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는 깡패구 당신은 피아노 선생이고, 내는 시커멓고 당신은 새하얗고, 내는 당신한테 구리반지 하나 해줄 돈도 없는 쌩알거지고…. 나 근데 헤엄은 잘 쳐요. 당신이 물에 빠져두 나만 있음 걱정 없으예.” 촌스럽고 투박한, 그러나 피를 토하는 듯 절절했던 억관(조재현)의 혜림(조민수)을 향한 고백이 보는 이들의 심장에 직구로 꽂힌 것은 2001년 SBS <피아노>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피아노>가 미니시리즈 데뷔작이었던 김규완 작가는 그 이후 MBC <사랑한다 말해줘>, SBS <봄날>, <불한당> 등을 통해 ‘순정’이라는 막연한 정서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가 되어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가를 보여주었다.

‘부산 출신, 인생의 풍상을 지독히 겪은 중장년층 남성’으로 예상되는 작품의 분위기와 달리 김규완 작가는 똑 부러지는 말투의 서울 사람이다. “제가 드라마에 쓴 것 같은 삶을 실제로 겪어본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야기를 좀 더 담담하게 그리지 않았을까요. (웃음)” 그는 국문과를 졸업했고, 작가가 되기 전 7년 동안 학원에서 중고등학생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학교가 끝난 뒤인 오후에 수업을 시작해 밤늦게 끝나고, 주말 내내 일을 하는 학원 강사직의 특성상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었던 그는 책과 영화로 여가를 보냈고, “남들이 영어학원에 다니듯 방송작가협회 교육원에 다니며”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사투리를 원래 좋아해서 책으로도 많이 읽었는데, <피아노>를 쓰기 전에는 보름 정도 부산에 가서 매일 이 동네 저 동네 목욕탕을 돌며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 아줌마들이 싸우는 소리 같은 걸 듣곤 했어요.”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을 것 같다는 김규완 작가는 자신이 썼던 드라마 안에서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 방식 중에서도 가장 뜨겁고 격렬한 게 사랑이죠.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지 못하는 불가항력의 지대에 발을 딱 담그고 말았을 때 벌어지는 갖가지 예상하지 못한 일들, 휘황찬란한 감정들로부터 비롯되는 순간을 떠올리며 멜로드라마를 썼던 것 같아요” 그런 그가 ‘드라마를 쓰는 일’과 본격적인 사랑에 빠지기 전, 어느 순간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드라마들은 다음과 같다.

MBC <전원일기>
1980~2003년

“김정수 선생님이 쓰시던 당시의 <전원일기>를 특히 좋아해서 아직도 기억이 나요. 김회장(최불암)댁 배 밭에 일손이 모자라서 금동이의 농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일을 하고 밤에는 마당에 모여 노래하고 춤추면서 노는데 그 소리가 마을 곳곳에 울려 퍼져요. 그 소리에 마음이 들썩이신 양촌리 단짝 할아버지 세 분이 이런 대화를 하시죠. “우리도 저기 좀 가 보자” “놀게 놔두지 우리가 가서 왜 방해를 놓나” 그러자 다른 한 노인이 “그래도 한번 가보자. 크는 애들 본 지도 오래 됐는데”라는 말을 하면서 슬그머니 그 쪽으로 발을 옮기는데 그 대사가, 이미 젊은 애들이 다 빠져나가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기 힘든 농촌의 쓸쓸한 현실이라던지 마을의 고적함, 인생의 황혼기에 대한 생각 같은 걸 한꺼번에 떠올리게 하면서 마음에 많이 남더라구요.”

MBC <사랑과 진실>
1984년, 극본 김수현, 연출 박철

“‘신분이 바뀐 아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드라마에요. 교통사고로 죽어가던 엄마가 두 딸 중 하나에게 너는 내 친딸이 아니고 너의 진짜 엄마는 아주 부자로 어디 살고 있으니 찾아가서 한 학기 등록금만 좀 부탁하라는 말을 남겨요. 그런데 정작 이 얘기를 들은 다른 딸이 몰래 부잣집을 찾아가 그 집 딸 행세를 하며 살아요. 김수현 선생님 작품이 다 그렇지만 정말, 말도 못하게 재밌어서 거의 중독 상태로 봤던 기억이 나요. (웃음) 거짓말을 해서 신분이 뒤바뀐 작은 딸 역을 원미경 씨가 연기했는데, 진실을 숨기고 사는 사람의 고통스럽고 복잡한 심리가 굉장히 정교하게 드러나서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죠. 그걸 보면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SBS <모래시계>
1995년, 극본 송지나, 연출 김종학

“저는 격렬했던 80년대에 대학을 다녔어요. 그 시절 대학에 다니거나 젊음을 보냈던 개인들이 누구나 격렬하고 치열하게 전사나 투사로 살았던 건 아니었지만, 심지어 그렇지 않더라도 시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게 80년대였어요. 그리고 시대의 아픔을 느꼈건 냉소를 보냈건, 혹은 무관심했다 하더라도 그것조차 시대적 영향이고 내가 통과해온 시대에 대해 무심한 척 해도 정말 무심할 수는 없었던 그 때, 그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는 드라마로 나와 준 작품이 <모래시계>였어요. 그래서 저를 포함해 당시 ‘386’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열심히 봤고, 또 그 세대가 아닌 사람들조차 열광하며 볼 만큼 흥미로운 드라마였죠.”

“굉장히 완벽해 보이는 사람의 어두운 그늘을 써보고 싶어요”

“꼭 의식하고 쓰는 건 아닌데, 주로 제가 시선을 주게 되는 대상은 ‘찌질한 사람들’이에요. (웃음) 좀 못난 사람들에게 자꾸 애정을 주다 보면 그들이 희망을 갖게 되고, 또 드라마 후반부에는 좀 멋있어지기도 하잖아요. 아마 내가 그렇게 잘나지 못해서, 그들이 마치 나 같아서 그런 것 같아요” 밑바닥 삶을 사는, 혹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지닌 이들이 만나 서로를 위로하거나 치유하는 김규완 작가의 드라마들이 양지 대신 음지에 내리쬐는 햇살 같은 힘을 갖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요즘 몇 가지 이야기를 구상 중인데, 언젠가는 굉장히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그늘에 대해 써보고 싶어요.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동시에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남들이 보기에 무결점인 사람이 이를테면 아무도 모르게 원조교제를 하고 있다거나 하는 거죠.”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그가 쓰고 싶은 것은 쇼킹한 스토리가 아니라 ‘그래서 더 외로울 수 있는 인간의 내면’이다. 그야말로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을 이야기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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