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MBC <세바퀴>에서 춘리 코스프레를 하고 출연한 임예진 씨가 놀림을 당했던 거 기억나시죠? 물론 임예진 씨 놀려먹는 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 복장 자체가 놀림을 유도한 설정이긴 하지만 차차 정도가 너무 심해지더라고요. 그러다 급기야 “다음 주엔 스모 선수 복장으로 나오지 그래요?”라는 소리까지 나오자 양희은 씨가 곁에서 “제가 어울려요, 스모는” 하며 막아주시는 거 보고 ‘역시!’ 했답니다. 그래놓으니 벌떼처럼 깐죽대던 무리들이 살충제라도 뿌린 양 잠잠해졌지 뭐에요. 아무리 웃자고 하는 얘기라 해도 여자더러 팬티 한 장만 입는 스모 복장을 하라니요,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랍니까. 이처럼 배가 산으로 간다 싶을 때면 알게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돌리는 일, 그게 <세바퀴>에서의 양희은 씨 역할이지만, 사실 또 양희은 씨나 되니 가능한 일이기도 하죠.

지켜보고 있다, 양희은 님께서

어디 <세바퀴>뿐이겠습니까. KBS <천하무적 토요일> ‘천하무적 야구단’에서도 간간히 들리는 내레이션으로 천방지축 멤버들을 조련하시잖아요. ‘천하무적 야구단’이 임창정, 이하늘, 김창렬 등으로 이루어진, 세칭 A급 MC라곤 하나 없는 팀이거늘 과히 흐트러짐 없이 정돈이 되는 게 신기하다 했더니 그게 다 양희은 씨 목소리의 힘이지 싶더라고요. 뭐랄까, 명절 날 온 집안 식구가 마루에 모여 송편이나 만두를 빚을 때, 혹은 삼삼오오 모여 화투라도 칠 때, 방 안에서 홀로 귀 기울이다가 재미있는 얘기가 들리면 한 번씩 슬며시 웃으시는 아버지와 같다고 할까요. 자기들끼리 떠들썩하게 놀고 있지만 다들 머릿속 한 귀퉁이엔 아버지가 계신 거거든요. 울컥해 형에게 버럭 거리려다 순간 “아 참, 아버지가 계시지” 하고 참는다든지, 일 저지른 아이를 쥐어박으려다 방에 계신 아버지에 생각이 미쳐 조곤조곤 타이르게 된다든지, 뭐 이런 것들 말이에요. 어쩌면 <천하무적 야구단> 멤버들도 녹음하느라 녹화된 화면을 보실 양희은 씨가 마음에 걸려 멈칫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예요.

양희은 씨 같은 어려운 선배가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해봐요. 어느 누가 감히 오만불손한 행동을 할 수가 있겠어요? 아마 <세바퀴>에서는 그 자리에 계시다는 것 자체가 제작진에겐 큰 힘일 거예요. 사실 독설가 김구라가 유달리 이 프로그램에서만은 힘을 쓰지 못하는 것도 다 양희은 씨 눈치가 보여서가 아닐는지요. 그런가하면 故 여운계 선생님이 나오셨을 때, 정글 같은 살벌한 분위기에 말씀 한 마디 못하고 구경만 하시자 가끔 질문을 드려 화면에 나올 수 있게 배려한 것도 양희은 씨였잖아요. 이렇게 과할 때는 나직한 한 마디로 제지하고 모자랄 때는 넌지시 슬쩍 얹어주는 식으로 훈수 두는 어른이 오락프로그램 안에서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절실히 필요하건만 왜 요즘은 그런 어른들이 아예 멸종 위기인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임예진 씨가 부러울 줄이야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평소 양희은 씨 같은 언니가 한 분 계셨으면 했어요. 굳이 언니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슴 답답하고 속 터질 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바른 길을 제대로 알려주실 분이 계시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람은 나이가 많든 적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적절한 조언자가 필요한 법이잖아요. 하다못해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틀렸을 땐 따끔히 지적해줄 누군가가 있어야 하거든요. 또한 어떤 신랄한 지적을 받더라도 고깝게 여기지 않고 긍정적으로 수용을 하게 만들 무게를 지닌 분이어야 진정한 조언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특히 요즘엔 하도 추하게 나이를 먹는 어르신들이 도처에서 출몰 중이신지라 슬슬 걱정이 되더라고요. 어른이 어른 노릇을 제대로 해야 나라가 바로 설 진데 그러기는커녕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귓등으로 흘리고 남의 말 아랑곳 안 하는 고집불통 늙은이처럼 저도 그리 될까, 그게 너무 두렵습니다. 제가 혹여 사리분별 못하고 물색없이 나댈 때 눈빛 하나로 저를 일깨워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저희 집 식솔 두루 다 다스려주시면 감읍하겠지만 그건 무리지 싶고 저 하나라도 어찌 안 될까요? 무려 30여 년 전 영화 <진짜 진짜 좋아해> 시절의 해맑고 고운 임예진 씨는 그다지 부럽지 않았는데 지금 양희은 씨 옆 자리의 임예진 씨는 진정 부럽네요.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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