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PIFAN)에는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 <명탐정 코난: 칠흑의 추적자>, <뮤> 등 매진사례를 기록하는 영화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다. 여기에 매진 사례를 또 하나 더했으니, 바로 <적도의 꽃>이다. 1983년 최인호 원작의 동명 신문연재소설을 영화화한 <적도의 꽃>은 당시 한국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로 그해 최고의 흥행영화로 기록됐다. 순수한 사랑을 갈구하지만 타락한 육체라는 낙인이 찍히는 선영(장미희)과 그녀를 훔쳐보는 미스터 M(안성기)을 통해 급격하게 이루어진 경제개발 뒤에 잉여인간으로 살던 청춘들의 무기력과 방황을 에로틱한 코드로 그려냈다. 한국영화 회고전 ‘1980 도시성애영화’의 초대작으로 ‘에로틱 스케이프: 섹슈얼리티, 도시 그리고 80년대 에로틱 시네마’메가 토크를 가진 <적도의 꽃>. “야한 프로그램 이름 때문에 흥행에 성공한 것 같다”는 배창호 감독의 말과는 달리 “대중문화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음에도 조망되지 않았던 에로영화를 짚어보는” 시간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감독은 “20년 전 첫 시사했던 기분으로 돌아가” 그 당시 태어났음직한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한 후 박진형 프로그래머의 사회로 주유신 영산대 교수, 김형석 전 <스크린> 편집장, 조혜영 서울환경영화제 프로그래머와 80년대 에로영화를 얘기했다.

<적도의 꽃>은 83년도 개봉 당시, 한국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들을 한 동시에 80년대의 사회문화적인 환경을 엿볼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최인호 작가의 원작에 매료되어 영화화를 결심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배창호
: 처음 PIFAN에서 <적도의 꽃> 상연한다고 해서 반가웠는데 ‘에로틱 스케이프’라고 해서 한참 웃었다. 그 당시 만들어진 영화중엔 훨씬 더 야한 영화도 많은데 말이다. (웃음) 표도 많이 팔렸다고 하던데 프로그램 이름 때문에 흥행에 성공한 것 같다. 야한 게 있나 해서 왔다가 실망한 사람 없는지 걱정이다. (웃음) 빈민 근로자들을 다뤘던 <꼬방동네 사람들>, <철인들>과 다르게 <적도의 꽃>은 개인적인 이유로 하고 싶었다. 당시 많은 감독들이 이 작품을 두고 영화화를 하기 위해 경합을 벌이기도 했는데, 원작은 내가 평소 하고자 했던 화두에 닿아 있었다. 인간 내면 깊숙이 들어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와중에, 근대화를 벗어나서 발전하기 시작하는 서울의 현대적이 모습을 보여주며 그 안의 특징적인 인간형을 그리면 어떨까 했다. 영화계에 입문하면서부터 품었던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질 수 있겠구나 했고. 특히 많은 이들이 믿고 있는 사랑, 실제로는 욕망을 사랑으로 왜곡되어 받아들이고 있는 안타까움을 이 영화에 녹일 수 있겠다 싶어 영화로 만들게 되었다.

“당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세 채를 한꺼번에 촬영했다”

인기 있던 원작소설을 영화화 하면서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두었는지?
배창호
: 사실 20년이 지나서 <적도의 꽃>을 극장에서 보니까 내 작품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웃음) 영상적인 무게감이나 깊이에 신경을 많이 썼다. 지금은 디지털화 되어서 색 보정 같은 것도 손쉽게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아날로그로 영상을 만들어야 해서 수작업이 많이 들었다. 간단한 실내조명만 해도 세팅하는데 한 컷에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거기다 지금까지도 있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한꺼번에 세 채씩, 그것도 조명을 엄청나게 쏘면서 찍었는데도 주민들이 항의도 안했다. 지금은 물론 힘들겠지만. (웃음) 그렇게 스태프들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들었다. 또 80년대에는 문학 작품을 영화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관객들은 소설의 문학성이 영화로 어떻게 번역이 됐을까 하는 문학적인 관심이 컸다. 사실 미스터 M의 경우도 원작에선 훨씬 더 복잡한 인물이었다. 마네킹을 유일한 말 상대로 삼다가, 그것에 싫증이 나서 버리는 데서 소설이 시작하는데 시나리오도 처음에는 그랬다. 심리적인 구조도 복잡하고 정신분석적이었다. 그러나 최인호 선배와 함께 각색하면서 평범한 사람들도 충분히 그러함직하고 공감할 수 있게 바꾸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럼에도 미스터 M과 선영이라는 인물은 굉장히 난해하고 그 당시 영화에서 보기 힘든 인물이다.
배창호
: 미스터 M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힌트는 영화에서 주제곡이 나오는 신은 미스터 M이 가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생각이라고 보면 된다. 그는 욕망과 사랑, 이 둘을 모두 사랑으로 본다. 게다가 선영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심판하고, 육체적인 것은 거부하는 것을 순수한 사랑이라고 여긴다. 미스터 M의 집에 걸려있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그림도 물질문명 속에서 정신적인 사랑을 재생시키려던 미스터 M의 정신적인 욕망을 상징하는 장치였다. 그러나 결국 선영의 죽음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정리하게 된다. 여기엔 물론 그 당시 문학가들이 잘 다루던 인간성의 마모도 나와 있다. 영화 시작과 끝이 아파트인 것도 그러한 장치이다. 지금은 아파트에서 태어난 사람도 많고, 아파트가 친근하지만 그 당시 아파트는 지금의 인터넷처럼 도시문명의 익명성을 상징했다.

