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시네마의 거성 톰 칼린이 15년 만에 내놓은 신작 <세비지 그레이스>가 지난 6월 24일 국내 공개됐다. <세비지 그레이스>는 70년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베이클랜드가(家)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다. 1972년 런던의 고급 아파트에서 50살의 바바라 베이클랜드가 아들 안토니에게 식칼로 살해당했다. 경찰이 도착했을 무렵 안토니는 태연하게 중국 식당에 배달 주문을 하고 있었다. 플라스틱을 발명한 부자 가문에서 일어난 존속살인 사건은 당시 서구 사회의 엄청난 가십거리였다. 아들 안토니와 엄마인 바바라가 성적인 관계를 맺어왔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정신이상으로 구금된 안토니는 출감 직후인 1980년에 할머니를 다시 칼로 찔렀고 1년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비지 그레이스>는 1946년부터 1972년까지 30여년에 걸친 베이클랜드 가족의 궤적을 찬찬히 따르는 영화다. 아버지는 아들의 연인과 사랑에 빠져 야반도주하고, 아들과 엄마는 바이섹슈얼 남자를 사이에 둔 사랑 놀음에 심취하는 등 스페인과 프랑스와 영국의 저택을 부유하듯 떠돈다. <졸도>를 통해 90년대 퀴어시네마의 희망으로 오롯했던 톰 칼린은 극단적으로 유미주의적인 미장센을 통해 한 부르조아 모자가 정신적으로 황폐해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세비지 그레이스>는 7월 9일 메가박스 코엑스, 시네큐브 광화문, 중앙 시네마에서만 제한적으로 개봉한다.

공허한 이야기를 메우는 미장센과 열연

솔직히 톰 칼린이 베이클랜드 살인사건을 파헤치는데 크게 흥미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세비지 그레이스>는 뒤틀린 모자의 30여년에 걸친 삶을 꼼꼼하게 뒤따르는 재현극에 가까운 영화다. 왜 아들이 엄마를 살해했는지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이거나 사회학적인 답변을 바라는 관객이라면 복장이 터질 거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교훈이라면 ‘역시 백만장자도 직업이 있어야 정신줄 놓지 않는다’ 정도랄까. 그러니 <세비지 그레이스>를 재미지게 감상하는 방법은 딱 하나다. 근사한 로케이션과 패션과 소품들로 재현된 당대 부르조아 라이프 스타일로 두 눈을 호강시키는 거다. 모든 미장센이 결벽증적으로 완벽한 나머지 종종 스크린에 목이 졸려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바바라의 마음만큼이나 공허한 이야기의 구멍을 메우는 건 훌륭한 배우들이다. 줄리안 무어는 광기, 슬픔, 비뚤어진 성적 열망 등 극단적인 감정을 비범한 연기로 토해낸다. <디 아워스>, <파 프롬 헤븐>, <엔드 오브 어페어>로 쌓아올린 줄리안 무어식 신경과민 주부 연기의 절정이다. 영국 훈남 중독증 환자라면 <세비지 그레이스>를 놓치는 건 일종의 범죄다. 엄마, 아들과 동시에 섹스하는 바이섹슈얼 미남자는 휴 댄시가, 게이 아들 안토니는 신인 에디 레드메인이 연기한다. 둘 다 브리티시 악센트로 혀를 굴리는 버버리 모델 출신이다.

글. 김도훈 ( 기자)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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