각각의 좋은 점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거죠.” 그리고 이제는 그 자신이 선배가 되어 “드라마는 실제가 아니지만 그로 인해 담론이 오가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그것이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교육만큼이나 중요한 백년지대계”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고동선 감독이 마음 속 지표처럼 남아 있는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MBC <베스트셀러 극장> ‘소나기’
1987년. 극본 장선우, 연출 최종수
“황순원 선생의 <소나기>를 드라마화한 작품이에요. ‘줄거리를 그대로 옮기는 게 뭐 그리 재미있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는 건 스토리만이 아니에요. 어떤 소설을 원작에 충실하게 영상화했을 때 텍스트가 그대로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걸로도 충분하거든요. 당시 최종수 선배는 문학성이 있는 드라마를 주로 만드는 편이었는데 특히 ‘소나기’ 같은 경우는 ‘아, 그 소년과 소녀가 정말 저렇게 생겼겠구나, 저런 행동을 했겠구나’ 하면서 상상하던 것들을 눈으로 확인할 때의 기쁨이 느껴졌던 것 같아요. 심지어 내 상상과 좀 다른 점이 있더라도 ‘저게 더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잘 만들어진 작품이었죠.”
MBC <땅>
1991년. 극본 김기팔, 연출 고석만
“옛날에는 ‘땅’이었고, 농부들은 ‘논’이라 부르고 요즘은 ‘부동산’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독점되는 현실을 담은 작품이었어요. 주인공을 맡았던 박규채 선생이 굉장히 독특하게 현실적이면서도 모순적인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그가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대사 “민나 도로보데스!(다 도둑놈들이야!)”가 아주 유명했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정치권의 압력으로 조기 종영되는 바람에 제대로 된 끝은 보지 못했고, 당시 고석만 선배와 스태프들이 목 놓아 울었다고 해요. 그리고 김기팔 작가가 그 해에 사망하는 바람에 <땅>이 그의 유작이 되었어요. 슬픈 드라마죠.”
MBC <창 밖에는 태양이 빛났다>
1992년. 극본 박정화, 연출 황인뢰
“황인뢰 선배 작품을 보고 연출을 하겠다고 뛰어든 사람이 많아요. 그 분이 많은 사람들을 꼬셨고 저도 그 중 하나인 셈이죠. (웃음) <창 밖에는 태양이 빛났다>는 대학원생일 때 봤던 작품인데, 멜로이면서 묘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가 있고 스토리나 캐릭터가 전형적으로 흐르지 않는 걸 보면서 ‘이런 게 드라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하나의 공간 안에서 주인공 네 사람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분위기도 판타스틱 했고, 영상 자체가 매혹적이었어요. 황인뢰 선배의 작품 중에는 <고개 숙인 남자>도 좋아하는데, 언론인을 연기했던 최불암 선생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게 정권 비판적이라고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어요. 제가 사회과학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으로 얘기하기 힘든 진실을 드라마를 통해 그렇게 풍부하고 깊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나요.”
“‘사람’을 단순화시키고 싶지 않아요”
<내조의 여왕>을 마친 뒤 요즘 잠시 한숨 돌리며 사람들을 만나거나 읽지 못했던 책을 읽고 있다는 고동선 감독은 그동안 그래왔듯 앞으로도 사람에 대한 해석을 깊이 있게 하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 한다. “A는 좋은 사람, B는 나쁜 사람, 하는 식으로 ‘사람’을 단순화시키고 싶지 않아요. 저 자신도 누군가 나를 좀 더 이해하고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으니까 제가 다루는 캐릭터 역시 깊이 있고 중층적으로 보고 싶은 거죠.” <007> 시리즈와 같은 첩보, 액션, 멜로 같은 소재를 늘 좋아했기 때문에 <달콤한 스파이>를 만들기도 했다는 그는 다음 작품에서 “좀 더 스케일이 있는” 걸 해 보고 싶은 욕심도 있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기획에서 방송까지 훨씬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하나의 이야기만을 생각할 수는 없지만 결국 “어떤 그릇에든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라는 그의 말은 액면 그대로의 믿음을 준다. 그동안 어떤 모양새의 그릇에든 재미와 진정성을 담아냈던 그의 작품들을 떠올려 보면 당연한 일이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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