“80년대 에로영화는 한국여화 최초의 장르 하이브리드”

그렇게 당시 영화에서 보이는 아파트라는 공간은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적도의 꽃>처럼 관음증으로 대표되는 성적인 욕망의 요람 같은 공간인데, 그 당시 아파트라는 공간은 어떤 의미인가?
조혜영
: 광주민주화운동이나 88 올림픽, 프로야구 등 80년대는 스펙터클이 일상화된 시대였는데, 이러한 스펙터클의 연속성을 가진 것이 아파트다. 6-70년대 초반 영화에 등장한 아파트는 서구식 생활을 지향하는 계층이거나 독신의 젊은 남녀 등 특수한 계층에게 허용된 공간이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서면서 도시에 몰려든 엄청난 사람들을 강남에 지어진 대단위 아파트라는 스펙터클이 수용하게 되고, 그에 따라 아파트는 개인의 욕망이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사생활의 공간으로 변하게 된다. 따라서 <적도의 꽃>에서 보듯이 아파트는 익명성으로 묘사되는 한편 개인의 판타지를 완전하게 실천할 수 있는 성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그렇다면 대체 이러한 80년대 에로틱 영화는 도대체 어떤 것인지 ‘에로영화 전문가’께서 말해 달라. (웃음)
김형석
: 당시의 영화들은 에로영화라기보다는 에로티시즘 멜로드라마, 에로틱한 요소가 있는 스릴러로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한국영화사에서 이렇게 특정한 시기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갑자기 사라진 영화들은 80년대 에로티시즘 영화밖에 없다. 82년 <애마부인>의 등장을 시작으로 에로영화들이 엄청나게 쏟아졌다. 그 이후는 비디오 시장으로 넘어갔고. 그러나 80년대 에로영화는 포르노그래피적인 비디오용 에로영화와는 구분해야한다. 이 시기에는 한국 영화사에서 그 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만나기 힘든 시도들이 많았다. 팜므파탈, 지골로 같은 캐릭터들이 처음으로 등장했고, 동성애적인 코드나 레즈비어니즘도 강하게 시도했다. <적도의 꽃>의 미스터 M처럼 복합적인 캐릭터 또한 이전의 한국영화에선 찾기 힘들다. 또 <매춘> 같은 영화들은 매춘으로 대표되는 사회구조적인 모순 고발하기도 하고, <무릎과 무릎사이>처럼 80년대 초반의 소비자본주의와 외국문물의 급격한 유입으로 인한 대중의 혼란을 반영했다. 가장 큰 성과는 이전의 한국영화들은 액션, 멜로, 사극 정도만이 타성에 젖어서 제작되는 등 장르적으로 고착됐었는데, 에로티시즘이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장르적인 교차가 가능해졌다. 코믹, 멜로,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적 요소들이 에로티시즘 안에서 하이브리드되는 최초의 시도들이었다.

“과감한 섹슈얼리티의 묘사, 더 많은 섹스 신을 영화에 넣기 위한 알리바이”

이런 영화적인 측면 외에 80년대 에로영화의 시대적인 등장 배경과 의의를 살펴보자.
주유신
: 일단 에로영화의 등장 배경에는 정치학이 얽혀있다. 비합법적이고 폭력적인 80년대 군부정권이 피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정통성 없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3S정책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스포츠 외에 스크린과 섹스를 적극적으로 합친 것이 80년대 에로영화였다. 또 전두환,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는 경제적 호황 속에서 섹스산업도 함께 팽창했는데, 지금 볼 수 있는 향락산업의 종류가 당시에 거의 완성되었다. 그러한 무분별한 소비주의와 섹슈얼리티가 결합되면서 영화 안에서도 죄책감 없는 성적 탐닉을 가능케 했다. 그렇게 탄생한 80년대 에로영화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마어마하게 여성에게 초점을 맞추며 여성의 욕망과 섹슈얼리티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주제를 추구했다. 80년대까지는 성에 대해 말하기조차 억압됐던 것은 물론이고 성과학 등의 연구도 전무했다. 그래서 에로영화가 성 담론의 창구 같은 역할을 굉장히 통속적인 방식으로 어느 정도 수행한 측면도 있다.

그렇다면 갑자기 공룡처럼 등장했다 화석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80년대 에로영화의 한계는 무엇일까?
주유신
: 당시의 에로영화는 한국사회에서 포르노의 역할을 했다. 표면적인 형식은 소프트 코어였지만 기능은 하드코어적으로 관객들의 섹슈얼리티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효과적인 자극을 위해 다양한 영화적 표현과 장치들을 개발했다. 앞서 말씀하신 영화적인 새로운 시도들도 허용된 범위 안에서 성적인 자극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여성의 성에 대한 묘사가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통념, 가설에 머물러 있었다는 한계가 있다. 과감한 섹슈얼리티의 묘사도 더 많은 섹스 신을 영화에 넣기 위한 알리바이의 일환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대거 등장한 동성애나 레즈비어니즘, 관음증 같은 도착적 섹슈얼리티도 진정으로 사회적인 통념을 전복시키기 위한 저항성이나 정치적인 주목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극적인 시각화를 위한 측면이 강했다고 본다.

글. 부천=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부천=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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